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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의 망원경…나는 '아마튜어 천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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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의 망원경…나는 '아마튜어 천문가'입니다"

[문화, 우주를 만나다] 별을 쫓던 어린 시절

2009년은 유엔(UN)이 결의하고 국제천문연맹(IAU), 유네스코(UNESCO)가 지정한 '세계 천문의 해'이다.

실제로 2009년은 아주 뜻깊은 해이다.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만들어서 천체를 관측하기 시작한 지 400주년, 허블의 우주 팽창 발견 80주년, 인류의 달 착륙 40주년, 외계 지성체 탐사프로젝트 제안 50주년 및 메시지 송신 35주년을 맞은 해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2009 세계 천문의 해'를 맞아 한국조직위원회를 만들어서 국제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다. 이미 4월 2일부터 5일까지 전 세계 천문대에서는 100시간 동안 연속으로 별을 관측하고 길거리에서 천문학자·아마추어천문가가 일반인과 함께 별을 관측하는 전 지구적인 행사가 열렸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특별히 이동 천문대 '스타-카'가 소외 지역 아이들을 찾아가고, '과학과 예술의 만남'과 같은 전시회도 준비 중이다. 이런 내용은 2009 세계 천문의 해 한국조직위원회가 운영하는 홈페이지와 웹진 <이야진(IYAZINE)>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바로 가기)

<프레시안>은 이런 '2009 세계 천문의 해'를 맞아 '문화, 우주를 만나다' 연재를 <이야진>과 공동으로 연재한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꿈을 키웠던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별, 우주, 문화, 예술 등을 화두로 매주 한 편씩 에세이를 선보인다. <편집자>


▲ 화살자리에 있는 구상성단 M71. M71은 1746년 스위스 천문학자 슈조(Philippe Loys de Chéseaux)가 처음 발견하였고, 1780년에 샤를 메시에(Charles Messie)가 자신의 목록에 포함하였다. M71은 공처럼 빽빽하게 밀집된 다른 구상성단보다 느슨한 형태를 하고 있다. 그래서 발견 뒤 분류할 때 많은 천문학자들은 M11처럼 비교적 뭉쳐 있는 산개성단이라고 생각했고, 여전히 M71의 유형에 대해서 논란이 되고 있다. ⓒ한국천문연구원(사진=김삼진)

처음으로 별을 보다

내가 처음으로 별을 본 것이 언제였는지 또 언제부터 지금처럼 별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확실히 기억나질 않는다. 다만 언뜻언뜻 남아있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짚어 보면 언젠가부터 나는 집 앞 마당이나 장독대에 올라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그 시절엔 그 별들의 이름이나 그 별들에 얽힌 사연을 전혀 몰랐다.

그러나 별을 보기 위해 고심했던 그 처음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우리 집은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와 아주 멀리 떨어져 늘 버스를 타고 통학을 했다. 그런 어느 날 학교 앞을 한 두 정거장 앞두고 차창 밖의 무엇을 본 나는 홀린 것처럼 버스에서 내려버렸다. 그리고 나는 어느 서점의 진열대 앞에서 등교시간도 잊은 채 한참을 서 있었다.

그때 내가 보고 있던 것은 <학생과학>이라는 청소년 과학 잡지였다. 지금도 그 잡지의 색깔이며 표지 모양이 기억이 생생한데, 그 잡지의 표지에는 "5인치 뉴턴식 반사망원경 제작법"이라는 커다란 타이틀이 붙어있었고 얼굴이 뽀얀 어느 까까머리 중학생이 망원경을 보고 있는 모습이 표지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날 이후 한 동안 그 책값을 마련하기 위해 소란을 떨었던 나는 다행히 다음호가 나오기 전에 가까스로 그 책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나도 이제 망원경을 만들 수 있겠구나….'

서점에서 책을 들고 나오면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설레임도 잠시, 부푼 마음으로 읽어내려가던 망원경 제작법에 관한 기사 안에는 알 수 없는 용어와 내용들로 가득했다. 5인치 뉴턴식 반사망원경은 초등학교 5학년 꼬맹이가 만들 수 있는 망원경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꼬맹이는 그 잡지의 한 구석에서 다른 희망을 발견하였다.

"한국 아마튜어 천문가회(KAAA) 회원 모집 (…) 별보는 사람들의 모임 (…).

그것은 별은 아니었으나 소년에게는 별처럼 느껴졌다. 소년에게는 희망이 바로 별이었으니 말이다.

처음으로 천체망원경을 보다

그 모임에 가입하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소요되었다. 당시 500원 정도하던 가입비는 초등학생인 내게 매우 큰 돈이었다. 또 별을 보는 모임이었으니 밤에 모임에 나가는 것 자체도 어린 내게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끈질기게 부모님을 설득했던 나는 몇 달 후 당시 모임이 열리던 연세대학교 나일성 교수님의 강의실에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강의실의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꼬맹이를 교수님은 매우 귀여워해 주셨고 별자리에 관한 질문도 많이 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사실 당시 나는 그 날의 별자리와 그 위치를 훤히 알고 있었다.)

교수님의 강의가 끝나면 회원들은 모두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가 천체망원경으로 별을 관측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강의실의 옥상에는 몇 대의 천체망원경과 작은 돔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돔 안에는 연구용 망원경이 있었다. 회원들에게는 가끔 그 연구용 망원경으로 행성이나 성운 성단들을 관측할 행운이 주어졌는데, 내가 처음 참석한 날은 그 망원경으로 목성을 관측하였다.

내가 처음으로 망원경을 본 그날 그 망원경의 시야 안에는 갈릴레이 4대 위성과 목성의 줄무늬가 선명했다. 그 목성의 모습이 내가 처음 천체망원경을 통해 본 천체의 모습이었고, 망원경으로 별을 보는 기쁨을 알게 한 첫 사건으로 기억한다.

▲ 1976년 여름 관측회. 맨 왼쪽 고 나은선 선생님, 오른쪽 세 번째 나일성 교수님. 오른쪽 네 번째 필자. ⓒ정규성

망원경을 만들기로 마음먹다

호기심이 나무보다 컸던 어린 시절, 한 달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모임에서의 관측으로는 도무지 만족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어디서 망원경을 구입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국내에는 제대로 된 천체망원경 제작사가 없었고, 외국산 망원경을 수입한다는 것은 서울에서 집을 한 채 사는 일 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나는 수백년 전에 갈릴레이가 그랬던 것처럼 안경렌즈와 학교 생물 실험실에서 빌린 현미경의 대안렌즈를 PVC 통에 넣어 제법 그럴 듯한 망원경을 만들어 달의 분화구와 목성의 위성을 관측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갈릴레이식 망원경은 내가 정작 보고 싶었던 성운성단의 모습을 보기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큰 구경의 망원경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큰 망원경이란 것이 바로 내가 처음 잡지에서 본 이해할 수 없던 내용으로 가득 찬 제작법을 통해 만들어야만 하는 반사망원경이란 것을 알게 되는데 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별보는 모임에는 어린 나이의 내가 보기에도 괴상한 어른들이 많았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분들이 모였는데 가끔은 외국산 망원경을 가지고 계신 분들도 있었고 또 신기한 망원경 주변 장치를 만들어 모임에 가지고 나와 좋아라 하는 분들이 계셨다. 그러던 어느날 어른들이 삼삼오오 모여 망원경을 만드는 이야길 하고 있는 것을 듣게 되었는데, 우리 회원 중의 한분인 어떤 노인께서 바로 망원경을 만드는 전문가이며 그 분의 댁에 방문을 하자는 이야기가 내 귀에 들렸다.

'그 할아버지의 집에 가면 망원경을 만들 수 있단 말이지?' 그날 나는 그 분 댁에 가서 망원경을 만드는 법을 배우겠다고 마음먹었다.

드디어 6인치 반사망원경을 완성하다

초등학교 6학년 가을 쯤이었다. 나는 틈만 나면 서교동의 한 주택가를 놀러가곤 했다. 내가 "나 할아버지"라고 부르던 분이 바로 천체망원경 제작을 연구하시던 "고 나은선 선생님"이셨다.

어린 꼬맹이를 손자처럼 귀여워해주신 선생님은 내게 망원경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를 말씀해 주셨는데, 나는 그 재료들을 꼼꼼히 적어 청계천의 공구상과 종로 4가의 초자기 재료상에서 그것들을 구입하였다. 그것들은 유리를 연마하기 위한 연마재와 반사경의 재료가 되는 6인치 파이렉스 유리 2장이었다.

선생님께 배운 대로 목공소에서 연마대를 만들어 집에서 반사경의 연마를 시작했다. (당시 어린 아들이 방에서 유리를 가는 모습을 걱정스럽게 보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반사경을 정해진 초점거리로 깍아 내는 일은 어린 꼬맹이에게도 그리 어렵지 않아 한 2주 만에 완성을 하였다.

그러나 진짜 힘든 일은 그 다음이었다. 연마재로 갈아 놓은 유리는 뿌연 간유리 형태였는데 망원경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것을 매끈하게 광을 내야하며 이 과정에서 광학적으로 구면 혹은 포물면으로 만드는 작업을 해야 했다. 그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려운 수학이 필요했다. 이는 아이러니 하게도 수학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나를 수학 공부를 열심히 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석유파동이 한창이었던 그 해 긴 겨울방학동안 나는 선생님 댁의 2층 방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였고, 선생님의 도움으로 이듬해 봄 드디어 6인치 반사망원경의 주경을 구면으로 완성할 수 있었다. 그 동안 국내에는 망원경을 만드는 회사가 생겼다는 소식도 들렸지만, 내 손으로 망원경의 반사경을 만들었다는 자부심은 온 몸과 마음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이렇게 만든 반사경을 조립하여 선배가 갖고 있던 망원경의 가대에 올려놓고 처음으로 본 것은 토성과 목성이었다. 그 망원경은 토성의 고리와 목성의 줄무늬를 아주 선명하고 자세히 보여주었다.

그 순간의 감동을 무엇으로 비교할 수 있을까? 그 순간의 마음은 어떤 형용사로도 표현 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은 장비를 갖고 있고 거대한 대구경의 망원경으로 관측을 한 적도 있지만 내가 처음 만든 망원경으로 본 그 감동과 비교할 수는 없겠다.

그 때가 1976년 봄, 나는 까까머리 중학교 1학년 신입생이었다.

▲ 1976년 필자가 처음으로 만든 6인치 뉴턴식 반사망원경의 모습. 당시 마포에 살던 백기동선배(현 우성정밀광학 사장)의 집에서 조립하였다. ⓒ정규성

더 큰 망원경을 만들다

처음 만든 망원경은 나쁘지 않았으나, 반사경이 다소 작고 초점거리가 너무 길어 어두운 천체를 보는 데는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래서 좀 더 큰 망원경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1976년 한 해 동안 나는 8인치 반사망원경을 만드는 일에 빠져 살았다. 이전의 경험은 큰 바탕이 되어 좀 더 구체적으로 망원경을 만들 수 있었다. 반사경을 완성하는 일부터 철판을 둥글게 말아 경통을 만드는 일(8인치 유리를 넣을 수 있던 PVC 파이프는 시중에 없어 철판을 말아 경통을 만들어야만 했다), 수도 파이프를 연결하여 적도의식 가대를 만드는 일을 직접 해야만 했다. 이 망원경은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완성을 하였는데, 너무나 무겁고 거대하여 당시 아파트에 살던 나는 이 망원경을 보관할 수 있는 곳이 없어 옥상에 비닐 천막으로 덮어 두고 밤마다 관측을 하였다.

이 후 우리집 옥상은 별을 보던 내 친구들과 선배들의 아지트가 되었고 그 친구들은 아직까지도 내 소중한 벗들로 남아있다. 당시에는 서울에서도 은하수를 볼 수 있는 날이 제법 되었고, 특히 등화관제 훈련을 하는 밤은 우리만의 별축제를 벌일 수 있는 날이 되어 친구들과 손꼽아 기다리는 행사(?)의 하나였다. 그 당시는 모두가 어렵고 힘들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반짝이는 별 아래에서 더 반짝이던 눈으로 별을 보던 그 어린 소년들이 모습이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다.

▲ 1976년 8인치 반사경의 연마 도중 초점거리를 재고 있는 필자의 모습. ⓒ정규성

지금도 별을 따라다니며

이 후에는 나는 계속 별을 쫒아 헤매었고 그렇게 장성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수십 년이 흘러가버렸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별이 반짝이는 밤이 되면 어린 시절의 소년처럼 마음이 설렌다. 내가 손수 만든 망원경이 서있던 아파트 옥상은 이제 작은 망원경이 조립되어 설치된 베란다로 바뀌었다. 그리고 아직도 날이 좋은 밤이면 어린시절 처음 보았던 목성이며 토성을 보며 그 아름다움에 빠진다. 한 때 아빠의 직업을 천문학자로 오해하기도 했던 작은 녀석은 이 다음에 천문학자가 되겠다고 하여 나를 기쁘고도 걱성스럽게 만든다.

가끔은 일에 몰두하여 별을 보지 못한 적은 있으나 별을 동경하던 내 꿈을 포기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지금도 여전히 길을 가다 쇼윈도에 전시된 망원경을 보면 그때 그 소년처럼 마음이 설레어 발을 멈추기도 하며 어디서 별 소식이 들리면 제일 먼저 달려가곤 한다.

별은 나에게 무엇인가?

별보는 사람이 정말로 드물었던 어린 시절 별은 꿈이었고 희망이었고 또 자랑거리였다. 이제는 별이 추억이 될 법도 한 나이가 되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별은 내게 꿈이며 희망이며 또 자랑거리이다. 나는 지금도 사석이나 공석에서나 나를 "아마추어가 아니라 '아마튜어 천문가' 아무개입니다"라고 소개하곤 한다. 그 소년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여전히 '아마튜어 천문가'이다. 내게 별을 보는 즐거움을 선물한 이와 소중한 별친구들을 보내준 이에게 늘 감사한다.

▲ 한국아마튜어천문가회 회보. 1977년 10월 당시에 있던 행사와 망원경을 만들고 있는 회원들의 소식이 실려 있다. ⓒ정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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