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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도 똑같았네…치아 치료에 한 달 월급이 '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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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도 똑같았네…치아 치료에 한 달 월급이 '훅'!"

[의학사 산책] 한국 치과의 역사

나이 든 독자들은 유치가 빠지고 영구치가 날 때 흔들거리는 치아에 신경을 썼던 상황을 경험했을 것이다. 호기심에 손으로 유치를 이리저리 흔들다가 재수가 좋으면 별 고통 없이 쑥 빠졌을 때의 기쁨이란!

그런데 이렇게 해도 치아가 빠지지 않으면 집에 있던 실을 이용하였다. 실을 흔들리는 이의 뿌리 쪽에 감고 순간적으로 당겨 이를 뽑았다. 빠진 치아는 어김없이 아파트가 아닌 집의 지붕 위로 던져졌다.

동의보감과 치과

▲ 실로 이를 뽑고 있는 시골 아낙. 분쉬 촬영(1903). ⓒ동은의학박물관
<동의보감>의 외형편에서 구설(口舌)과 아치(牙齒) 항목이 현재의 치과 분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질병의 원인에 대한 해석은 현재의 개념으로 이해하기 어렵지만, 병명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반면 치료에 사용되는 방법이나 약제는 민간요법으로 사용되던 것이었는데 비과학적인 면이 많았다. 또 전문 의원이나 약물 요법은 물론, 특수한 금관이나 의치 같은 이공학적인 요법도 없었다.

서양 의학 도입 초기의 치과

알렌은 한국인이 아침에 일어나 소금을 손가락에 묻혀 이를 닦는다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이를 뽑아 달라고 온 한국인이 있어 자신이 받았던 외과 수업을 기억해 뽑아주었다.

알렌과 헤론의 <제중원 일차년도 보고서>에는 치과 분야의 다양한 진료 기록이 담겨 있는데, 1년 동안 충치 60건, 구내염 55건, 치통 15건, 구개 종양 1건, 타액선 종양 1건, 하악골 괴사 치료 6건, 구개 저부로부터 분리된 혀 1건, 구강 폐쇄 3건, 협부 농양 3건, 치아 농양 5건을 진료하였고, 15건의 발치를 시행하였다.

에비슨의 1901년 보고서에 의하면 274개의 치아를 학생 조수가 발치하였고, 어려운 예는 자신이 직접 발치하였다. 이들은 전문 치과의사가 아니었으므로 치아 우식증이나 치주질환이 말기에 이르렀을 때 발치를 하거나, 질병이 더 진행된 상태에서 외과적으로 수술하는 정도에 그쳤다.

입치영업자의 등장

개항과 함께 일본인들이 대거 몰려들면서 치과술도 소개되었다. 일본인 노다 등에 의해 소개되었으며, 1902년 고로리가 충무로에서 입치사로 개업을 했고, 1904년 미나미치는 목포에서 개업하였다.

이들 일본인으로부터 기공 기술을 배운 입치영업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1907년 최승용은 종로에서 처음으로 치과를 개설한 이후, 안중수(1907), 김한표(1908), 김경집(1908), 신정휴(1908) 등이 개설하였다. 하지만 당시 한국인들은 치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1910년경까지 한국인 정규 치과의사는 한 명도 없었다.

초기 치과의원의 명칭

1900년대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 치과의원은 흥미로운 명칭이 많았다. '치과'보다는 '이해 박는 집', '잇방', '치방', '치술원' 등의 명칭이 사용되었다.

선교 치과의사의 내한

1906년 감리회의 선교 치과의사로 한국에 왔던 한(Hahn)은 15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한국에 치과의사가 한 명도 없는 점에 놀라 청년들에게 개인 지도를 하는 한편 치과의학교의 설립 계획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곧 선교사 직을 사임하고 남대문 근처의 집에서 치과 진료소를 열었는데 일부 학생에게 교육을 시켰지만 정규 치과의학교로는 발전하지 못하였다.

이외에도 1910년대 초 박교상이 사동 민제병원에서 치의사라는 명칭으로 치과 치료와 입치를 시술하다가 독립하여 치과의원을 개설하고 치과의 모집을 하였으나 특별한 성과는 얻지 못하였다.

이 무렵에는 공사립 치과 진료 기관의 조수 또는 보조원들이 5년 이상 틈틈이 기술을 연마하면 입치영업면허와 치과의사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해 주었다.

치과의사 면허 1번 함석태

일제는 1913년 11월 15일 치과의사 규칙을 발표하고 1914년부터 법령을 실시했는데, 1914년 2월 5일 함석태(1889~?)에게 치과의사 면허 1번을 부여하였다.

함석태는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났으며, 1912년 일본치과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치과의사 면허를 받은 후 6월 함석태는 삼각동 옛 제창국 자리(현 조흥은행 본점 동쪽)에 한성치과의원을 개원하였다.

함석태에 이어 1917년 한동찬이 평양에, 1919년 김창규가 광화문에, 1921년 이희창이 무교동에 각각 개업했으며, 1922년에는 임택룡이 세브란스병원 치과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치과학교실의 탄생

▲ 세브란스연합의학교의 쉐플리(1915). ⓒ동은의학박물관
1915년 내한한 미국 북장로회의 쉐플리는 세브란스연합의학교에 한국 최초의 치과학교실을 설치하고 진료와 함께 4학년 학생들에게 치과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17년 당시 치과학교실에는 의사 2명이 조수로 근무했으며, 4학년에 주당 1시간 배정된 <치과학> 강의는 일반 의사를 위한 치과 병리, 주요 치과 질병, 발치 등을 가르치고 시범을 보여 주는 내용이었으며, 관심이 있는 일부 학생들에게 특별 과정을 개설하여 가르쳐주었다.

한편, 대한의원이 설립된 후 1909년 11월 진료 과목에 치과가 설치되었지만 담당 의사는 임명되지 않았다. 조선총독부의원에서는 1911년 외과의 한 분야로 치과가 포함되었다가 1916년 독립되어 초대 과장서리로 나기라가 임명되었다.

너무나 비쌌던 치과 치료비

1930년대 세브란스 치과의 발치료는 일본돈 50전, 총의치는 80원, 사랑니 발치료는 10원 정도였다. 당시 물가는 대학 출신자 월봉 초급이 10~15원이었고, 냉면 한 그릇에 15전, 3~5원이면 하루 저녁을 아주 잘 먹었으니 엄청난 치료비였다.

치과의학교의 설립

1921년 에비슨은 치과의전문학교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는 치전을 세브란스의학전 문학교, 연희전문학교와 통합하여 종합대학을 설립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조선 총독부를 이를 '일본인의 체면에 관한 일'로 규정하여 묵살하고, 총독부의원의 치과 과장인 니기라로 하여금 치과의사 강습소 설립 청원서를 내게 한 후 이를 허가하였다.

니기라가 1921년 12월 26일 제출한 경성치과의학교의 설립 인가 신청서는 1922년 4월 1일부로 인가되었고, 4월 15일 이미 모집된 60명의 신입생으로 개교식을 겸한 입학식을 거행하였다. 이중에서 한국인 20명과 일본인 8명 모두 28명이 1925년 4월 첫 졸업생으로서 배출되었다. 이후 8회까지 한국인 102명, 일본인 73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 경성치의학교 실습실(1920년대)과 경치전 정문(1940년대). ⓒ동은의학박물관

한성치과의사회

▲ 경성의학전문학교의 치과 외래 실습(1924). ⓒ동은의학박물관
1921년 10월 일본인 치과의사들은 조선치과의사회를 만들었는데, 일부 한국인 치과의사가 참여했을 뿐 한국인 치과의사들은 여러 면에서 일본인 치과의사들로부터 소외당하고 차별을 받았다.

1925년 경성치과의학교에서 첫 졸업생이 배출되자 함석태는 안종서, 김용진 등 한국인 치과의사 7명을 규합하여 한국 최초의 치과의사 모임인 한성치과의사회를 조직하였고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유일한 치과의학전문학교

경성치과의학교는 1931년 3월 일본 문부성 지정 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이후 해방되던 해까지 치과의학전문학교에서는 한국인 452명, 일본인 1007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는 일제 시기 치과의사를 배출하던 유일한 교육 기관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등에 설치된 치과에서 진료를 담당하였다.

▲ 미국 치과의사회의 후원으로 1931년 10월 낙성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치과학교실 ⓒ동은의학박물관

11개의 치과대학

▲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졸업생의 명함. ⓒ동은의학박물관
해방이 되자 국대안으로 국립서울대학교가 만들어지면서 치과대학이 만들어졌다. 당시에는 4년제였지만, 1959년부터 6년제로서 치의예과가 설치되었다. 이후 한 동안 한국에는 1개의 치과대학만이 있었지만, 1960년대 말에 2개 치과대학이 만들어졌고, 1970년대에 6개, 1980년에 1개, 그리고 1994년에 1개가 신설되어 현재 한국에는 11개의 치과대학이 있다(괄호 속은 치의예과 신설 연도).

서울대학교(처음에는 4년제였다가 1959년 치의예과 신설), 경희대학교(1967), 연세대학교(1968), 경북대학교(1974), 조선대학교(1974), 부산대학교(1979), 원광대학교(1979), 전남대학교(1979), 전북대학교(1979), 단국대학교(1980), 강릉원주대학교(1994).

11개의 치과대학은 41개의 의과대학에 비해서는 수가 적지만, 수요에 비해 치과의사가 너무 많이 배출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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