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란 사람들의 건강을 유지, 증진시키고 회복을 돕는 일을 말한다. 간호의 대상은 병들거나 다친 사람, 수술 전후의 환자, 산모, 신생아, 노인뿐 아니라 지적 장애인, 정신 장애인 등 그 대상이 넓다. 최근 들어서는 예방, 복지 차원의 활동으로 그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원래 우리말에는 '간호(看護)'란 말이 없었다. 서양 의학이 도입된 이후,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 간호사들은 한문을 이용하여 용어를 새롭게 만들었다. 즉, '책임이 있는 혹은 돌보는(to take charge of or watch over)'의 의미를 갖는 간(看), '돕는 혹은 보호하는(to aid or protect and guard)'의 의미를 갖는 호(護)를 조합하여 '간호(看護)'라고 부른 것이다.
여기에 '사람'의 의미를 갖는 원(員)을 조합하여 간호원(看護員)이라 불렀고, 일제시기에는 간호부(看護婦)라 불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1987년 간호사(看護師)로 명칭이 바뀌었다.
나이팅게일과 근대 간호
▲ 한국 최초의 <간호학 교과서>(1908). ⓒ동은의학박물관 |
근대적 의미의 간호는 크림전쟁(1854~6)이 일어났을 때 간호단을 조직하고 간호요원을 훈련시키는 등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활동했던 나이팅게일로부터 시작된다. 그녀의 활동으로 환자 개개인의 위생이 개선되었음은 물론 사망률이 크게 감소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녀는 1860년 런던의 성토머스병원에 처음으로 정규 간호 교육 과정을 만들었으며, 간호가 하나의 전문 직업으로 정착되는 계기를 이루었다.
듀낭의 제안으로 1864년 16개국 대표 협의회에서 결성된 적십자는 간호 개념의 전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93년 미국 하퍼병원에서는 나이팅게일 서약문이 만들어졌다.
의녀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조선 시대에 있었던 의녀(醫女)가 간호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유교 사상이 지배하던 조선에서 사회적으로 낮은 계급의 여성이 의녀가 되었다. 세종부터 세조에 이르는 조선 초에 의녀들은 천자문, 효경 등을 읽어 문자를 해독할 수 있게 된 후, 의서를 배워 부인들의 질환을 담당하는 등 의료의 한 부분을 맡았다. 하지만 성종 말기 이들이 기녀와 함께 연회에 나오게 된 이후부터 '약방 기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 정도로 조선 후기에는 본래의 역할이 퇴색되었다.
조선 정부는 제중원 개원 직후 총명하고 영오(穎悟)한 기녀 5명을 제중원에 배속시켰는데, 알렌은 이들을 여자 의학생이라 부르며 정숙한 생활과 의술 학습을 시켜 여성 환자들을 남자 의사가 치료할 때의 번거로움을 돕는 간호사로 만들려고 계획하였다. 하지만 결국 이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제중원과 간호
제중원에서의 진료는 한국인 주사의 통역을 통해 이루어졌고 수술시 마취를 하거나 지시에 따라 약을 준비할 수 있는 잘 훈련된 한국인 조수가 있었다. 하지만 전문적인 간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왕비를 진찰할 때에도 환관이 칸막이를 통해 천으로 감싼 왕비의 팔을 내미는 것을 도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1886년 6월 무더위와 긴 장마 속에서 약 3개월 동안 전국에서 콜레라가 만연할 때 선교사들이 보여 준 기독교적인 사랑은 바로 간호의 한 단면을 보여 준 것이었다.
선교 간호사의 내한
한국의 첫 간호사는 1891년 10월 내한한 영국 성공회의 히드코트였다. 그녀는 1892년 의사 와일스의 도움으로 서울 정동에 조그마한 병원과 부인들을 위한 진료소에서 5년 정도 활동하다가 귀국했다.
한편, 1894년 9월 말 제중원의 운영을 이관 받은 미국 북장로회는 에비슨의 요청으로 1895년 4월 첫 간호사 제이콥슨을 파견했다. 1895년 7월 말 콜레라 환자를 위해 피병원이 설치되었는데, 이때 한국인 조수들은 어떻게 집을 정화시키고 소독하며, 응급 조치를 해야 하는지를 배워 간호보조원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조수 중 한 명은 불안해하는 고종 곁에서 그를 지키기도 했다.
간호 교육의 시작
1860년 나이팅게일에 의해 첫 정규 간호 교육 과정이 시작된 이후 1870년대 초에 미국에서도 첫 간호학교가 설립되었다. 1885년에는 미국 간호사에 의해 일본에 처음으로 간호학교가 설립되었다.
한국의 정규 간호 교육은 1903년 12월 미국 북감리회의 에드먼즈에 의해 보구녀관 감리교 간호원양성학교에서 처음 시작되었으나, 1912년 보구녀관이 정동에서 동대문으로 이전 한 후 간호 교육이 중단되었다.
보구녀관 감리교 간호원양성학교의 첫 가관식 광경 1906년 1월 30일 역사적인 광경을 보기위해 약 300명의 한국인과 외국인이 운집했다. 교회의 젊은 한국인, 세브란스병원의 의학생들, 프라이 양, 하 여사(S. K. Hah)가 안내를 맡았다. 의식은 스크랜튼과 최 목사가 맡았고, 에비슨, 커틀러 및 의장이 축사를 했다. 모자 수여식은 감리회 여병원을 대표한 에드먼즈와 세브란스병원을 대표한 쉴즈에 의해 진행되었다. 두 명의 후보자는 상급생에 의해 인도되었고, 수간호사들에 둘러싸여 제단에서 무릎을 꿇은 그녀들의 머리에는 수련의 상징인 모자가 쓰여 졌다. |
보구녀관 감리교 간호원양성학교의 간호 교육
학생들은 2달 동안의 예비 기간을 거쳤다. 학생들이 가장 먼저 배운 것은 '지시(order)는 하늘의 첫 번째 법칙이다'는 것이었다. 학생들이 배운 강의는 성경, 영어, 병원 윤리, 부인과 간호, 안‧이비인후과 치료, 의학 간호, 위생학, 해부학, 생리학, 검사물의 검사, 임상 실습, 식이 및 마사지 등이었다.
그리고 실습을 통해 붕대법, 침상 만들기, 다양한 종류의 목욕법, 작은 쟁반에 제공되는 약물의 투약, 달걀, 고깃국, 묽은 죽, 곡물 녹말 및 유제 같은 간단한 식이 준비, 체온, 맥박, 호흡 검사, 증상 기록, 특수 약물 투약, 관주법, 찜질, 외과 환자의 붕대 감기, 탈구 교정, 로션, 병원의 모든 붕대, 침대 리넨, 가운 및 스타킹 만들기, 마사지의 주 원리, 시신의 사후 처치 등을 배웠다.
1908년에는 한국 최초의 <간호학 교과서>가 감리교 인쇄소에서 출판되었다.
간호 교육을 시작한지 5년 만인 1908년 11월 5일 처음으로 김마르다와 이은혜 2명이 졸업하였다. 같은 해 6월 3일에는 세브란스의학교에서 7명의 첫 의사를 배출하기도 했다. 이로써 1908년은 한국 의학사에서 크게 기념할 만한 해가 되었다.
▲ 에드먼즈와 보구녀관 간호 학생. ⓒ동은의학박물관 |
쉴즈와 에드먼즈 평소 쉴즈와 에드먼즈는 교파와 관계없이 절친한 관계였다. 그녀들은 서로 협동하여 한 곳에서 간호사 교육을 하는 것이 더 능률적이며, 한국을 위해서도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둘은 강의, 수술실 및 임상 실습에서 협동하여 교육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교파가 달랐으므로 재정이나 학생 관리는 소속 교파의 간호학교에서 하기로 하였고, 에드먼즈가 먼저 간호사 교육을 시작하였다. |
간호 교육의 확대
세브란스에서는 1906년 9월 쉴즈(E. L. Shields)에 의해 <세브란스병원 간호부양성소>가 개설되어 1907년 1월 2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교육이 시작되었고, 1910년 첫 졸업생 김배세를 배출하였다.
▲ 쉴즈와 세브란스 간호부양성소 건물. ⓒ동은의학박물관 |
▲ 세브란스 산파간호부양성소 졸업증서. ⓒ연세대학교 간호대학 |
이와 같이 한국의 간호는 기독교 전래와 더불어 선교사들에 의해 도입, 정착되었다. 하지만 일제시기에 들어서는 각지의 관립 병원과 큰 병원들을 중심으로 간호 교육이 시작되어 한국 간호 교육의 한 축을 이루었다.
▲ 조선총독부의원 진찰실의 간호사. ⓒ동은의학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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