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원장의 격에 딱 맞는 사무총장 내정자"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총장으로 김옥신 변호사가 내정됐다는 소식을 접한 인권 활동가들의 첫 마디다. 상법 전문가로서 기업의 고문 변호사로 주로 일했던 김 변호사의 이력을 보면, '인권 문외한'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현병철 인권위원장 취임 당시가 떠오른다는 것. 베일에 싸인 인선 과정, 국가보안법에 대한 찬성 입장도 현 위원장과 닮은꼴이다.
"'법률가 중심주의', 인권을 현행 법 테두리에 가둘 위험"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든다. 왜 위원장, 사무총장 등 인권위 주요 직책에 자꾸 '인권 문외한'이 들어서는 걸까. 인권 활동가들은 '법률가 중심주의'를 문제로 꼽았다. 인권 사안을 법리 해석 문제로 접근하려는 발상이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 법은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 장치일 뿐, 법의 한계가 곧 인권의 한계일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86개 인권, 사회단체로 구성된 '국가인권위 제자리 찾기 공동행동'(공동행동)은 14일 서울 무교동 인권위 건물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런 입장을 내놓았다.
공동행동은 이날 "차기 사무총장 후보가 '법률가'라는 점을 깊이 우려한다"고 밝혔다. 이어 공동행동은 "인권은 법률가의 전유물이 아니다"라며 "국가인권위의 이러한 '법률가 중심주의'는 자칫 인권을 법의 테두리에 가두고 인권의 사각지대를 향한 인권의 상상력을 무디게 할 위험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공동행동은 "더구나 우리는 사회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인권에 대한 호소가 이명박 정권의 소위 '법치' 강조 하에서 억압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며 "법의 잣대로 인권을 판단하려는 시도는 중단돼야 한다"고 밝혔다.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인권 문제로 대표적인 게 국가보안법 문제다. 인권 활동가들이 국가보안법에 대한 입장을 인권위 주요 직책에 대한 자격 요건으로 삼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현행 국가보안법에 대해 인권위는 지난 2004년 폐지를 권고했다. 하지만 현 위원장은 지난달 11일자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선 안 된다는 것이 내 소신"이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한술 더 뜬다. 인천지법 부장판사 시절, 그는 국가보안법 사건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렸다. 5년 뒤, 이 판결은 대법원에서 뒤집어져 무죄가 됐다. 인권위원장과 사무총장 내정자가 모두 과거 인권위 권고안과 다른 입장을 갖고 있는 셈이다.
"강자 편에만 섰던 이들이 인권위 점령해서야"
물론, 인권위 주요 직책에 '법률가'가 임명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인권위는 설립 초기부터 위원장, 사무총장 등 주요 직책에 '변호사' 또는 '법학 교수'를 임명해 왔다. 다만 '인권 관련 경력이 있는 법률가'라는 과거 자격 요건이, 현 정부 들어 '법률가'로 바뀌었을 뿐이다.
만약 뛰어난 '법률가'라면, 그는 인권위 주요 직책에 걸맞은 사람일까. 인권위 인사를 결정하는 이들은 당연히 그렇다고 답할 게다. 하지만 이날 인권위 앞에 모인 인권 활동가들은 "그렇지 않다"고 못박았다.
그리고 공동행동은 "민법 전문 위원장에 상법 전문 사무총장이라니, 이들의 이력 자체가 인권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라고 밝혔다. '민법 전문 위원장'은 인권 관련 경력이 없는 민법 전공자인 현병철 위원장을 가리킨 표현이다.
이어 공동행동은 "인권의 근본가치는 사회경제적 약자를 무시하고 억압하는 잔인한 정치경제적 관행에 대해 따져 묻는데 있다"며 "인권문외한의 도를 지나쳐 사회경제적 강자의 편에 서있던 이들이 국가인권위를 점령하여 인권의 잠재성까지 갉아먹으려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무총장 내정자인 김 변호사가 주로 기업 경영진 편에서 법률 자문을 해왔다는 점을 가리킨 내용이다.
김옥신 변호사 사무총장 제청 유보…오는 18일 결정
인권위가 이날 열린 전원위원회에서 김 변호사를 사무총장으로 제청하리라는 게 기정 사실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날 오후 인권위 관계자는 김 변호사에 대한 제청이 유보됐다고 밝혔다. 김 변호사에 대한 제청 여부는 오늘 18일 정해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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