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이후 구미의 여러 나라와 교섭을 하는 가운데 다양한 서양 문물이 한국에 소개되었다. 그중에는 외래 종교인 기독교(개신교)가 있었다.
기독교의 각 교파는 한국에 선교사를 파견했는데, 1884년 9월 미국 북장로회, 1885년 4월 미국 북감리회에 이어 1890년대까지 호주 장로회(1889), 영국 성공회(1890), 미국 남장로회(1892), 미국 남감리회(1896), 캐나다 장로회(1898) 등이 선교를 시작하였다. 이들 교파의 대부분은 선교를 위한 수단으로 의료와 교육을 앞세웠다. 특히 의료는 한국인들과 용이하게 접촉할 있는 수단이었을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외래 종교에 대한 반감도 희석시킬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의료 선교의 시기적 구분
처음에 서울에만 국한되었던 의료 선교는 여러 교파가 참여하면서 점차 지방으로 확대돼 한국 의료의 큰 축을 이루었다. 선교 본부의 지원으로 현대화된 병원이 주요 거점에 건립됨으로서 의료 선교가 크게 확장되었다. 하지만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와의 갈등을 겪다가 결국 1940년을 전후하여 모든 외국인이 선교사들이 추방됨으로써 한국인에게 이양되었다.
역사학자 이만열은 1884년 9월 알렌의 입국부터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의 의료 선교를 의료 사업의 목표, 국가 권력과의 관계 변화, 의료 주체의 변화, 그리고 의료 사업의 성과 등을 기준으로 6기로 나누어 살펴보고 있다.
의료 선교의 개척기
▲ 미국 북감리회의 시병원(서울). ⓒ동은의학박물관 |
이 시기의 병원 사업은 당시 한국 정부가 금하였던 교육 및 전도 사업을 비공식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방패막이 역할을 하였다. 특히 선교사인 의사들을 통해 의료 혜택을 본 사람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호감을 갖게 하였고 나아가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제거하는 역할을 하였다.
기반 조성기
1890년 전도 활동의 자유와 함께 시작된 기반 조성기는 1890년부터 1903년까지이며 미국 북장로회, 미국 남감리회, 호주 장로회, 캐나다 장로회, 영국 성공회 등 5개 교단이 의료 선교에 참여하였다. 이 시기에 선교 의료 기관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병원 전도가 개시되었다. 이 과정에서 설립된 지방 병원들은 복음 전도의 중요한 거점이었을 뿐 아니라 서양 문화를 소개하고 엄격한 내외 폐습을 타파하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당시 지방의 진료소들은 교파에 상관없이 규모나 시설이 빈약하여 초가집 한 채인 진료소에 한 명의 의사가 근무하는 소위 "1인 의사 병원(one man-hospital)"을 중심으로 순회 진료가 함께 실시되는 형태를 취하였다. 대개 1명의 의사가 운영했기 때문에 늘어나는 환자를 감당하기 힘들었으며, 급한 대로 한국인 조수들을 고용하여 도움을 받았다. 이들은 한국어에 서투른 선교사를 도왔을 뿐만 아니라 실제 수술 등의 업무도 수행함으로써 진료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결과 대구처럼 의료 선교사가 병원을 돌보지 못하는 경우에 한국인 조수가 혼자 의료 사업을 감당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미국 북장로회는 서울의 제중원뿐 아니라 부산, 평양, 대구, 선천 등 지방으로 의료 사업을 확장하였다. 미국 남장로회는 군산, 전주, 목포 등지에 선교 병원을 설립하였다. 미국 북감리회도 서울 뿐 아니라 평양과 원산에서 의료 사업을 시작하였다. 미국 남감리회는 개성, 원산에서, 호주 장로회는 경남 일대, 캐나다 장로회는 원산, 성진, 함흥 등 함경도 지역을 중심으로 의료 선교를 하였다.
기반 완성기
▲ 미국 북장로회의 대구 제중원(동산병원). ⓒ동은의학박물관 |
미국 북장로회는 재령, 청주, 강계, 안동 등 4곳에 의료 사업을 개시하여 한국 전역 9개 지역에서 의료 사업을 전개하였다. 아울러 부산, 서울, 대구, 선천, 평양, 재령, 강계 및 청주 등 8곳에 현대식 병원을 신축하였다. 미국 남장로회는 1903년까지는 의료 사업이 상당히 불안정했으나, 1904년 8월에 세 명의 의사가 군산, 전주, 목포에 부임해 옴으로써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미국 북감리회는 의료 사업 없이도 전도 활동이 가능하게 되자 재정난과 의사의 부족 등의 어려움이 있는 의료 사업에 큰 중점을 두지 않게 되었으며, 서울, 평양, 공주, 원주, 해주 등 5개 지역에서 의료 사업을 전개하였다. 미국 남감리회는 선교 초기부터 전도 사업에 중점을 두고 활동했으며, 개성, 원산, 춘천에서 의료 사업을 개척하였다. 호주 장로회는 진주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캐나다장로회는 1910년까지 원산, 성진 및 함흥의 세 선교지부를 중심으로 의료 선교를 벌여 나갔다.
▲ 미국 남감리회의 구세의원(해주). ⓒ동은의학박물관 |
억압 속의 발전기
억압 속의 발전기는 1910년부터 1924년까지이며, 일제의 식민 통치가 시작되어 기독교 의료 사업이 큰 탄압을 받은 시기였다. 조선 총독부는 1913년 <의사규칙>을 반포하여 이전에 졸업과 동시에 면허를 부여받던 세브란스 출신들이 의사 시험을 보아야 했고 의료 선교사도 일본의 의사 자격 시험을 통과해야 병원의 책임자로 일할 수 있게 바꾸는 등 직접, 간접으로 탄압을 가하였다.
또한 기독교 병원보다 의료진도 많고 설비도 좋은 도립병원을 각지에 설립하였다. 도립병원의 설립은 선교 병원이 가지는 상대적 의의를 상실하도록 압박을 가하는 것이었으며, 지역에 따라서는 선교병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도립병원을 세우고 진료비에도 큰 혜택을 주는 등 새로운 경쟁 국면을 조성하였다.
▲ 미국 남장로회의 안력산병원(순천)과 진료권. ⓒ동은의학박물관 |
이 때문에 의료 사업을 중단하는 것까지 심각하게 고려하는 한편 기독교 의료 사업의 참된 목적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선교 병원의 사명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복음 선교사의 주장은 의료 사업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었고, 의료 선교사들은 의료 선교를 지속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에비슨은 '의료 사업을 별도로 재정 지원하여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른 기관들과 연합하여 운영할 수 있게 하자'고 제안하였다. 결국 의료 사업을 계속 해야 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리하여 1913년 세브란스병원의학교가 세브란스연합의학교로 개칭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여러 교파의 연합화가 구체화되었고, 또한 1917년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어 의료의 전문화를 추진할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졌다. 동시에 각지에서 입원실을 갖춘 현대적인 병원이 계속 신축되었다.
1910년대 건립된 선교 병원 1910년(1개) : 강계 케네디병원(미 북장로회) 1912년(4개): 동대문 릴리안 해리스기념병원(미 북감리회), 청주 덩컨병원(미 북장로회), 광주 그래함병원(미 남장로회), 전주 맥코원기념병원(미 남장로회) 1913년(3개) : 진주 배돈병원(호주 장로회), 함흥 제혜병원(캐나다장로회), 해주 구세병원(미 북감리회), 원주 서미감병원(미 북감리회) 1913년(1개) : 세브란스 새 진료소(연합) 1914년(1개) : 안동 성소병원(미 북장로회) 1916년(3개) : 목포 프렌취병원(미 남장로회), 순천 알렉산더병원(미 남장로회), 원산 구세병원(미 남감리회) 1917년(1개) : 성진 제동병원(캐나다 장로회) 1918년(1개) : 용정 제창병원(캐나다 장로회) |
억압 속의 성숙기
억압 속의 성숙기는 1924년부터 1940년까지이며, 의료 선교에 대한 일제의 직접적인 탄압과 도립병원과의 경쟁 관계로 조성된 난관은 더 심각해졌다. 선교 병원은 20~30개의 수준을 유지했지만, 도립병원은 1920년 27개에서 1940년 56개로 크게 확장되었다. 또한 환자들 역시 더욱 질 높은 의료 서비스를 찾으면서 외래 환자가 점점 줄기 시작했고, 선교본부에서의 재정 지원도 감소하였다. 이에 따라 세브란스에서의 무료 환자 진료도 1920년대의 45~50%에서 1940년대 초반에는 10% 정도로 급격히 감소하였다.
이런 상황은 의료 사업의 주체를 선교회와 선교사에서 한국 교회와 한국인 의료진으로 전환하는 것을 촉진시켰다. 세브란스를 중심으로 배출된 많은 한국인 의료진들의 역할이 점차 증대되었다. 미국 남장로회의 경우 의료 선교사는 5명 내외로 변함이 없었지만 한국인 의사는 1910년대 말 4명에서 1940년대 초 10명으로 증가했고 평양 연합기독병원의 경우 1930년대 후반 14명의 의사 중 12명이 한국인이었다.
이와 같이 1920~30년대에 선교 병원은 선교회의 재정 지원 축소에 따라 새로운 시설 확장도 많지 않고 진료 인원도 감소했음에도 이들 한국인 의사들이 새로운 주체로 성장했기 때문에 기독교 의료사에서는 이 시기를 성숙기라고 부르고 있다.
의료 선교사의 추방
▲ 미국 북장로회의 선천 미동병원. ⓒ동은의학박물관 |
이후 각지의 선교 병원은 한국인과 한국인으로 구성된 이사회에 운영권을 이양했는데, 일제는 이들 병원을 계속 탄압했다. 특히 선교부가 소유권을 갖고 있는 병원은 '적산'이라 하여 몰수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주요 선교 병원 세브란스병원, 이화여자대학교 병원, 광주기독병원,대구 동산병원, 안동 성소병원, 전주예수병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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