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론이 달궈지고 있다. 김형오 국회의장이 제헌절 기념사에서 개헌 추진 의사를 표명해 물꼬를 열었고, 이명박 대통령도 개헌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8.15 경축사에서 '선거 주기 조정'을 강조함으로써 이를 뒷받침했다. 국회 헌법연구자문위원회도 지난달 31일 개헌안 최종 보고서를 국회에 제출하고 정치권의 후속 논의를 압박했다. 모두 87년 이후 22년 동안 변화한 시대상을 반영해 우리 헌법에 새 옷을 입히자는 취지다. 헌법자문위는 권력구조 문제는 이원정부제와 4년중임제 등 복수안을 냈다. 두 제도가 갖는 차이는 상당하지만 모두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줄여보자는 취지가 핵심이다. 헌법자문위는 정략적 이해관계에 좌우되지 않으려면 2010년 지방선거 전까지 개헌절차를 마무리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하지만 개헌을 통해 다른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꼼수가 벌써부터 꿈틀댄다. 차기 주자가 신통치 않은 집권세력의 주류는 내각제에 다름 아닌 이원정부제를 선호한다. 대통령의 권력을 최소화해 혹시 모를 '훗날의 우환'을 방지하고 권력 연장의 꿈을 이어가고자 함이다. 반면 박근혜 등 확실한 대선후보가 있는 쪽은 개헌을 한다면 4년 중임제라는 방침에서 요지부동이다. 의회와 내각을 통솔하고 조율해야 하는 골치 아픈 '총리'보다 독보적 권한이 보장되는 대통령이 속 편하기 때문이다. 이도 저도 아닌 민주당은 아예 개헌 논의를 내년 지방선거 뒤로 미루자며 한 발 뺐다. 이렇게 서로의 본심이 드러나 충돌하는 마당에 내년 지방선거 전까지 개헌논의 완료는 언감생심이다. 과연 우리 정치권은 △국민의 기본권 보장 △자유민주주의의 신장 △법치국가의 기틀 확립을 전제로 미래지향적 개헌을 달성할 수 있을까? 헌법자문위 위원장인 김종인 전 의원과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 교수가 개헌을 토론했다. 김 전 의원은 87년 개헌 작업 당시에도 개헌특위 경제분과위원장을 맡아 소위 '김종인 조항'이라고 불리는 경제민주화 조항(119조 2항)을 만들어냈다. 그는 언제나 헌법 개정과 함께 제도를 운용하는 '지도자의 자질'을 강조한다. 최태욱 교수는 의미 있는 개헌의 전제로 선거제도와 정당개혁의 병행 추진을 강조하는 학자다. <프레시안>은 두 사람의 대담을 통해 공론화 단계로 접어들고 있는 개헌론의 표면과 이면을 들여다봤다. 다음은 지난 4일 김종인 전 의원 사무실에서 진행된 대담 전문이다. <편집자> |
▲ 김종인 전 의원(우)과 최태욱 교수(좌) ⓒ프레시안 |
"우리 실정에 4년중임제는 맞지 않아"
최태욱 : 국회 헌법연구자문위원회가 개헌안을 발표했는데, 자문위는 어떤 취지에서 구성된 모임인지 먼저 설명해 주십시오.
김종인 : 지난 17대 국회 마지막 단계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원 포인트 개헌을 이야기했습니다. 시간적으로 어려운 제안이었고, 정치적으로도 문제를 일으키니까 여야가 합의해서 18대에 개헌논의를 하기로 약속을 했지요. 정치인들이 약속을 한 것이니까 18대에 논의를 할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과거의 개헌논의는 대부분 권력자가 정권을 연장하기 위해 한 것이었습니다. 시민의 힘에 밀려서 한 개헌은 4.19 직후와 87년 6.29 이후 한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던 차에 김형오 국회의장이 국회가 스스로 개헌 논의를 해보자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그러려면 대통령 임기 초기에 해야지 시간이 가면 어려워지니까 준비작업을 하자는 취지에서 연구자문위를 구성한 것입니다. 87년에 개헌특위 때 열심히 한 경험이 있는 나에게 위원장을 맡아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교수님들 모시고 1년 가까이 연구작업을 하다가 지난달 30일 최종 보고서를 만들어서 전달한 겁니다.
최태욱 : 우리 헌법에 무언가 문제가 있으니 개혁을 하자는 것 아니겠습니까?
김종인 :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점을 해소해야 한국 대통령의 불행을 막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국민들이 존경하는 전직 대통령이 없습니다. 전부 이상한 일에 걸려서 존경은 고사하고 모두 불행해졌지요. 불행한 대통령을 만들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김형오 의장은 개헌을 해야 한다고 보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왕 개헌을 하려면 국민의 기본권과 민주주의의 심화, 법치국가로서의 확고한 기반 확립이 돼 있느냐 하는 헌법의 기본가치를 전제로 헌법의 전 조문을 다 검토했습니다. 권력구조 문제는 그 중의 일부에요. 권력구조 문제는 간단한 거지요. 다른 부분이 오히려 더 중요해요. 그런데 정치인들은 권력구조에만 관심이 있고, 권력구조를 건드리지 않으면 개헌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분권형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원정부제는 지구상의 어느 나라에도 없어요. 실질적으로는 내각제지요. 대통령을 직선으로 뽑는 것 때문에 편의상 이원제라고 하는 것 같아요.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핀란드, 바이마르공화국 같은 데를 이원정부제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프레시안 |
이후 사회당 미테랑이 81년 당선됐는데, 대통령 임기는 7년이고 의원 임기는 5년이어서 임기 중에 한 총선에서 사회당이 소수가 됐어요. 그래서 보수당의 시라크와 동거정부를 한 겁니다. 당시 미테랑이 기자회견 할 때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거냐는 질문에 "내가 정치 관련 입법을 안 하고 민생 관련 입법만 하면 총리와 무슨 마찰이 있겠느냐"라는 식으로 말을 했거든요. 시라크와 미테랑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겁니다. 시라크도 당내 위치를 굳히려고 미테랑과 동거정부를 구성한 거지요. 미테랑은 두 번째 대통령 임기 중에 또 동거정부 했습니다. 그때도 서로 이해관계에 의해서 했지요. 그 후 시라크 대통령 때 사회당과 동거 정부를 한 적도 있습니다. 이원제에서는 외교와 국방은 대통령이 담당하고 내치는 수상이 담당한다고 하는데, 사실 내치 외치를 구분하기 어려워요. EU나 G7 회의에 대통령과 수상이 함께 가는 넌센스가 발생하지 않습니까.
최태욱 : 프랑스 권력구조는 형식으로는 분명히 분권형 대통령제입니다. 대통령은 직선으로 뽑아 외교와 안보를 맡고, 수상은 의회에서 선출해서 내치를 맡도록 돼 있으니까요. 다만 대통령의 정당 즉 여당이 의회의 다수당일 경우 대통령이 자신의 수상 임명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으므로 사실상 대통령제와 동일해지는 겁니다. 더구나 요즘은 대선과 총선의 시기가 거의 일치하니까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늘 대통령과 수상이 같은 당에서 나오기 마련이죠. 설령 동거정부가 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겪는 여소야대의 정국 대치 상황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제도화된 대연정 상황이니까요. 하지만 자문위의 최종안을 보면 대통령은 직선으로 뽑기는 하는데 상징적 국가원수로서의 권한만 부여돼 있으니까 프랑스의 분권형 권력구조와는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김종인 : 대통령에게 그런 (외치의) 권한을 주면 정부가 갈등구조가 돼서 안 됩니다. 그런 문제를 사전에 제거해주기 위해서 대통령에게 권한을 안 준 것입니다.
최태욱 : 어디서는 이원정부제라고 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독일식 내각제 아닙니까?
김종인 : 이원제라는 말을 쓰지 말자고 했는데…. 내각제라고 하자니 그에 대한 부정적 인상들이 많아요. 그래서 어정쩡하게 이원정부제라고 한 겁니다. 우리 국민들에게 대통령은 내손을 뽑고 싶다는 열망이 강합니다. 그런데 실질적인 권한이 없으면 아무도 대통령을 하려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수상이 권한을 다 가지고 대통령은 덕담이나 할 수 있는 정도인데….
최태욱 : 사실은 독일식 내각제에 가까운데 국민 정서를 고려해 용어를 선택한 것 같습니다. 독일과의 차이라면 독일은 연방의회에서 대통령을 뽑는데, 우리는 직선으로 뽑는다는 차이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행정부는 사실상 수상 주도의 책임내각제로 가는 거구요.
김종인 : 그렇습니다.
최태욱 : (자문위가 2안으로 낸) 4년 중임제는 미국식 대통령제와 거의 동일한 것으로 보입니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권력분산형 권력구조로 가야 한다면 독일식 내각제는 취지에 맞는 것 같은데 4년 중임제는 약간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김종인 : 4년 중임제 방안에서도 대통령이 행정 수반으로 국가를 통치하기는 하지만, 의회와 사법부를 지금처럼 다룰 수 있는 권한을 다 없앴습니다.
최태욱 : 제도로는 그럴 수 있지만, 지금의 현실을 보면 사실상 대통령이 여당의 최고 지도자입니다. 여당이 국회까지 장악할 경우 대통령이 다 하는 것 아닙니까?
김종인 : 국회 기능을 강하게 만들어놓으면 지금 같은 행태는 있을 수 없을 겁니다.
최태욱 : 미국식 순수대통령제로 가면 권력분산이 될 것인가에 회의적입니다. 국회 기능을 강화하면 된다고 하시지만 그 국회를 구성하는 정당들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우리 정당체제의 현실로 봐서는 삼권분립도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김종인 : 삼권분립이 되는 방법은 인사와 임기 보장입니다. 그런 식으로 사법권을 보장해주고 법률 제안권을 입법부에만 뒀습니다. 4년 중임제는 좋은 대통령 나와서 잘하면 다시 뽑아서 오랫동안 정책 연속성 가질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대통령 나오면 지금보다 1년 먼저 임기를 중단하는 장점도 있지요 그러나 현직 대통령은 잘하거나 잘못하거나 재선에 애를 쓸 텐데, 그러면 모든 관료들이 선거에만 매달리게 됩니다. 이 경우 정부 운영의 비효율로 인한 비용이 너무나 크게 듭니다. 그래서 우리 실정에서는 4년 중임제가 맞지 않다고 봐요.
최태욱 : 동의합니다. 그런 식으로 문제만 일으키면서 결국 4년 중임제는 사실상 8년 단임제나 마찬가지가 될 겁니다. 제왕적 대통령제는 원래 미국의 대통령제를 두고 나온 말입니다. 삼권분립의 대통령 견제 효과는 그만큼 한계가 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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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인 : 국정수행 능력은 대통령의 자질에 있다고 봅니다.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능란하게 움직이면 반드시 여당이 다수일 필요는 없어요. 반대로 여당이 과반수를 넘는다고 대통령이 국정수행을 잘한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지방선거 끝나면 개헌은 물 건너 가"
최태욱 : 3당합당, 의원 빼오기, DJP연합, 대연정 시도 등은 대통령의 능력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능력이 있다고 해도 국회에서 협력을 하지 않는 구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김종인 : 그래도 미국은 잘 끌고 가지 않습니까.
최태욱 : 미국은 큰 틀에서의 이념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양당제인데다 각 당의 당기도 그리 세지 않아 소속 의원들의 재량권이 상당합니다. 따라서 야당의원들과 대통령과의 협조도 비교적 용이하죠. 그러나 우리는 보스나 지역 이익을 중심으로 뭉쳐있는 정당 체제여서 개별 의원들의 자유가 매우 제한적입니다. 결국 대통령제와 다정당체제에서 발생하는 여소야대의 문제는 좀처럼 해결되기 어렵다는 겁니다.
김종인 : 가장 중요한 건, 헌법개정보다 제대로 된 대통령이 나와서 모범을 보이고 임기를 마치면 다음 대통령은 그것을 따라갈 것이라는 점입니다. 나는 요즘 누구를 만나면 지금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쳐도 다음은 제대로 된 사람을 찾아서 뽑자고 말합니다. 대통령이 자기 멋대로 해버리면 도리 없어요. 다만 최악을 피하기 위해 헌법상 대통령이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은 줄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정치인들은 내각제를 선호하지 않습니다. 대권 출마하려는 사람들은 대통령제를 하려고 하지요. 그건 스스로 정치역량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에요. 내각제에서의 총리는 국회의원과 내각을 컨트롤해야 하는데 그런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대통령은 5년동안 관료들을 데리고 자기 멋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개헌을 한다면 4년 중임제만 생각하고 다른 건 생각을 안 하는 겁니다.
최태욱 : 소위 이원정부제는 권력분산형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독립적인 제도로서는 지금의 대통령제보다 훌륭한 것이라고 봅니다. 다만 현 정당체제와 연관돼서 걱정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지금 이 지역 중심, 인물 중심의 다정당 체제에서 수상 주도의 책임내각제로 가면 정부 형태는 통상 연립내각이 될 겁니다. 한 정당이 단독과반을 차지하기는 앞으로도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컨대 충청당과 영남당의 연합 아니면 호남당과 충청당의 연합이 이루어지는 식으로 지역과 인물정당들이 과반을 만들어서 연립정부를 구성할 텐데 그러면 정부가 국민과 공익을 위한 큰 정치를 하거나 사회경제적 약자를 배려한다는 등의 가치지향적인 정책을 펴가길 기대하기는 더 어려울 것으로 봅니다. 지역정당 보스끼리 개인 이익이나 지역 이익을 중심에 놓고 타협하는 과두체제로 갈 가능성이 커질 테니까요.
김종인 : 우리나라에도 언젠가는 탁월한 리더가 나와서 그런 문제 해소할 것이라고 전제할 수밖에 없어요. 솔직히 지금의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을 전제로 얘기한다면, 누가 총리를 한들 그런 능력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사실 그러고 보면 한심해요.
최태욱 : 자문위가 권력구조와 함께 선거제도 및 정당구도 개혁을 한 패키지로 하는 안을 낼 수는 없습니까? 그 모든 것이 함께 돼야 멋진 개혁이 될 텐데요.
김종인 : 양원제를 도입하도록 했습니다. 상원은 광역으로 도별로 뽑도록 해서 여야가 섞어 들어오도록 했고, 하원은 지역구로 들어옵니다. 양원을 두면 국회의원이 늘어나야 하는데 국민들이 질타할 거 같으니 299명 내에서 상하 양원 만들자고 하는 것입니다. 헌법도 현실을 참조해야 합니다. 현재의 국회의원들은 지역구가 없어진다고 하면 개헌을 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인구에 비해 의원 300명은 많은 게 아닙니다. 그 안에서 양원제를 하면 비례대표가 싹 없어질 수도 있어요. 그러면 소수정당의 생존이 불가능하고 양당제로 가게 됩니다. 그게 어찌 보면 비민주적이지요. 우리는 비례대표를 돈 주고 팔아먹고 하니까 비례대표제의 존속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지만, 민노당 같은 당은 비례대표 없으면 안 됩니다. 독일은 선거에서 5%만 얻으면 25석 가지고 들어갑니다. 건국 이래 단독정부가 없었어요. 그것도 장점이 많습니다. 일방적으로 자기 이데올로기만 추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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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욱 : 마침 이명박 대통령이 선거제도 개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환상에 가까운 상상을 해본다면, 이참에 권력구조는 자문위가 제안한 분권형제로, 그리고 선거제도는 독일식 비례대표제 등으로 가는 정치개혁 패키지를 디자인해볼 수는 없을까요? 그러면 자연스레 정당구도도 권력구조와 제도적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식으로 개혁될 텐데요.
김종인 : 자문위가 정당개혁까지 검토하는 기구는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서 무엇이 최적인지는 정치인들이 나중에 결정할 문제입니다.
최태욱 : 권력구조와 함께 그에 걸맞는 선거제도 개혁까지 조언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김종인 : 아직 자문위를 해체하지 않았습니다. 국회 특위가 구성되면 정치인들에게 내용을 이해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의원들은 권력구조만 뚝딱하고 말아버릴 수 있어요. 그때 정당개혁과 선거제도 문제에 대한 조언도 해야 할 겁니다.
최태욱 : 정치개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제도간의 정합성을 맞추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개헌과정에서 독일식 내각제를 참조하겠다면, 선거제도 개혁 과정에서도 역시 독일식 비례대표제를 고려해야 할 겁니다. 권력구조, 선거제도, 정당구도 등의 여러 정치제도가 한 패키지로 발전해온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김종인 : 이명박 대통령이 선거주기 문제를 얘기하는데, 말은 쉽지만 선거 주기를 맞추려면 대통령이 큰 양보를 해야 합니다. 2012년 4월에 국회의원 선거, 12월에 대통령 선거가 있으니 9개월의 갭이 있습니다. 선거 주기를 맞추기 위해 대통령이 자기 임기를 9개월 줄이겠습니까? 그렇다고 의원들 임기를 늘려줄 수도 없고…. 프랑스는 선거주기를 5년씩 맞추려고 대통령이 7년 임기에서 2년 줄인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기 맞출 수 없으니까. 우리에겐 국가와 장래를 위해 임기 1년을 줄일 대통령이 있겠나 싶습니다.
최태욱 : 자문위 안을 보면 개헌을 2010년까지 완료하자는 것인데, 발효 시기는 언제가 되는 겁니까?
김종인 : 내년 지방선거가 끝나면 대권주자들 뛰쳐나옵니다. 금방 국회의원 선거도 옵니다. 그러다보면 개헌은 물 건너가요. 그래서 개헌논의 완료 시기를 내년 봄까지로 보고 있습니다. 발효 시기는 국회에서 정하는 거지요. 그런데 개헌은 국민투표로 갑니다. 과반수 투표인데 요즘 투표율을 보면 과반을 얻는다는 보장도 없어요. 여야가 합의해서 가야 국민투표를 통과할 수 있지 미디어법처럼 강제로 하면 국민들이 투표를 안 할 겁니다.
최태욱 : 2010년까지 안을 만들고 지방선거 때 개헌 국민투표를 같이 붙이자면 시간이 빡빡할텐데요.
김종인 : 87년 헌법 개정은 두 달 만에 했습니다.
최태욱 : 그렇게 서두를 경우 제대로 된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한미 FTA 때처럼 개헌의 좋은 점만 가지고 선전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만약 이원정부제의 장점만 과대 선전하여 그 방향으로 개헌이 되면 아까 말씀드린 대로 지역할거주의가 창궐케 되는 등 오히려 개악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한 현 대통령제에서라면 정권교체도 비교적 쉽게 이뤄질 수 있지만 지금의 정당체제에서 책임내각제로 바로 가면 보수 지역정당들 간의 과두체제 형성으로 그들만의 장기집권 가능성도 높아질 것 같습니다.
김종인 : 장기집권으로 가봐야 기껏 일본이 50년 했습니다. 이제는 그 속도도 빨라졌어요. 국민들의 의식구조 변화 속도가 빠릅니다. 우리 정당들은 그에 대한 인식이 잘 안 돼 있어요. 나는 한번 정권 잡으면 10년쯤 갈 것이라고 봤는데 이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최태욱 : 내각제 하에서 만약 영남권과 충청권 등을 장악하고 있는 보수 세력들이 연립정부를 구성하면 그게 마냥 갈 수도 있지 않을까요?
김종인 : 대한민국 선거는 이제 수도권이 결정합니다. 수도권 의원들이 대한민국 의사를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한나라당에서도 수도권 의원이 영남 의원보다 수가 많아요.
최태욱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역주의는 우리 정당정치의 고질적 문제로 남아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지역주의 타파를 위한 선거제도 개혁이 개헌을 통한 권력구조 개편보다 먼저 가야하지 않나 싶은데요.
김종인 : 그것도 하고 이것도 해야 하겠죠. 이 대통령이 지역화합 때문에 중대선구제를 말하는데 그건 안 됩니다.
최태욱 : 저 역시 중대선거구제는 폐해가 더 많다고 봅니다. 제도개혁을 하려거든 그 효과가 분명한 것으로 해야죠. 그래서 선거제도, 정당구도, 권력구조가 서로 조화됨으로써 최대의 개혁효과를 창출할 수 있는 방법과 개혁 작업의 선후를 고민해야 한다고 봅니다.
김종인 : 국회가 주도해서 고치려고 할 겁니다. 제도가 먼저냐 정당이 먼저냐 하는데, 이런 제도를 하면 정당 구조도 바뀝니다. 서유럽 민주주의도 100년에 걸쳐 완성됐어요. 우리는 경제에서 한 압축성장을 정치에서도 하려다보니 문제가 더러 생기기도 합니다. 다른 나라 국회도 파행하고 다 그랬어요. 영국에선 죽이기까지 했는데요 뭘…. 다 오랜 시일을 거쳐서 정착된 것인데, 국회에서 문짝 하나 깼다고 법으로 다스리려는 유치한 사고로는 안 됩니다.
최태욱 : 게임의 룰이 바뀌면 정당이나 정치인들 스스로 정책을 개발 하고 이념이나 가치를 분명히 하기 위해 노력하는 등의 효과는 기대할 수 있을 겁니다.
김종인 : 수도권을 보면 노무현을 당선시킨 사람들이 노무현을 차버리고 이명박으로 가지 않았습니까. 일상생활에, 피부에 와닿지 않으면 표를 안 준다는 겁니다. 유권자가 수용할 수 있는 상품을 내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겁니다.
최태욱 : 다른 얘기입니다만, 권력구조 개편안을 이원정부제와 4년 중임제 두 가지로 내놓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김종인 : 자문위원이 최종 결정을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개헌특위를 구성하는 데에도 문제가 생겨요. 어느 일방이 수용을 안 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두 가지를 제시하고 개헌특위가 알아서 결정하라는 취지에요.
최태욱 : 다수제 민주주의의 전형인 미국식과 합의제 민주주의의 표본인 독일식을 내놓고 선택을 하라는 것인데, 선택지 간의 차이가 너무 크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차라리 제일 좋은 제도는 이것이라고 하는 게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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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인 : 논의할 수 있는 여지를 주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자문위 회의를 해보니까 분권형 쪽에 의견이 많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냉정하게, 국가 장래를 위한 개헌 돼야"
최태욱 : 앞으로 정치개혁을 둘러싸고 우리 정치가 무엇을 해야 할지 전망해 주십시오.
김종인 : 개헌 논의도 결국 차기 정권과 연결이 돼서 갈 겁니다. 민주당은 개헌논의 자체를 거부하고 있어요. 사석에서 얘기하면 민주당도 개헌하자는 사람이 많은데, 지금은 여권이 국면돌파용으로 개헌하려는 게 아니냐고 합니다. 하지만 그건 야당의 기우에요. 이건 국면돌파 사항이 못 되죠. 머리 맞대고 토의하면 개헌이 되기가 어려운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대선 주자들의 경우에는 박근혜 쪽에서 나오는 얘기로는 4년 중임제 외에는 못 받겠다는 것 아닙니까. 다른 쪽에서는 내각제 개헌을 해야겠다고 나오는 것이고. 민주당도 마찬가지에요. 의원 개별적으로는 분권형을 선호하는데 차기 주자로 나갈 사람들은 그걸 좋아하지 않아요. 대통령은 되기만 하면 편안하니까 그런 쪽으로 선택하는 겁니다. 왜 4년 중임제가 좋으냐고 하면 정책 연속성이 좋다고 하는데, 정책 연속성은 분권형이 더 강해요.
최태욱 : 민주당은 선거제도 논의도 뒤로 미루자는 태도 같습니다.
김종인 : 속사정 때문에 그럴 겁니다. 당 체제 정비가 안 되고 리더십이 확고하지 않아서 이런 논의에 끼면 내부 결속력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럴 겁니다.
최태욱 : 그렇다고 해도 문제가 워낙 중차대하니 만큼 야당도 대안을 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데요. 오히려 기회로 활용할 측면도 있을 테고요.
김종인 : 이론상으로는 그렇지만 야당이 언제 대안 내놓는 것 봤습니까?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나 자기 당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한나라당은 특별한 이데올로기로 구성된 게 아니라 여러 요소가 가미된 정당이에요. 거기서 전체를 끌고 갈 수 있는 정체성을 파악할만한 무언가가 없지요. 이명박 정부의 경우 처음에는 5년 내내 부자정권으로 가겠다는 게 정체성인가 싶더니 최근에는 중도로 가서 서민의 애정을 갖겠다고 합니다. 정체성이 왔다 갔다 하니까 포커스를 어디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어요.
최태욱 : 이 대통령이 정당에서 성장한 정당정치인이 아닌데다 소속 정당 자체도 정체성이 부족하니 정부 정책이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김종인 : 정당에서 정체성으로서 국민 유권자들에게 표를 얻고자 한다면 4대강이니 뭐니 하는 걸로 엄청난 돈을 투입 할 수는 없는 거지요.
최태욱 : 개헌 논의에서 또 한가지 우려스러운 건 경제민주화 조항 등 현행 헌법의 장점까지 훼손되지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119조 2항에 대해선 그동안 재벌들이 눈엣가시처럼 여겨오지 않았습니까.
김종인 : 전경련이나 신자유주의 정치학자들이 그걸 얘기합니다. 하지만 그 조항이 헌법에 있어서 경제활동 하는데 무슨 장애가 되느냐고 했더니 말을 못합니다. 경제 질서를 정한 항목인데, 경제질서는 처한 상황에 따라 다 다릅니다. 유럽 대륙의 자본주의도 라인강 동서의 자본주의가 달라요. 국가의 경제 질서는 고정된 게 아니라 특색에 맞게 움직인다는 얘기에요. 인구 밀도와 자원까지 다 고려해야 합니다. 이번 개헌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잘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힘이 제일 센 것은 대통령보다 돈입니다. 돈의 힘이 무엇이든 행사할 수 있으면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고 시장경제 잘 될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87년에도 정주영, 김우중 회장을 위시해 수도 없는 논쟁을 했습니다. 내가 물으면 대답을 못합니다. 그러더니 전두환 대통령에게 개헌안을 보고했더니 누가 비선으로 이 조항에 대해 귀뜸했는지 '이봐 그거 넣어도 되는거냐'고 내게 묻더군요. 그래서 '1936년에 루즈벨트가 뉴딜을 하며 사회보장을 체계화하는 법안을 만들었는데 미국 제약업자들이 사회보장을 위헌소송 했다. 그래서 사회보장이 없어졌다. 그게 지금 미국이 의료보험을 못하게 된 원인이다' 그런 식으로 설명해서 납득시켰습니다.
우리나라 재벌은 60년대에 생성돼서 70년대에 확장, 80년대에 안정기를 거쳐 90년대에는 우위 시대로 전개됐습니다. 처음에는 정치권력이 셌지만, 점점 경제 권력의 힘이 더 세졌어요. 우리 정치, 문화 모든 영역에 재벌의 입김이 작용합니다. 그런 형편인데 그 사람들을 통제할 수 없게 법을 만들면 국가 운영을 할 수가 없어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원인을 규명해서 그 원인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체로 하는 모양만 갖춥니다. 부동산 투기가 그래요. 세금만 가지고는 부동산 투기를 절대로 잡을 수 없어요. 왜 원천을 잡을 대책을 세우지 않냐고 하면 이 핑계 저 핑계만 댑니다. 노무현도 종부세로 바보짓 한 것이죠. 그때도 그런 방식으로 안 된다고 했는데, 밀어붙이다가 봉변을 당했습니다. 정책을 다루는 사람들이 정직했으면 좋겠어요. 순간적으로 사람 눈 속여서 하는 척만 하니까 아무것도 안 됩니다.
헌법학자들은 사실 그런 것들을 잘 몰라요. 재계에서 로비를 하면 쉽게 헌법조항을 없애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개헌은 법학자에게만 맡길 영역이 아닌 것 같아요. 한나라당도 표 얻어 사는 사람들인데 재벌만 편들어서 계속 집권할 수 있겠습니까.
최태욱 : 개헌이 실제로 이뤄질 가능성은 있는 겁니까?
김종인 : 정상적인 판단으로 냉정하게 국가 장래를 위해서 한다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략적으로 유불리를 따지면 되기가 힘들다고 봐요. 대통령이 국가장래를 위해 이번 국회에서 개헌해야한다고 하고, 여야를 불러서 합의해서 하자고 하는 게 가장 효율적입니다. 그런데 대통령은 그런 것에 대해 직접 관여 안하려고 합니다. 국회만 하다 보니 힘이 받쳐지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최태욱 : 오랜 시간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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