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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100년 전에도 '활명수'가?"…그 탄생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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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100년 전에도 '활명수'가?"…그 탄생의 비밀

[의학사 산책] 약, 서양의학을 만나다

"한국인은 중국인과 마찬가지로 약을 먹는데 익숙하다. 한약방은 매우 많다. 한의학 처방들은 모두 활용되고 있다. 인삼은 치료약 중 왕이다."

1884년 한국을 방문한 서양 의사 우즈(George W Woods)의 관찰이다. 약방에서는 한의학에서 이야기되는 모든 처방들이 조제되었고, 한국인들은 즐겨 그 약을 먹었다. 인삼은 만병통치약과 같았다. 이방인의 눈에 볼 때 한국은 약의 나라였다.

약의 나라, 한국

조선 후기 한국의 의학은 급성장하고 있었다. 특히 민간 의료의 성장은 눈부셨다. 위급한 병이 났을 때 필요한 각종 구급방이 편찬되고 있었다. 허준은 여성들을 위해 <언해구급방>을 편찬하였다. <언해구급방>은 침구나 단방약(單方藥)을 처방하여 경제성을 높였다.

약의 구입과 보관을 위해 약계를 만드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양반층이 중심이 되기는 했지만, 지방에서 약이 널리 유통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소비 대상도 평민층으로 넓어져 갔다. 약계는 일정한 장소를 가지면서, 약방으로 성장해갔다. 한국은 약의 나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한국에 소개된 퀴닌-금계랍

개항은 한국 사회를 근대로 끌어갔고, 약도 예외는 아니었다. 약은 그동안 접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상대를 만났다. 서양 의학이었다. 서양 의학을 배운 의사들이 소수였기에 한국인들은 서양 의학을 '약'을 통해 먼저 만났다. 가장 인상적인 약은 말라리아를 치료하는 '퀴닌', 즉 금계랍(金鷄蠟)이었다. 말라리아뿐 아니었다. 퀴닌은 진통제나 해열제로도 쓰였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에서 가장 인기 높은 약도 퀴닌이었다. 처음에 약값을 받던 제중원은 시료 기관의 성격을 살리기 위해 약값을 받지 않았다. 빈민 환자의 경우 아주 적은 약값마저 지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퀴닌은 예외였다. 퀴닌의 경우 10알에 500푼을 받고 팔았다. 처음 제중원이 모든 조제약에 대해 매긴 100푼의 5배였다. 알렌의 회고에 따르면 "사람들은 퀴닌의 가치를 알기 시작했으며, 이것을 사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부터 신청이 많이 들어왔다." 제중원을 찾은 외래환자 중 말라리아에 걸린 사람들이 가장 많았던 이유도 치료제인 퀴닌의 소문 때문이었을 것이다.

퀴닌은 1883년 독일의 마이어상사가 제물포에 설립한 세창양행도 수입했는데, 1896년 (11월 7일) <독립신문>에 실린 광고는 한국에서 약품 광고의 효시를 이루었다.

▲ 금계랍과 <독립신문>에 실린 광고. ⓒ동은의학박물관

일본인 매약상을 통한 소개된 양약

▲ 인단 광고지. ⓒ한독의약박물관
양약은 개항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일본인에 의해서도 한국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치약, 비누 등을 가지고 한국인에게 접근했던 일본인 매약상들은 취급 품목을 약으로 넓혔다. 그들은 한국인들이 아직 약품을 대량으로 조제할 만한 시설을 가지지 못한 것을 이용하여 서양 약품과 자국에서 제조한 약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약품은 '인단'이었다. 이외 용각산(龍角散), 건위고장환(健胃固腸丸), 오타위산(太田胃散), 중장탕(中將湯), 건뇌환(健腦丸), 대학목약(大學目藥), '로오도목약' 등이 줄이어 한국에 상륙했다. 1890년대에 이르면 이미 전국 각지에 가지 않는 곳이 없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일본인 매약상들은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한국인들은 약을 통해 서양 의학을 맛보기 시작했다.

활명수의 등장

▲ 활명수. ⓒ동은의학박물관
서양 의학은 서서히 영역을 넓히면서 자연스럽게 전통의 한약에 영향을 주었다. 서양 의학을 수용한 새로운 약이 발명되었다. 1897년부터 지금까지 소화제로 통용되고 있는 '활명수'가 대표적인 예이다.

동화약품의 창업자인 민병호는 한약 지식에 능통했다. 그는 20대 초반에 무과에 합격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직위인 만큼 선교 의사이자 어의였던 알렌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가 근무하던 제중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관심은 서양 의학에까지 미쳤고, 동서 의학을 절충한 새로운 약의 개발에 나섰다. 몇 가지 한약재를 추출하고 여기에 알코올, 클로로포름 등 서양 의학 지식을 첨가했다. 소화 신약 '활명수'의 탄생이었다.

약과 관련된 제도의 성립

서양 의학은 약 자체뿐 아니라 제도로서도 한국에게 다가왔다. 서양에서 성립된 의료제도가 한국에 수용되기 시작했다. 약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었다. 1900년 1월 약종상 규칙이 반포되었다. 약종상은 '약품을 판매하는 자'라는 정의가 내려졌고, 지방 관청의 허가를 받은 후에야 판매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대한제국은 약제사를 모아 시험을 치르게 하였다. 시험에 합격한 자에게는 준허장(準許狀)이 수여되었다. 정부가 본격적으로 약을 관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통의 한의학은 외국에서 밀려오는 약뿐 아니라 새로운 제도에도 적응해야 했다.

서양 의학이 강한 힘을 가지고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한약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한국인들이 가진 한의학에 대한 신뢰가 높았기 때문이다. 설령 수용을 한다고 해도 방법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배울 곳이 마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한약은 자신의 전통 지식에 서양 의학을 가미하는 식으로 변화해 갔다. 가장 주목되는 변화는 약 자체보다 유통이었다.

대형 약방의 출현

특정 약품들을 판매하는 대형 약방들이 생겨났고, 그들은 점차 전국적인 유통망을 만들어 나갔다. 소화제로 유명한 청심보명단의 제생당약방(1899년 창립), 부인병 치료제인 태양조경환으로 유명한 화평당약방(1904년 창립) 등이 그들이었다.

'조고약'의 천일약방도 있었다. 약간 나이 든 어른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종기약인 조고약은 원래 조 씨 집안에서 내려오는 비약(秘藥)이었다. 천일약방(1913년 창립)을 세운 조근창은 그 약을 상품화하였다. 대량 생산, 대량 판매가 이어졌다. 그들은 현대 한국 제약회사의 원조들이었다.

대형 약방들이 생겨나면서 경쟁도 치열해졌다. 누가 먼저냐는 원조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고, 정부의 허가를 받기 위한 노력도 이어졌다. 판매를 위한 광고 경쟁은 뜨거웠다. 신문과 잡지에서 약 광고가 차지하는 비율은 절대적이었다. 공정함을 가장하고 간접적으로 광고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화평당에서 제조한 태양조경환을 여러 해 동안 아이를 갖지 못한 부인이 복용하고 수태하여 지금은 5달이 지났으니 그 신효함이 놀랍다."

광고가 아닌 신문 기사 내용이다. 지금이라면 실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 조고약(천일약방)과 쾌통환(낙천당제약주식회사). ⓒ동은의학박물관

제약업의 태동

식민지 시기에 접어들면서 한국인이 만든 양약이 시장에 나오기 시작했다. 유일한의 유한양행(1926년 창립), 전용순의 금강제약(1929년 설립)은 그 흐름을 주도했다.

유한양행은 1930년대 중반 설파제인 프론토질을 실시간으로 수입하여 'GU사이드'라는 이름으로 판매함으로써 도약을 하게 된다. 프론토질은 페니실린이 발명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항생제의 대표와 같은 역할을 하던 약이었다.

금강제약은 1929년 마약 성분을 함유한 '네오페지날'이라는 이름의 약품을 판매하여 기반을 확보하였다. 1938년에는 한국 최초의 합성약인 '젠바르산'을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젠바르산은 성분은 매독 치료제로 잘 알려진 살바르산이었다. 1910년 독일에서 발명된 살바르산은 19세기 말 이래 발전하고 있었던 세균학의 미래를 밝히는 횃불과 같았다. 한 세대 가까이를 지나 한국이 그 살바르산을 합성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 유한양행(1930년대 초). ⓒ동은의학박물관

유한양행, 금강제약 등 양약을 제조하는 제약회사들이 성장하면서 단(丹), 산(散), 제(劑), 탕(湯), 환(丸)자 돌림의 한약의 전성시대는 저물어가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글자만으로는 뜻을 짐작하기 어려운 서양 약품명에 익숙해져가야 했다. 일종의 세계화였다. 세계화는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비쌌다. 1930년대 중반 살바르산 가격은 20원에 가까웠다. 당시 새로운 직업인 여점원의 월급이 25원이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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