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 깊은 인상을 남긴 외과술
1885년 4월 개원한 제중원에서의 진료는 어떤 특징이 있었을까? 제중원에서 이루어진 진료의 특징은 한마디로 외과술이다. 당시 조선의 외과술 도입은 '서양 기술의 수용'에 해당하는 것이었고, 제중원의 개원에 즈음한 외아문의 고시도 외과술이 특별히 뛰어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첫 1년 동안 제중원에 입원한 265명 중 절반 정도인 130여 명이 외과 수술을 위해 입원한 환자였으며, 이중에는 괴사병 환자의 대퇴골 절제 수술, 척추골 수술, 백내장 수술처럼 당시로서는 규모가 크고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예도 있었다.
때로 특별한 처치를 하지 않거나 경과를 관찰하기 위해 입원하는 내과 계열의 환자에 비해 외과 계열의 환자는 치료 효과가 '경이적'인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제중원은 개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외과 환자가 입원실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1년 동안 진료를 받은 1만여 명의 외래환자 가운데 400여 명은 입원을 하지 않고 외과 처치실에서 간단한 수술을 포함한 외과적인 처치를 받았다.
외과술에 얽힌 에피소드 당시 한국인들이 외과술에 어느 정도 관심을 나타냈는가를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알렌이 몇 명의 백내장 환자에 대한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난 직후의 일이다. 어느 날 한 쪽 눈밖에 없는 할머니가 제중원을 찾아와서는 알렌에게 한 눈을 다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할머니를 진찰한 알렌은 한 눈을 다시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이를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한 눈이 다시 볼 수 있어야 한다며 떼를 쓰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알렌을 심하게 꾸짖기 시작했다. 이에 난감해진 알렌은 할 수 없이 포졸에게 할머니를 병원 밖으로 모셔 나가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와 유사하게 어떤 노인은 고장난 시계를 가지고 와서 고쳐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
진료실에서 시작된 만민 평등
제중원은 개원 후 하루에 60~100명에 이르는 외래 환자를 진료했다. 이렇게 몰려드는 환자를 진료하기 위해 알렌은 5월 초에 내한한 미국 감리회의 스크랜튼의 도움을 1개월 정도 받았다. 또 전도 선교사로 내한한 언더우드가 약의 조제를 도왔다. 하지만 알렌의 숨통을 결정적으로 터준 것은 6월 21일 도착한 헤론이었다.
그러면 제중원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진료를 받았을까?
이들 중에는 정부의 고위 관리를 포함한 양반 계층뿐 아니라 걸인이나 나병 환자 등 예전부터 천대받던 계층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1886년 7월 엘러스의 합류로 부녀과가 신설되면서 여성만을 위한 진료도 이루어졌다. 알렌은 때로 상류 사회의 부인들을 치료하기도 했는데, 그리 썩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들이 제중원에 오게 되면 마당의 사람을 모두 내보내고 통행을 금지시키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진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자기 몸을 알렌과 같은 백인 남자 의사에게 내어 보이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완강히 진찰을 거부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성이나 여성 모두와 자유로이 어울릴 수 있는 여러 명의 기녀를 뽑았다. 이 기녀들은 총명하고 유능했지만 이들을 계속 데리고 있는 것이 적절하지 않음을 알고 내보냈다.
이렇게 지위 고하, 신분,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전국의 모든 병든 사람들이 진료를 받았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제중원에서의 진료가 아주 민주적이었다고 평하였다. 제중원은 특권 계층만을 위한 병원이 아니었던 것이다.
▲ 고종이 하사한 나귀를 타고 왕진을 나가는 알렌과 조선인 요리사(1885). ⓒ동은의학박물관 |
제중원 의사들의 활동
알렌을 포함한 의사들은 제중원에서의 진료 이외에도 고종의 어의, 각국 공사관의 공의, 인천 해관의 의사 등으로 왕실과 당시 한국에 거주하던 외국인을 진료했다. 또한 제중원의학교에서 한국 최초의 의학 교육도 실시하였다.
제중원 의사들은 전염병의 구료 사업에도 관여했는데, 1885년 콜레라 유행의 기미가 보일 때 알렌은 여러 방역 조치를 내놓았으며, 1886년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에는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열성적으로 방역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특히 종두와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는데, 제중원의 개원 이후 많은 조선인들에게 우두 접종을 실시했다. 이는 우두법을 전국적으로 확대 보급하려는 조선 정부의 당시 정책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활동은 1886년 초 조선 정부가 알렌의 건의로 서울 곳곳에 '제중원에 와서 우두를 맞으라'는 게시를 했던 것으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게시 결과 많은 조선인들이 우두 접종을 위해 제중원에 내원했고, 이어서 독립된 예방 접종실을 새로 만들게 되었다.
이러한 제중원 의사의 활동에 대해 조선 정부는 알렌과 헤론에게 종2품에 해당하는 가선대부를, 엘러스에게 정경부인의 직을 내렸고, 선교사들 외에 제중원에 근무하던 조선 관리들도 승급 등의 포상을 받았다.
▲ 알렌이 작성한 한국 최고(最古)의 서양 의학 진단서(1885년 9월 13일, 제물포). ⓒ동은의학박물관 |
제중원 일차년도 보고서
▲ 1885년 9월 30일에 끝나는 제중원 보고서(알렌, 1885). ⓒ동은의학박물관 |
아쉽게도 이를 알려주는 한국의 자료는 거의 없다. 다만 제중원에서 활동했던 알렌과 헤론, 그리고 다른 선교부 의사들이 작성한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을 뿐이다. 그중에서도 알렌과 헤론이 작성한 <제중원 일차년도 보고서>는 제중원에서 행한 1년 동안의 진료 실적과 의학 교육에 관한 사항을 정리하여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 보낸 한국 최초의 체계적인 의학 보고서로서 가치가 크다. 이 보고서를 통해 당시 한국인들이 앓고 있던 질병들의 종류와 특징을 알 수 있다.
알렌은 <제중원 일차년도 보고서>를 작성하기에 앞서 1885년 9월 30일까지의 약 반 년 동안의 진료 내용을 중국의 선교 잡지에 보고한 바 있었으며, <제중원 일차년도 보고서>를 조선 정부가 아닌 미북장로회 선교부에 제출한 것은 제중원의 이중적인 성격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예라 할 수 있다.
19세기말 한국인들에게 흔했던 병
1885~6년 알렌과 헤론이 제중원에서 치료했던 주된 질병을 살펴보면 말라리아가 가장 흔했으며, 그중에서도 사일열이 많았다. 그 다음으로 매독이 많았는데, 그 증상이 매우 다양하였다. 그리고 쌀을 주식으로 하는 다른 나라에서와 같이 소화 불량이 많았다. 나병도 흔했으며, 피부병은 모든 종류를 다 볼 수 있었고 연주창도 매우 흔했다. 이처럼 흔히 알려져 있는 모든 종류의 질환을 다양하게 변형된 상태로 볼 수 있었으며, 각기병, 흑색증 등 흔하지 않은 병도 있었고, 디스토마와 사상충증도 있었다.
이외에도 천연두의 피해가 커서 2살 이전에 앓은 어린이 100명 중에서 20명, 2~4세 사이의 아이 20명이 모두 천연두에 의해 죽을 것으로 예측되었다. 각혈, 간질, 각종 마비, 안검내번증, 각막 혼탁, 농양, 이, 옴 등도 많았다.
알렌과 헤론 보다 약 10년 후인 1890년대 중반 에비슨이 흔히 진료했던 주요 질병은 천연두, 말라리아, 장티푸스, 재귀열, 이질, 매독, 옴 및 피부병, 눈 질환, 기생충 , 디프테리아, 궤양성 후두염, 나병, 결핵, 공수병 등이었다.
▲ 제중원 일차년도 보고서(1886)와 환자 통계표.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 |
공포의 천연두 하루는 치료를 받기 위해 진료소에 온 한 여인에게 과거력을 물어보자 11명의 아이를 낳았다고 하였다. "아직 몇 명이 살아 있습니까?" 내(에비슨)가 물었다. "아무도 살아 있지 않습니다. 모두 유아 때 죽었습니다." "너무 안 되었군요. 왜 죽었습니까?" "천연두 때문입니다." "무엇이라고요! 모두가 그 병 때문에 죽었단 말입니까?" "예, 그것은 사실입니다. 너무 많은 아이가 천연두로 죽기 때문에 한국인은 이 병에서 낫기 전까지는 가족으로 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나를 몸서리치게 했고, 우리 의료 선교사들이 인구를 지속적으로 감소시키는 끔직한 유아 사망률을 저하시키는 조치의 첫 단계로서 이 질병을 어떻게 관리하는지에 관한 진정한 개념을 전파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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