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정장을 입은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미리 준비한 추도사를 읽어 내려갔다. 그의 뒤에는 밝게 웃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커다란 사진과 함께 '행동하는 양심이 되겠습니다'라는 대형 문구가 붙어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결식을 하루 앞둔 22일, 서울광장은 추모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자정을 넘기는 시간에도 추모 행렬은 서울광장을 가득 매워 분향을 하는데 걸리는 시간만도 1시간이 족히 걸렸다. 이날 하루에만 2만3600여 명이 분향소를 찾았다.
특히 이날은 '김대중 전 대통령 시민장례위원회'와 민주당이 서울광장에서 준비한 시민추모문화제에 참석한 인파로 인해 서울광장은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였다. 1만여 명의 시민들이 이날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서울광장에 모였다.
▲ 서울광장에 초로 만들어진 '민주주의 수호'. 지나가던 아이들이 신기한듯 쳐다보고 있다. ⓒ프레시안 |
"민주주의의가 잘려나가고 있는데, 이렇게 떠나면 민초들이 기댈 곳이 없습니다"
추모문화제에 참석한 시민들은 엄마의 손을 잡고 온 꼬마부터 70대의 노인까지 다양했다. 하지만 하나같이 고인을 떠나보내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지니고 있었다. 가족과 함께 왔다는 박명기(38) 씨는 "영결식에 참여하기도 어려울뿐더러, 노제도 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추모문화제라도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에 나왔다"며 "이렇게라도 해야 내 마음 속에서 고인을 떠나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희숙(32) 씨도 "평생을 빨갱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으며 고인은 살았다"며 "마지막 가는 길에는 부디 그런 말을 듣지 않고 편안히 가셨으면 하는 바람이다"라고 말했다.
이날 추모문화제에서 추도사를 준비한 각계인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정세균 민주당 대표는 "오늘밤이 지나면 고인을 영원히 보내야 한다"며 "국민에겐 여렸지만 정권에는 한없이 강했던 당신의 빈자리를 어떻게 채울 수 있겠는가"라고 고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고인을 가리켜 "대한민국 현대사"라고 표현했다. 고난과 고통은 혹독했지만 성취는 가을 들판처럼 풍성했다는 것. 그는 "치장만으로는 그가 실천한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린 잘 안다"며 "통합, 화해를 강조한 고인에게 행동하는 양심이 될 것을 약속한다"고 밝혔다.
▲ 정세균 민주당 댚는 고인의 뜻을 받들어 행동하는 양심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프레시안 |
과거 개그맨 김미화와 '쓰리랑부부' 코너에서 장단을 맞추며 대중적인 인지도를 높였던 국악인 신영희 씨는 창을 통해 고인을 잃은 슬픔을 표현했다. 신영희 씨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열혈 팬이었지만 엄혹한 시대로 인해 내색 한번 내지 못하고 마음속으로만 그를 응원했었다.
"지금 민주주의의 뿌리가 잘려나가고 있는데, 이렇게 떠나면 민초들이 기댈 언덕이 없습니다. 빈자리가 너무 크고 깊습니다. 하늘이 무너진 듯, 땅이 툭 꺼져 내리는 듯, 우리 가슴에 피멍이 듭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는 고인의 말이 귀에 아직 쩡쩡하나 이렇게 떠나면 우리는 어쩝니까."
"이명박 정권은 고인이 평생 가꾸었던 민주주의를 되돌리고 있다"
신영희 씨의 창처럼 우회적으로 현 정권을 비판하는 것이 아닌 직설적으로 비난하는 목소리도 이어졌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는 "이명박 정권은 김 전 대통령이 평생을 가꾸었던 인권과 민주주의를 거꾸로 되돌리고 있다"며 "이념갈등, 노사대결 등으로 평생 고인이 헌신해온 것들이 허물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고인은 이런 역사의 역주행을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잘 안됐다"면서 "하지만 이젠 편히 가라"고 고인의 안식을 기원했다. 박 이사는 "불의가 정의를 이긴 적이 없고 부당한 권력을 국민이 가만히 둔 적이 없다"며 "우리가 고인의 뜻을 온 힘을 다해 지켜낼 것"이라고 밝혔다.
청하 스님도 '봉황새 날아가고'라는 시를 낭독하기에 앞서 "우리 주변에 전직 대통령을 잡아먹는 킬러가 있는 듯하다"며 "불과 석 달 만에 민주주의의 상징인 두 분의 대통령이 서거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하지만 이들이 갔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끝난 것은 아니다"며 "고인의 죽음은 민주주의가 죽은 것이 아니라 위기를 맞고 있다고 우리에게 깨우쳐 주려는 듯하다"고 설명했다.
▲ 이날 시민추모문화제에는 1만 여명의 시민들이 참여해 행사 장소인 서울광장은 발디딜 틈이 없었다. ⓒ프레시안 |
23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운구행렬은 국회를 떠나 동교동 사저, 서울광장을 거쳐 국립서울현충원에 도착할 예정이다. 영결식 사회는 조순용 전 청와대 정무비서관과 연극인 손숙씨가 맡는다.
노제는 일정에서 빠져 있지만 운구행렬이 서울광장에 멈춰 서면 이희호 여사가 직접 전국민 앞에서 6일 동안 보여준 애도에 감사의 마음을 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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