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일제가 패망한 뒤에도, 재일 조선인들의 사정은 나아진 게 없었다. 여전히 그들은 극심한 차별에 시달렸다. 일본 사회의 전통적인 천민집단인 '부락민'과 같은 대우를 받았던 그들의 상처를 다시 헤집어 놓은 것은 조국의 분단이었다.
한반도가 둘로 갈리고, 서로 총을 겨누게 되면서 재일조선인 사회도 둘로 나뉘어 서로 삿대질 했다. 남한을 지지하는 민단과 북한을 지지하는 총련 사이에선 걸핏하면 주먹다짐이 벌어졌다. 하지만 한국에서 들려온 4·19 혁명 소식은 민단 청년들에게 새 바람을 일으켰다. 이승만 독재가 무조건 옳다고 믿었던 이들은 민주주의에 눈을 떴고, 이들은 독재를 지지하는 민단 지도부에 맞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5·16쿠데타가 바로 이어졌고, 박정희 정권의 조종을 받는 민단 지도부는 이들 청년들을 제명했다. 이들이 만든 단체가 재일한국청년동맹(한청)이다.
방황하는 재일 조선인 청년들에게 다시 희망을 준 사람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1971년 대선 패배 뒤, 일본을 방문한 김 전 대통령은 이들에게 "조국 민주화 없이 민단 민주화 없고, 민단 민주화 없이 조국 민주화 없다"고 말했다. 이념에 따라 갈라진 교포 사회를 보며 절망한 이들에게 통일의 당위성과 가능성을 역설한 것도 김 전 대통령이었다.
김 전 대통령의 강연은 답답한 한국 현실을 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던 재일 조선인 청년들에게 길잡이가 됐다. 결국 이들은 1973년 일본 도쿄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을 결성했고, 김 전 대통령을 의장으로 추대했다. 김 전 대통령이 박정희 독재 정권에 맞서는 해외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으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이는 다시 김 전 대통령에게 부메랑이 됐다. 한민통 출범 직전, 중앙정보부는 김 전 대통령을 납치해서 현해탄에 빠뜨리려 했다. 김 전 대통령은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한민통 의장이라는 경력은 그 뒤에도 김 전 대통령을 죽음의 위기로 몰아갔다. 1980년, 신군부는 김 전 대통령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한민통이 박정희 정권 시절 이적단체로 지목됐으므로 의장인 김 전 대통령은 이적단체 수괴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한민통이 이적단체로 지목된 것은 박정희 정권이 간첩 사건을 조작한 결과였다.
김 전 대통령이 사형을 선고받은 뒤, 가장 강력하게 구명운동을 벌인 곳도 한민통이었다. 일본 내 진보 세력이 적극 지지한 김대중 구명운동은 실제로 김 전 대통령의 사면 복권에 큰 힘이 됐다. 당시 김대중 구명운동에 참가했던 한민통 활동가가 김 전 대통령 추모 글을 보내왔다. 한민통은 뒷날 훗날 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으로 개편됐으며, 다음은 이 단체 의장인 손형근 씨의 글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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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와 조국통일의 큰 별이신 김대중 선생의 서거 소식에 접하여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김대중 선생은 해외민주화 운동의 선구자
유신독재에 항거하여 망명을 결의한 김대중 선생은 해외 특히 일본에서 반독재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재일한국청년동맹(한청) 회원이었던 내가 김대중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73년 2월에 열린 한청 동기강습회에서였다.
강습회에서 "해외동포 단결하여 국내동포 구출하자"며 열변을 토하는 김대중 선생의 뜨겁고 힘찬 연설을 청년시절에 들었다는 것이 내 인생의 진로에 큰 영향을 주었고 그후 나는 민족운동에 매진하게 되었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73년 한민통(현 한통련) 출범 직전에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됐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한민통 의장으로 추대될 예정이었다. 김 전 대통령이 해외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것을 두려워 했던 박정희 정권은 김 전 대통령을 토막살인 또는 현해탄에 수장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사진은 납치에서 풀려난 직후 김 전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
이 연수회 성공이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결성의 초석이 되었는데 강연에서 선생은 "우리가 염원하는 남북통일도, 우리가 피눈물로 갈망하는 민단 민주화도, 재일동포의 진실한 권익보호도, 또 '네 조국이 어디냐'고 물으면 우물거리면서 말 못하는 그 열등의식을 청산하고 싶다면, 본국이 먼저 민주화되고 본국이 먼저 통일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우리들은 거기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켜 제1차적으로는 박 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적 정권을 회복하는 이 투쟁에 총단결해야 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이와 같은 재일동포운동에 대한 김대중 선생의 탁월한 지침아래 김대중 선생과 재일동포 민주운동가들은 그 해 8월에 한민통 결성대회를 열기로 합의하였다. 바로 본국과 해외 민주화운동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1973년 8월 8일 일어난 납치사건에도 좌절하지 않고 우리는 한민통을 출범시키고 김대중 선생을 한민통 의장으로 추대하고 그의 구출운동에 전력을 쏟았다. 나는 납치사건의 목적의 하나는 한민통 결성으로 해외민주화운동의 고양을 두려워한 박 독재정권이 김대중 선생을 해외동포운동에서 떼어 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불사조 김대중'을 향한 뜨거운 눈길
1973년 납치사건부터 87년 6월항쟁까지 14년간은 김대중 선생을 중심으로 민주화운동이 전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민통도, 이에 속한 나도 그리고 한국 민주화를 바라는 일본의 많은 벗들도 김대중 선생의 일거수 일투족을 주목하면서 열정적으로 지원하였다.
일본에서는 김대중 선생과의 연대를 통해 민주화운동이 전개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불사조와 같은 김대중 선생의 투쟁은 바로 한국민주화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죽음의 위기에 직면하면서도 용감하게 투쟁하는 김대중 선생의 모습은 우리 민족의 자랑이며 희망이었다.
우리는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후보단일화에 실패함으로서 크나큰 좌절을 경험하였다. 하지만 김대중 선생의 불굴의 정신을 누구보다 잘 아는 우리는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김대중 선생은 언젠가 반드시 집권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예상대로 험난한 가시밭길과 같은 고난을 극복한 김대중 선생은 1998년 마침내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었다. 그것은 해외동포운동의 승리이기도 하였다.
▲ 김대중 구명 운동에 동참한 일본 노동조합 총평의회(왼쪽) 한민통이 제작한 영화 어머니의 한 장면(오른쪽). 전태일 분신을 소재로 한국의 노동 현실을 고발했다. ⓒMBC |
통일의 대문을 연 김대중 선생
김대중 대통령의 업적은 무엇보다도 역사상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열고 6.15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한 것이다. 1971년 대통령선거 출마 때부터 일관하게 김대중 선생은 조국통일을 강조하셨는데 예를 들면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김대중 선생이다. 그분의 뜻을 담아 통일촉진이라는 말을 삽입한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방문과 6.15선언은 민족통일운동사에서 길이 빛날 역사적 사건이었다. 조국통일의 강령인 6.15선언은 통일이 실현되는 그날까지 우리를 이끌어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한통련의 자주 민주 통일 운동을 높이 평가한 김 전 대통령
한민통을 계승하여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이 1989년 결성되었다. 그런데 박정희 독재시대였던 1978년 한민통에 내린 부당한 '반국가단체' 규정이 그대로 방치된 가운데 1980년 군사재판에서 김대중 선생은 한민통 의장이었다는 이유로 사형판결이 나왔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80년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박정희 정권이 이적단체로 조작한 한민통 의장이었다는 게 이유였다. 이른바 이적단체 수괴 혐의다. ⓒ연합뉴스 |
그후 김대중 선생은 국제여론의 힘으로 위기를 벗어나 나중에 대통령이 되셨으나 한통련은 '국민의 정부'아래서도 한국 자유왕래 불허라는 도리에 맞지 않는 경우에 처해 있었다.
마침내 '참여정부'는 한통련 성원들에게 여권을 발급했고 2003년 9월과 다음해 10월 두차례에 걸쳐 '한통련고국방문단'이 조직되어 방한이 실현되었다.
우리는 그때 김대중 선생과 재회했는데 첫 번째는 동교동 자택 응접실에서, 두 번째는 김대중 도서관에서 선생은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나는 제1차 방문 때는 한통련 사무총장으로서 김대중 선생과 면담할 수 있었다.
한통련 방문단에게 김대중 선생은 이런 말씀을 하시며 한통련의 민주화운동을 높이 평가하였다.
"납치사건이나 투옥, 사형판결 등에 즈음하여 여러분이 정말 성심성의 노력해주신 것을 알고 있으며 마음으로부터 감사하고 있다"(제1차 방문)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는 말이 있는데 오늘의 만남이 그것을 증명하는 자리"
"군부독재는 나를 한민통 의장으로 하여 반국가단체의 괴수라며 사형을 선고했지만 이번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이 나와 한통련의 누명도 벗겨졌다"
"한국이 세계에서 손색없는 민주인권 국가가 된 것은 국내외 민주인사들이 힘을 합쳐 싸운 결과"(제2차 방문)
이런 말씀을 들으며, 나는 한통련이 고난 속에서도 꾸준하게 해외에서 운동해 온 보람을 느꼈다.
그때 나는 김대중 선생에게 1973년 한청 동기강습회의 추억을 말씀드렸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선생의 만면에 띤 웃음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생애를 통해 '행동하는 양심'을 실천한 위대한 정치인
김대중 선생은 최근 병상에 계시면서도 민주화의 후퇴와 남북관계 악화를 무척 걱정하셨고 기력을 다하여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행동하는 양심이 되자"고 역설하셨다. 김대중 선생은 자신의 삶을 마감할 때까지 이를 관철하셨다. 국민 모두가 스스로 행동해야만 민주화도 조국통일도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인데 거꾸로 말하면 국민이 양심에 따라 행동하면 반드시 민주화와 통일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김대중 선생과 함께 만든 한민통.
결성 후 오늘까지 36년간 김대중 선생과 뜻을 함께 하면서 우리 한통련도 한치의 물러섬이 없이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행동해 온 것을 김대중 선생의 영전에 나는 자랑스럽게 보고 드리고싶다.
▲ 손형근 한통련 의장. ⓒ프레시안 |
김대중 선생님! 자주 민주 통일 실현을 위해 매진하는 한통련을 지켜 봐주십시오.
김대중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음 속으로부터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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