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 교육을 위해 연합한 선교사들
세브란스병원의학교는 1908년 6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한 이후 법률적 지위를 얻었다. 이전까지는 학교 운영을 위한 별도의 등록 절차가 없었지만 1908년 8월 26일 통감부가 반포한 사립학교령에 의해 모든 사립학교는 통감부의 인가를 받아야 했다. 이는 통감부가 항일 애국 사상의 온상인 사립학교를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세브란스병원의학교도 이에 따라 1909년 7월 세브란스병원의학교로 학부에 등록했다.
제1회 졸업생이 배출된 후 많은 학생들이 입학하자 교수진이 모자라기 시작했다. 또 각 지역별로 소규모로 이루어지던 의학 교육이 비효율적임을 인식하게 된 선교사들은 의료 선교 활동과 의학 교육의 중추 기관으로서 세브란스병원을 연합기관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세브란스병원의학교가 명실 공히 여러 선교부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연합의학교로 출발한 시기는 1913년이었다. 기존의 미국 북장로회 이외에 남장로회, 남감리회, 감리회는 전임 교원을, 호주 장로회는 단기적으로 교원을 파견하였고 캐나다 장로회도 합류하였다.
이를 계기로 세브란스병원의학교는 세브란스연합의학교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서 종래 소수의 북장로회 소속 선교 의사들에 의해 진행되던 의학 교육의 범위가 대폭 확대되었다.
▲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졸업장(윤진국, 1914)과 졸업 앨범 표지(1917). ⓒ동은의학박물관 |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
일제는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1910년, 일본의 선진성을 상징하는 서양 의학 의료기관을 설치하고,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진료를 통해 일본 식민 정책의 시혜성을 부각하고자 하였다.
그 첫 조치로 통감부 시기에 설립된 대한의원을 조선총독부의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동시에 부속 의학교는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로 지위가 격하되었다.
일제는 당시 조선 사람들의 민도가 낮아 전문 교육을 하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또 일제는 조선인 의사가 많이 배출되면 환자들이 일본인 의사에게는 가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물론 재정도 부족했다.
의학강습소의 교수 사항 중 중요한 것은 다음 세 가지였다. '첫째, 일본어에 중점을 둘 것. 둘째, 보통학 교양에 힘을 기울일 것. 셋째, 환자 진료를 견습하게 할 것.'
일본어를 완전히 해독하지 못하면 의학 같이 면밀한 학문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강의는 모두 일본어로 진행하였다. 동시에 대한의원 시절 사용하던 번역 교재는 일체 소각하였다. 일본어를 배운 의학강습소 졸업생들은 자혜의원 등 관립병원에서 조수로 채용돼, 치료와 함께 통역을 겸하는 이중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의학전문학교 제도의 도입
1910년 국권 침탈 이후 일본은 조선교육령, 사립학교규칙, 전문학교규칙 등을 반포하였다. 외형적으로는 교육 제도의 발전이라는 측면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민족 자본이 형성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일제에 의존하지 않는 사립기관이 그 기준을 맞추기가 매우 힘들었기 때문에 사립학교를 통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기존의 시설, 특히 인력 면에서 유리한 입지에 있던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는 1916년 4월 1일 경성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었으며,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소관 부서로 바뀌었다.
경성의학전문학교는 의학강습소의 설비와 인원을 그대로 계승하였고 수업 연한이나 교과목에 차이가 없었다. 다만 기초 의학의 강화를 위해 전문 교원을 초빙하였고, 임상의학 분야는 총독부의원의 의관과 의원 전부를 모두 교수 또는 조교수로 겸임시켰다.
의학강습소가 경성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면서 일어난 변화 중 하나는 일본인 학생들이 입학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입학 정원 중 일본인을 3분의 1, 조선인을 3분의 2로 정하는 내규가 정해졌다. 한국에서 일본인 의사들을 육성하여 부족한 의사 공급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일제의 의도였다.
세브란스연합의학교도 교수진을 강화하는 한편 재단을 구성하고 일본식의 교실을 창설하는 등 학교의 제도와 운영을 일본식 의학 체계에 맞추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17년 5월 조선총독부로부터 사립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로 인가받았다. 이후 1942년 강제로 아사히(旭)의학전문학교로 개칭되었다.
▲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장(주익순, 1933)과 졸업 앨범(1939). ⓒ동은의학박물관 |
조선에 제국대학의 시대가 열리다!
1919년의 3·1운동이 일어난 후 조선인들 사이에 민립대학을 설치하자는 움직임이 있자 일제는 이에 동참하는 인사들을 탄압하고 기금 갹출을 방해하는 등 다각도로 저지하였다. 동시에 조선교육령을 공포하면서 대학 설립을 추진하여 1924년 5월 6년제의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하고 학생을 모집하였고, 1926년 의학부의 첫 교육이 시작되었다. 조선에 제국대학 시대가 열린 것이다.
지방의 의학 교육
평양, 대구 등 주요 지방 도시에서도 선교사와 일본인에 의해 약간의 의사가 배출되었다.
우선 평양의 경우, 1898년 북장로회의 선교 의사 웰스에 의해 의학 교육이 시작되어 10명이 의술개업인허장을 받았다. 하지만 의학 교육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반면 식민지 확장을 위해 의료 사업에 나섰던 동인회가 파견한 나카무라(中村富藏)는 1905년 4월 평양의학교를 시작하였고, 이것이 모체가 되어 평양동인의원부속 의학교가 만들어졌고 8명이 의술개업인허장을 받았다. 경술국치 후 동인의원이 폐쇄되면서 의학 교육은 자혜의원의 의무과에서 이루어지다가 1911년 4월 조선총독부의 의학 교육 통합 방침에 따라 폐쇄되었다.
대구의 경우, 1900년대 제중원(동산기독병원)에서 의학 교육이 이루어졌으나 결실을 맺지 못했다. 또 평양에서와 같이 1907년 2월 대구동인의원부속 의학교가 만들어져 의학 교육이 이루어졌으나 의술개업인허장을 받은 사람은 없었고 학생들은 1910년 9월 대구자혜의원의 의무과로 이관되었다.
▲ 평양의학전문학교 승격 기념엽서(1933)와 졸업장(권재창, 1940). ⓒ동은의학박물관 |
평양, 대구의학전문학교의 탄생
1920년대에 들어 모자라는 의사들을 충원하기 위해 평양과 대구에 사립의학강습회가 설치되었고, 이것이 모체가 되어 의학전문학교가 설립되었다.
우선 평양의 경우, 1923년 1월 의사 시험 준비자를 대상으로 의학 교육을 하기 위해 평양자혜의원 내에 야간의 사립의학강습회가 설치되었다. 이 강습회는 1923년 4월 지방비로 운영되는 2년제 도립평양의학강습소로 승격되었고, 의관과 의원을 강사로 촉탁하여 의학 교육을 진행했다.
그 후 만들어진 평양의전 기성회는 1929년 교명은 유지하되 규정을 개정하여 입학 자격, 수업 연한 및 내부 시설은 일반 의학전문학교에 준하도록 하였다. 이후 기성회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진행된 의학전문학교 승격 운동의 결과, 마침내 1933년 3월 8일 의학강습소가 폐지되고 평양의학전문학교가 탄생하였다. 평양의학전문학교는 1933년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한 이후 1945년 8월까지 13회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 대구의학전문학교 졸업 앨범(1935). @동은의학박물관 |
1933년 3월 의학강습소가 폐지되고 대구의학전문학교가 탄생하였다. 대구의학전문학교는 모두 841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일본인이 564명, 조선인이 274명, 대만인이 3명이었다.
평양과 대구의학전문학교는 전문학교 승격과 함께 총독부로부터 지정을 받아 졸업생들이 무시험으로 의사 면허를 받게 되었다.
의학 교육에 도입된 남녀평등
평소 여성 의료인 양성에 관심이 많았던 로젯타 홀(Rosetta S Hall)의 제안으로 1928년 5월 여의학교 설립을 위한 기성회가 조직되었고, 우선 강습소 형태로 시작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1928년 9월 경성여자의학강습소가 개교하였다.
강습소는 1937년 김종익의 거액 기부에 힘입어 1938년 5월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로 성장하였으며, 1941년 9월 부속병원이 개원했고 1945년 4월 총독부로부터 지정받았다.
▲ 경성여자의학강습소의 졸업식 기념지(왼쪽, 1936),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졸업생 일동(1943). ⓒ동은의학박물관·이준상 |
군의관을 공급하라!
한편, 일제 말기인 1944년 3월에는 전쟁으로 부족한 군의관 양성을 위해 광주와 함흥에 의학전문학교가 설립하였지만 졸업생을 내지 못하고 일제는 쫓겨 나갔다.
이상과 같이 일제하에서는 8개의 의학 교육 기관이 있었다. 이중 6개교가 졸업생을 배출했다. 또 사립이 2개, 관립이 6개였으며, 지역적으로는 서울이 4개, 지방이 4개였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