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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메' 5년이면 '의사 면허' 받을 수 있던 '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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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야메' 5년이면 '의사 면허' 받을 수 있던 '그 시절'"

[의학사 산책] 의사 면허의 변천

의사(醫士)란?

한국의 의사 면허 제도는 1900년 1월 2일자로 반포된 '의사규칙(醫士規則)'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 규칙은 제1조에서 "의사(醫士)는 의술을 관숙(慣熟)하여 천지운기(天地運氣)와 맥후진찰(脈候診察)과 내외경(內外景)과 대소방(大小方)과 약품온량(藥品溫凉)과 침구보사(鍼灸補瀉)를 통달하여 대증투제(對證投劑)하는 자"로 규정함으로써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의사에 대한 법률적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한의사에 대한 정의이다.

한편, 1899년 7월의 의학교 규칙에는 졸업 시험을 통과한 사람에게 졸업장과 동시에 내부대신 명의로 의술개업인허장을 수여하도록 규정한 바 있지만, 실제 인허장은 수여되지 않았다.

한국 최초의 의술개업인허장

▲ 한국 최초의 의사 면허 '의술개업인허장'(100번 전경롱, 1911). ⓒ국가기록원
한국 최초의 의사 면허인 의술개업인허장은 1908년 6월 4일 세브란스(제중원)의학교 제1회 졸업생들에게 주어졌는데 그 번호가 1~7번이었다.

그 내용은 "OOO는 세브란스(제중원)의학교에서 의학 수업의 전 과정을 이수하고 동 기관에서 충분한 시험을 통과한 사실로 보아 의료를 행할 권리를 부여한다"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누가 1번이었는가? 홍석후가 3번, 주현칙이 6번이었다는 자료는 있지만, 나머지 사람들의 번호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학적부 등 관련 기록들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1번 홍종은, 2번 김필순, 3번 홍석후, 4번 박서양, 5번 김희영, 6번 주현칙, 7번 신창희의 순서로 추정할 수 있다.

이후 1909년 말부터 대한의원부속 의학교 졸업생을 시작으로 의학교 졸업생들에게도 소급해서 인허장이 주어졌고, 경술국치 후에는 세브란스병원의학교나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 졸업생 뿐 아니라 평양 야소교제중원부속 의학교 졸업생, 평양의 동인의원부속 의학교 졸업생들에게도 주어졌다. 이렇게 발급되기 시작한 의술개업인허장은 1913년 새로 마련된 의사규칙에 의해 '의사 면허'란 명칭으로 새 번호가 부여될 때까지 144명에게 발급되었다.

조선총독부의 의사 면허

1910년 설치된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의료인들을 통제할 필요성을 느끼고 의사규칙에 관한 법령을 검토하다가 1913년 11월 15일 조선총독부령 제100호로 '의사규칙'을 반포하였다.

의사 면허 제도란 기본적으로 국가에 의해 의료의 독점권을 보장받는 대신 의료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인정함을 표현하는 양면성을 띠고 있다. 따라서 의사들은 국가에 의해 그들의 영역을 보장받는 대신 의료와 자신들의 자격 규정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새로운 의사규칙에 이러한 성격, 즉 국가의 통제에 관한 부분이 상세하게 반영되어 있다. 1900년에 발표된 의사규칙은 총 7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진 지극히 개괄적이고 소략한 규칙이었고, 의사에 대한 규정 및 인허신청과 관련된 몇 가지 행정적 사항들만 규정되어 있었다.

반면 1913년에 발표된 의사규칙은 의사에 대한 규정과 함께 면허의 신청, 발급, 폐업 등에 관련된 구체적인 규정과 의사의 준수사항, 금지사항 등을 총 22개 조문과 부칙에 걸쳐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다.

이 규칙에서 '의술개업인허'가 '의사 면허'로 대치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의사를 지칭하는 말로 '醫士'라는 말을 사용하는 대신 서양의학을 시술하는 의료인에게는 '醫師'라는 명칭을, 전통의학을 시술하는 의료인에게는 '의생(醫生)'이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하였다.

▲ 조선 총독 명의의 의사 면허증(32번 에비슨, 1914)과 의사 시험 합격증(7호 이재영, 1915). ⓒ동은의학박물관

관립과 사립 의학 교육의 차별

의사 양성은 경술국치 이전까지 사립과 관립의 차별 없이 독립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의사 면허 제도의 도입으로 큰 변화가 나타났다.

이 새로운 규칙에서는 조선 총독이 지정한 의학교를 졸업한 자 혹은 조선 총독이 정한 의사 시험에 합격한 자에 대해서만 의사 면허를 부여하며, 또 외국의 의학교를 졸업한 자나 외국인에 대해서도 그에 상응하는 능력과 경력이 인정되면 면허를 부여하도록 규정하였다. 따라서 조선 총독이 지정하지 않은 의학교의 졸업생들은 바로 의사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의사 시험을 봐야 함으로써 큰 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 총독부의원부속 의학강습소는 식민지 의학 체계에서 부실하게 운영되었지만 이들 졸업생에게 자동적으로 의사 면허를 부여하는 시점부터 사립 의학교육기관에 비해 우위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의사규정이 반포된 다음 해인 1914년 7월에 제정된 의사 시험에 관한 규정에서는 의학교를 졸업한 사람뿐만 아니라 정식으로 의학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도 5년 이상의 경험이 있으면 응시 자격을 부여하였다. 이와 같이 의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 응시 자격을 부여한 것은 당시 일본을 비롯하여 의사 면허 시험을 실시하던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느슨한 규정이었을 뿐 아니라 사립인 세브란스도 이들과 동일하게 취급함으로써 차별 대우를 받았다.

정식으로 의학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 의사 시험 자격을 부여한 것은 식민지적 상황에서 특수하게 일어난 것으로 의학 교육에 소요되는 많은 비용을 총독부가 부담하지 않고 손쉽게 의사를 양성하는 방안으로 채택된 것이었다.

조선 총독부는 새로운 의사 면허를 발급하면서 기존의 의술개업인허장은 그대로 인정하여 새로운 면허는 수여하지 않았다. 다만 기존의 인허장을 분실하거나 주소 변경 등으로 다시 발급받아야 할 경우에는 새 번호의 의사 면허를 주었다.

▲ 의사 시험 합격자 관련 <매일신보> 기사(1914). ⓒ동은의학박물관

'지정'의 굴레 : 계속되는 사립 의학교육의 차별

총독부나 일본 정부는 자신들이 요구하는 기준에 맞는 의학 교육 기관을 '지정'했는데, 일단 '지정'이 되면 그에 상응하는 혜택을 받았다. 당연하게도 관에서 운영하는 기관들은 모두 '지정'을 받았다. 지정을 받기 위한 기준은 교수나 시설에 대한 규정과 같이 일부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자신들의 식민지배에 순응토록 하는 것이었다.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는 졸업생들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우선 총독부 지정을 받아야 했다. 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일본인 교수를 고용하고 시설을 확충한 결과, 1923년 2월 24일 의사규칙 제1조 제1항 제2호에 의해 조선총독부로부터 지정받았다. 이것은 일본제국 내에서 사립학교로서는 유일하게 지정된 경우였다. 이로서 1923년 이후의 졸업생들은 조선에서 무시험으로 의사 면허를 받아 개업할 수 있게 되었다.

▲ 만주제국 의사 면허증(2971번 백두현, 1937). ⓒ동은의학박물관
하지만 산 너머 산이었다. 이번에는 일본 문부성의 지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브란스는 결국 1934년 4월 10일 의사법 제1조에 의해 지정받음으로써 1934년 3월 이후 졸업생들은 일본 내무성의 의사 면허를 무시험으로 받았다. 이 면허를 갖고 있으면 일본은 물론 식민지인 대만, 남양군도, 만주국, 그리고 브라질과 영국에서도 개업할 수 있었다.

이처럼 조선총독부나 문부성에 의해 지정되지 못한 의학교 졸업생이나 검정 시험을 보는 사람들은 의사 시험에 합격해야 의사 면허가 부여되었다.

▲ 군정청 의사 면허(제816호 김기호, 1946)과 대한민국 의사 면허(1762호 이용기, 1952년 6월 30일). ⓒ동은의학박물관

대한민국의 의사 면허

한국은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지만 곧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되었다.

남한에는 미 군정청이 설치되었고 군정청 명의의 새로운 의사 면허가 부여되었다. 이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수립되면서 대한민국 명의의 새로운 면허가 부여되었는데, 1948년도 졸업생들이 앞쪽 번호를 부여받았다. 이후 1952년 1월 15일 대통령령 제588호에 의해 의사국가고시가 새롭게 실시되었다.

이 면허는 1974년 갱신돼 1번부터 새롭게 부여되었는데 2009년 초 면허번호 100000번이 배출되었다.

▲ 제1회 의사 시험 합격증(107호 이재민, 1952)과 현재의 의사 면허(제13호 이기동, 1974). ⓒ동은의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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