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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의사가 된 백정의 아들…그는 왜 만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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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의사가 된 백정의 아들…그는 왜 만주로?

[의학사 산책] 최초의 면허 의사가 배출되다

에비슨이 선교사를 지원한 이유 중 하나는 한국인 학생들을 교육시켜 의료를 통해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의사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제중원의 책임을 맡은 이후부터 조수를 고용해 해부학 등 일정한 의학 교육을 시키고 있던 에비슨은 1895년 여름의 콜레라 유행이 끝나자 의학 교육을 재개하였다. 에비슨은 해부학 교과서를 번역하는 등 다각도로 노력했지만 1899년 안식년을 떠난 후 1900년 돌아와 보니 학생들이 모두 떠나고 없었다.

에비슨의 의학 교육 체계화

세브란스로부터 현대식 병원의 건립 기금을 기부 받은 에비슨이 의학 교육을 체계화한 것은 자신이 안식년으로 떠나있던 중에 조선 정부가 3년 속성의 의학교를 설립했던 사실에도 일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기초 교육 및 임상 실습을 마칠 수 있는 기간으로 8년을 정하고, 학생들의 안정적인 교육을 위해 위의 기간 동안 생활비를 지급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학생에게 학년을 부여하였는데 가장 높은 학년이 5학년이었다. 또 안식년 이전에 시작했던 한국어로 쓰인 교과서의 편찬을 위해 의학생들과 함께 의학 교과서의 번역을 시작하였다.

강의는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점차 틀이 갖추어져 1903~4년에 이르러서는 정규적으로 해부학, 화학, 생리학 강의가 진행되었고, 학생들도 강의에 더 많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병원으로서 구리개 제중원이 갖고 있던 한계와 남대문 밖 복숭아골의 새 병원 건축으로 에비슨은 학생 교육에 전념하기가 어려웠다.

▲ 세브란스(제중원)의학교에서 처음으로 학년이 부여된 학생들의 명단(1901). 당시 4학년이던 서광호(오른쪽). ⓒ동은의학박물관

세브란스병원의 개원과 허스트의 합류

1904년 9월 새로 지은 제중원인 세브란스병원이 개원하고 허스트가 합류하면서 의학교육은 큰 전기를 맞게 되었다. 우선 학교 이름이 제중원의학교 혹은 세브란스병원의학교로 불리게 되었고, 학생들은 새로 지은 현대식 병원에서 충분한 임상 실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학생들은 모든 종류의 작은 수술은 물론, 외국인 선생의 감독 하에 독자적으로 절단술 같은 일부 큰 수술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거의 전 과목의 한국어 의학 교과서가 편찬되어 학생들의 학습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1907년이 되자 학생들은 언제 졸업해 의사가 되는가를 궁금해 하기 시작했고, 일부는 에비슨이 졸업 기한을 확실히 말해주지 않으면 중도에 포기할 뜻을 비치기도 했다. 이에 에비슨은 열심히 하는 학생들은 1년 안에 졸업시키기로 하고, 제대로 된 의사를 배출하기 위해 각 과목에서 반드시 알아야 될 기본적인 것들을 충분히 가르치기로 하였다.

전문의 수준의 졸업 시험

▲ 의학생 박서양의 왕진 기사가 실린 신문(<대한매일신보>, 1907년 10월 23일). ⓒ동은의학박물관
약속대로 1908년이 되자 에비슨은 졸업 시험을 보았다. 에비슨은 크게 내과, 외과, 산과에 대하여 꼭 알아야 할 문제를 각 100개씩 만든 후 문제를 풀지 못하면 개업이나 의사 자격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기로 하였다.

7명의 학생들은 졸업 시험에 모두 합격했는데, 몇몇 외부 의사들의 검증을 거친 이 시험은 결코 허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학생들에게 주어진 문제들은 당시 한국선교의학회 모임에서 다루어졌던 것이며, 당시 미국이나 캐나다에서도 수준이 높은 그런 문제들이었다. 이들이 받은 졸업시험의 평균 성적은 92, 87.5, 87.5, 85.5, 82, 74.5, 72점이었으며, 전체 평균은 83점이었다. 필기나 구두 시험과 함께 치룬 실기 시험은 점수가 훨씬 더 좋았다.

첫 졸업생의 배출

알렌이 의학 교육을 시작한 지 22년, 에비슨이 의학 교육을 시작한 지 10여 년 만인 1908년 6월 3일 오후 4시 첫 졸업생이 배출되었는데, 김필순, 김희영, 박서양, 신창희, 주현칙, 홍석후, 홍종은 등 7명이 그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직접 간접으로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과 접촉이 있었다. 김필순과 홍종은은 한국 최초의 교회가 세워진 장연 출신이며, 김필순, 김희영, 홍석후는 배재학당 출신이었다. 홍석후는 부친이 언더우드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박서양은 부친 박성춘을 통해 에비슨과 알게 되었고, 주현칙은 선천에서 선교의사 셔록스에 의해 의학교육을 받은 후 세브란스에 입학하였다.

졸업식장에 4개국 국기가 내걸린 사연

졸업식을 위해 잔디밭과 테니스장에 통감부에서 빌려 준 육군용 큰 텐트가 세워졌고 7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도록 의자들이 놓여졌다. 많은 깃발들이 장식되었는데, 주요 하객들의 국적을 알리기 위해 태극기와 일장기가 병원 구내로 들어가는 입구 위에 장식되었고, 병원 주체의 국적을 알리기 위해서 성조기가 병원 위에 걸렸다.

태극기는 한쪽의 높은 장대에, 에비슨의 국적을 나타내는 영국 국기인 유니온 잭은 다른 장대에 걸려 있었으며, 텐트 위에 많은 태극기와 성조기들이 걸려 있었다. 단상 뒤에는 두 개의 대형 적십자기가 텐트의 벽에 걸려있었다.

단상에는 100명의 주요 인사들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었는데, 단상 전면 앞자리에는 졸업생들을 앉게 했다. 이토 통감은 가운데 귀빈석에, 그 옆에 중추원 의장 김윤식이 앉았고 사회자인 게일, 교장인 에비슨, 허스트가 앉았다. 이외에 정부의 고위 관리, 통감의 측근 등 일본의 고위 관리, 서울에 사는 대부분의 외국인들, 그리고 서울과 그 근방의 교회에서 온 많은 한국인 부부 등 거의 천 명이 참석함으로서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야말로 서울의 일대 사건이었다.

▲ 제1회 졸업식 당일의 새브란스의학교와 졸엄식 광경(1908). 병원에 태국기와 성조기가 걸려있다(왼쪽). ⓒ동은의학박물관

한국 면허 의사의 시초

▲ 허스트와 7명의 첫 졸업생. 뒷줄 왼쪽이 김필순, 가운데가 홍석후, 오른쪽이 신창희이며, 가운데 줄 왼쪽이 주현칙, 오른쪽이 박서양이다. 아랫줄 왼쪽은 김희영, 오른쪽은 홍종은이다. ⓒ동은의학박물관
졸업식 다음 날인 1908년 6월 4일 졸업생에게는 내부 위생국으로부터 한국 최초의 의사 면허인 의술개업인허장이 수여되었다.

에비슨에 의해 이루어진 의학 교육은 크게 세 측면에서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우선 에비슨의 의학 교육은 한국 서양 의학의 토착화 과정 그 자체였다. 김필순, 홍석후, 홍종은 등은 에비슨의 지도로 거의 전 과목에 걸쳐 우리말로 된 의학 교과서를 편찬하였다.

그리고 알렌, 헤론 시대와 달리 정규 졸업생을 배출함으로써 이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 면허인 의술개업인허장을 취득하게 하였다. 즉 의학 교육이 교육 자체로서의 의미를 넘어서 사회적 공인 과정을 밟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첫 졸업생들의 활동

더 나아가 이들은 모교에 남아 후학을 양성함으로써 서양 의학이 한국에 뿌리를 내려 자생할 수 있는 토대를 쌓았다. 7명의 졸업생 중 주현칙을 제외한 6명은 의학교에 남아 후배 교육은 물론 간호원양성소에서도 강의를 담당하였다. 이들 중 김희영과 신창희는 1년 동안 간호원양성소 교수로 있다가 개업하였다.

김필순은 에비슨의 후계자로 1910년 의학교의 책임자인 학감에 임명되었고, 졸업 직후 병동과 외과의 부의사로 임명된 후 1911년에는 병원의 외래 책임자가 되었다. 박서양은 화학, 이어 외과 교수로 활동하였다. 홍난파의 형인 홍석후는 제1회 졸업생 중 가장 오래 학교에 남아 안·이비인후과 교수로 활동했으며, 세브란스동창회를 조직하고 학감 등을 역임하였다. 이들은 모교 이외에 보구여관(保救女館)의 감리회 간호원양성학교에서도 강의를 담당하였고 이들이 세브란스병원에서 실습하는 것을 도와주는 등 큰 역할을 하였다.

▲ 세브란스의학교 제1회 졸업장(김희영)과 홍석후와 홍종은을 의학박사로 표시한 광고지(1909년경). ⓒ동은의학박물관

첫 면허 의사들의 독립운동

1910년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되면서 국권을 빼앗기자 이들은 홀연히 나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김필순은 1911년 말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그의 일대기는 2008년 8월 문화방송(MBC)의 광복절 기념 특집 다큐멘터리 <광야의 의사들>에 소개된 바 있다. 박서양은 1917년 경 학교를 사임하고 연변으로 망명하여 병원을 열고, 학교 및 교회를 세워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박서양은 2009년 11월말 SBS에서 방송 예정인 의학 역사 드라마 <제중원>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들 7명의 졸업생 중 김필순, 주현칙, 신창희, 박서양이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바로 도산 안창호였다. 안창호는 김필순과 의형제를 맺은 사이였으며, 김필순은 안창호가 1902년 9월 3일 구리개 제중원 구내의 교회에서 이혜련과 결혼할 때 초청인이었다. 1907년 2월 미국에서 귀국한 이후 안창호는 세브란스병원 내에 있는 김필순의 집에서 머물면서 우국지사들과 잦은 모임을 가졌다.

또 한 사람 간접적으로나마 의학생들에게 영향을 준 사람은 신창희의 손아래 동서인 백범 김구였다. 그는 신창희가 나중에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이와 같이 이들 한국 최초의 면허 의사들의 대부분은 소의(小醫)나 중의(中醫)를 넘어 나라를 구하는 '대의(大醫)'의 길을 택했다.

▲ 에비슨, 김필순, 홍석후(1910년경). 에비슨의 왼쪽에 김필순과 홍석후가 있다. ⓒ동은의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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