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은 마약과 닮은 면이 있다. 한번 맛을 들이면, 이성이 마비된다. 멀쩡한 눈으로 보기엔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도, 빚에 취한 사람에게는 그저 만만하기만 하다. 가격을 깎을 기회를 스스로 내치거나, 가격에 끼어 있는 거품을 못 보는 일도 흔하다. 하지만, 한번 빌린 돈은 결국 갚아야 한다. 채무 변제일이 다가왔을 때는, 바가지 썼다고 후회해도 이미 늦다.
장사꾼들은 소비자의 이런 심리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일단 물건부터 사서 쓰고 값은 천천히 치르라며 꼬드긴다. 여기에 넘어가면, 가격 거품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한국 대학 교육이 이런 모습을 닮아간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취업 후 상환 학자금 대출제도'를 전격 발표했다. 등록금 고지서를 받아들고 한숨 쉬는 대학생들에게 우선 등록금 대출해줄 테니, 나중에 돈 벌어서 갚으라는 제도다. 대출조차 안 해주는 것보다는, 취직도 못했는데 당장 갚으라고 독촉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그래서 마냥 반갑기만 한 일일까. 그렇지 않다. "대학 등록금 자체가 과연 정당하게 책정된 것인지"라는 질문이 빠졌기 때문이다. 대출은 공짜가 아니다. 이자까지 붙여서 되돌려 줘야 하는 돈이다. 당장 갚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터무니없이 비싼 등록금으로 젊은이들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일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최근 십여 년 동안 대학 등록금 인상률은 물가 상승률을 크게 웃돌았다. 그 결과가 대학생이 아무리 아르바이트를 많이 해도 학비를 감당할 수 없다는 '등록금 천만 원 시대'다.
그렇다면, 등록금이 수직상승한 만큼 대학 교육도 좋아졌을까.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찾기 힘들다. 반대로, 대학에 비정규직 교수가 늘어난다는 소식만 잇따른다.
악덕 상인이 바가지 씌우는 상품 마냥, 대학 등록금에도 거품이 끼어 있다는 이야기다. 이런 거품은 그저 요란하기만 한 건물을 짓는데 쓰이거나, 학교 재단 이사장의 배를 불리는 데 쓰이는 게 고작이다. 그런데 "학자금을 대출받으면 졸업하자마자 취업 못해도 갚아야 되니까 신용불량자가 된다는 뉴스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대통령은 왜 등록금 거품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을까.
마침, 이런 문제를 지적하는 글이 나왔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6일 발표한 "시민의 힘으로 얻어낸 학자금 대출제도"라는 논평이다. '취업 후 상환 학자금 대출제도'의 의의와 한계를 조목조목 분석한 글이다. 내용을 그대로 소개한다.
시민의 힘으로 얻어낸 학자금 대출제도
- 취업 후 상환 학자금 대출제도의 의의와 한계, 그리고 개선 방안 -
지난 7월 30일, 이명박 대통령이 전격 발표한 '취업 후 상환 학자금 대출제도' (ICL : Income Contingent Loan)는 그 동안 교수노조 선생님들이 지속적으로 주장해온 등록금 후불제와 궤를 같이한다. 현 학자금 대출제도 하에서 졸업도 하기 전에 신용불량자가 되고, 심지어 중간에 학업을 포기하고 아르바이트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제자들의 고통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었던 교수노조 선생님들은 대학교육의 근간이 흔들리는 현실을 좌시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등록금 후불제'를 제안하고 국토대장정을 벌이면서 이를 하나의 시민운동으로 촉발 시켜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취업 후 상환 학자금 대출제도'의 갑작스러운 도입은 단순한 순수 정책적 차원의 의미로만 받아들일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이의 도입은 이명박 정부의 지지율 하락을 만회하기 위해 급조되었다는 정치적 성격을 갖고 있다. 이번에 발표된 이 제도는 끊임없는 민생 불안 속에서 누적되어온 시민사회의 요구에 의해 도입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 제도의 등장은 작은 6.29 항복 선언과 같은 의미가 있다. 마치 19세기 프로이센의 수상 비스마르크가 민생경제가 어려워지고 이에 대한 노동세력의 반발이 폭발 직전에 이르자, 이를 사전에 무마하기 위해 의료보험제도 등의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한 것과 같은 성격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있다. 그것은 이 정책이 이명박 정부가 출범 이후 굳건하게 밀어붙였던 '감세노선'과 근본적으로 모순된다는 점이다. 현 정부는 그동안 지속적으로 부자 감세를 추진해왔고, 이 때문에 향후 재정적자의 규모에 대한 국민의 우려가 깊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세는 현 정부의 철학이자 버릴 수 없는 원칙이었다. 이런 마당에 상당한 규모의 예산이 추가로 필요한 교육 복지정책을 발표했다는 것은 음미해볼 만한 구석이 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별도의 증세가 필요한 조건을 정부가 스스로 도입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취업 후 상환 학자금 대출제도'의 도입은 시대적 요구와 조직된 시민의 정치적 압박에 굴복하여 현 정부가 자신의 정책 기조와 배치되는 노선을 부분적으로나마 수용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이런 의미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측면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내용은 비슷하지만, 애당초 '등록금 후불제'를 주창한 시민사회 세력들과는 분명한 철학적인 차이를 갖고 있다. '취업 후 상환 학자금 대출제도'는 단순히 기존의 학자금 융자제도를 확대하는 수준이라는 점에서 국가가 대학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책임을 부담해야 한다는 원칙아래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그 동안 주장해온 '등록금 후불제'와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근본적인 철학의 차이로 인해 '취업 후 상환 학자금 대출제도'는 학자금 융자 대상을 소득 7분위까지로 한정하고 있으며, 성적도 C 학점으로 제한을 두고 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그 동안 성적이나 소득수준에 상관없이 전체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등록금 후불제'를 주장해 왔다. 따라서 우리는 이 제도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항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기존의 대학교 등록금이 과연 적정 수준인지 검토돼야 한다.
'취업 후 상환 학자금 대출제도'는 잘못하면 등록금 인상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 이미 의치학 계열의 등록금이 천만 원이 넘어서고, 2009년 평균 등록금이 국공립대가 419만 원, 사립대가 742만 원이나 되는 실정에서 그나마 대학생과 학부모들의 반발 등 사회적 압력으로 이의 상승이 억제되어 왔다. 그런데 이제 이 제도의 도입으로 등록금 인상의 방조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대학등록금 자체를 그대로 두거나, 인상을 자율에 맡긴 채로 '상환 연장'만 할 경우 각 대학은 '등록금 인상'의 기회로 이 정책을 이용할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 제도는 등록금 상한제와 함께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 수천억 원에 이르는 적립금을 쌓아놓고도 학생들의 등록금을 주요 재원으로 학교를 운영하는 사립대학들의 재정 투명성이 기본적으로 담보되어야 한다. 사립학교법 등을 제대로 정비해 공익이사가 재단 운영에 참여하도록 하며, 모든 재무와 회계가 전면적으로 공개되어야 한다. 이러한 전제 조건들이 없다면 이 제도는 족벌사학의 배불리기를 위해 학생들의 미래 수입을 담보 잡는 정책으로 귀결될 위험이 높다.
둘째, 대학에 대한 평가를 강화하여야 한다.
기존 대학의 시설과 설비, 교원확보 여부, 교육의 수준에 대한 엄정한 평가를 실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수준 미달의 대학에 강제 폐교를 명령할 수 있는 강력한 대학 평가제도 같은 통제수단이 없는 상태에서 이 제도를 도입하면, 이미 존재 의미가 없어 폐쇄를 추진하고 있던 지방사립대학들의 수명을 불필요하게 연장시켜주는 연명치료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될 우려도 있다. 즉, 잘못하면 '취업 후 상환 학자금 대출제도'가 능력 없고 불필요한 교육을 재생산하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상시적으로 실험 실습비를 빼돌리고, 시간강사로 전체 강좌의 80%를 운영하며, 실습실과 기숙사와 도서관조차 제대로 없는 대학에 '취업 후 상환 학자금 대출제도'의 도입은 재고되어야 한다. 엄정한 평가를 통해 기본적인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대학은 '취업 후 상환 학자금 대출제도'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조치가 병행되어야 한다.
셋째, 실제로 대학생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생활비 상한선을 없애야 한다.
학교생활은 단순히 등록금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 걱정 없는 대학생활을 할 수 있으려면 학생들의 하숙비와 책값까지도 지원해 줄 수 있는 복지제도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취업 후 학자금 상환 대출제도는 '실질적인 생활비' 수준까지 융자 한도를 높여야 할 것이다. 세계와 경쟁해야 하는 대학생들이 하숙비, 식비, 교재비를 마련하기 위해 24시간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로 밤을 지새운다면, 이번에 마련한 정책의 실질적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현재의 교과부의 안 대로라면 지원 대상과 지원 내용 모두 일부에 불과할 우려가 있고 결과적으로 소기의 정책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이번 제도에서 제외된 소득 분위 8분위 이상의 계층에 대해서도 이 제도의 혜택을 받게 하자는 것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주장하는 보편적 복지의 원칙이다. 자녀를 대학에 보내고, 취직시키고, 결혼을 위한 집을 사주고, 그 손자와 손녀까지 봐 주어야 부모의 역할을 다한 것으로 평가되는 과중한 부담을 없애기 위해서는 부모의 소득수준에 관계없이, 국가의 지원에 기초하여 자신의 책임과 능력으로 공부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다. 그리고 중상층을 포함한 모든 국민이 국가복지의 혜택을 받도록 해야 이들 중상층 국민들이 국가복지의 재원 마련에 필요한 세금을 기꺼이 내려고 할 것이다.
넷째, 학자금에 대한 대출 이자율이 더 인하되어야 한다.
발표된 정부 방안대로라면, 앞으로 대출금리는 5% 안팎에서 매년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후불제의 재원을 국채로 조성하기 때문에 대출금리가 시중금리와 연동되고, 따라서 향후 금리가 인상되면 학자금 융자의 금리도 더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는 학자금 융자의 이자율을 현행 금리 5.8%를 기준으로 해서 '변동금리'를 적용할 계획이며 시중 은행의 금리보다 1% 정도 저렴하게 운용할 것으로 밝히고 있다. 그러나 원리금 납부가 대출 개시 이후 평균 8년이 지난 다음에 시작된다고 보면, 그 때에는 원금과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 날 우려가 있다.
비슷한 제도를 운용해온 영국, 호주, 뉴질랜드의 경우 국채가 아닌 정부예산으로 학자금 융자의 재원을 조달했다. 2004~2005학년도에 영국은 대출금리가 2.7%였고, 호주는 2.4%였다. 보통 학자금 융자의 경우 부실채권 발생율이 극히 낮다. 따라서 이 제도가 대학교육을 담보로 전 국민을 빚쟁이로 만들어 은행의 이자놀이를 도와주는 일종의 가계대출 수단으로 오해될 우려도 있다. 그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학자금 대출이자가 시중금리가 아닌 CD 금리의 50% 수준인 2.5% 선 이하가 될 수 있도록 정부가 최소한 이자의 반 이상을 재정으로 보전해 주는 방안을 도입해야 한다. 재원의 조달 역시 한국장학재단의 채권 발행에만 의존하기 보다는 4대강 개발 자금 등을 전용할 것을 우리는 권고한다.
일관되게 감세를 외쳐온 이명박 정부가 '취업 후 상환 학자금 대출제도'를 도입하도록 만들어낸 것은 복지세력과 국민여론의 계속된 정치적 압박이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역동적 복지국가'의 사회정책에 대한 체계적인 대안의 제시와 국민의 관심과 참여를 유도하는 지속적인 노력이 이루어진다면 일정 정도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얻게 되었다. 우리 복지세력과 국민들은 국가복지 패러다임의 변화, 즉 '역동적 복지국가'를 향해 더욱 전진할 것이다. 돈이 없어도 등록금 걱정 없이 대학에 다닐 수 있고 자식의 대학 공부로 부모의 허리가 휘는 일이 없으며,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교육의 권리'를 학생 자신과 국가가 책임지도록 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지속적으로 더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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