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에서 필수적인 요소로 학생, 교수 외에 교과서를 들 수 있다. 외국에서 유입된 학문 분야의 경우, 학생들이 외국어에 능통하지 못하여 원어로 된 교과서를 읽을 수 없는 점은 교육에 있어 큰 걸림돌로 작용한다. 이를 타개하는 방법 중 하나는 원서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이다.
알렌과 헤론에 의해 시작된 초창기 의학 교육에는 한국어로 쓴 교과서는 사용되지 않았고, 학생들은 한국어가 서툰 교수들의 강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학생들은 해부학에서 과연 어떤 지식을 얻을 수 있었을까?
왜 해부학 교과서인가?
1895년 여름 콜레라 유행이 끝난 후, 제중원에서 본격적인 의학 교육을 재개한 에비슨은 한국어로 쓰인 의학 교과서 편찬을 시작하였다. 이는 서양 의학의 토착화를 위한 큰 발을 내딛는 결단으로서, 동아시아의 어느 나라에서도 그 전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에비슨은 우선 의학의 기본인 해부학 수업을 위해 당대 유명했던 <그레이 해부학(Gray's Anatomy)>을 번역하기로 하였다.
왜 해부학인가? 그것은 해부학이 의학 역사상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해부학은 한의학과 서양 의학을 비교할 때 중요한 잣대가 된다. 베살리우스가 주도한 해부학은 중세 의학을 상징적으로 지배했던 갈렌의 의학을 붕괴시킴으로써 서양 의학을 근대화시켰다. 더구나 유교적 전통이나 '기'를 강조하는 한의학의 특성상 죽은 시체에 대한 관심이 적을 수밖에 없었던 조선에서 의학 교육을 하는 데에는 인체 구조의 이해는 가장 선행되어야 할 분야였다.
에비슨은 조선 고전에 지식이 있고 영어를 약간 아는 한국인 조수를 고용하여 번역을 시작하였고, 1897년 초에는 이미 번역이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번역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조선말로 그 여러 가지 과학상 술어를 번역할 수 없음을 알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교과서를 번역만 할 뿐 아니라 새말을 만들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과학상 여러 가지 술어를 번역과 함께 새로 만들어 내기 시작하였다. 나는 부족한 조선말을 가지고 번역하는 사람에게 그 원어의 뜻을 일러주면 번역하는 사람은 나의 설명을 들은 후에 한문으로 그 뜻에 맞도록 용어를 만들어 내었다. |
▲ 에비슨과 김필순의 <약물학>(1905)의 속표지(왼쪽), 에비슨의 서문(가운데), 영어 간기(오른쪽). ⓒ한국학중앙연구원 |
두 번에 걸친 불운
이 번역은 에비슨이 안식년을 맞은 1899년 3월에 완료되었다. 그러나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그 동안 이 원고를 보관하고 있던 조수가 죽는 바람에 원고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한글로 쓴 교과서가 시급한 상황에서 1차로 번역한 원고가 없어진 이상 에비슨은 빠른 시일 내에 번역을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이번에는 영어 실력이 뛰어난 김필순이라는 조수를 만난 것이 에비슨으로서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물론 번역해야 할 과목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김필순은 그의 영어 실력만으로 유능한 번역 보조자가 되기는 어려웠다. 이에 에비슨은 김필순을 자신의 곁에 놓고 직접 가르치며 번역을 진행하였다. 김필순을 단순한 번역 보조자가 아닌 의사로 성장시키며 제대로 된 번역을 시도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바로 1900년의 일이었다.
에비슨은 다시 <그레이 해부학>을 번역하였다. 번역에 도움을 받기 위해 중국과 일본에서 출판된 책들을 구해 참고하였다. 번역은 1902년 10월까지 상당한 양을 마쳤으며, 새 병원이 거의 완공되던 1904년 9월 마침내 번역을 끝냈다. 그들의 번역 작업은 병원 건립이나 환자로부터의 호출 혹은 외국인 방문객 등으로 인해 자주 중단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해낸 성과이기에 더욱 값진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 이번 번역서에도 문제가 발생하였다. 번역한 원고를 등사하여 몇몇 학생들이 이용하기는 했지만 원래 원고가 불에 타 없어진 것이었다. 결국 두 번째의 번역 역시 완성된 책으로 출판하지 못하게 되었다.
한국 최초의 해부학 교과서가 출판되다!
에비슨과 김필순은 해부학 책을 또 다시 번역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번에는 참고용으로 구입했던 일본인 이마다 츠카네(今田束)의 책을 번역하기로 하였다. 김필순도 이미 그 책에 상당히 친숙해져 번역하기가 더 용이했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던 당시의 정세도 그 책을 선택한 데에 관련이 있었다. 이 책은 원본같이 3권으로 등사되었는데, 속표지에는 "대한국인 김필슌 번역, 대영국의어비신 교열, 해부학, 일쳔구백륙년대한 황셩제중원 출판"으로 인쇄돼 있다.
▲ 김필순의 <해부학>(1906)의 번역본(왼쪽)과 원본(오른쪽). ⓒ동은의학박물관 |
전 과목에 걸친 한국어 의학 교과서의 출판
▲ 제중원에서 간행된 여러 의학 교과서. ⓒ동은의학박물관 |
제중원에서 가장 먼저 공식 간행된 교과서는 1905년의 <약물학>이다. 의학 서적의 편찬에는 에비슨 외에도 제중원의학교를 제1회로 졸업한 김필순, 홍석후, 홍종은 등이 참여하였고, 거의 전 과목의 교과서가 출판되었다.
의학생들 교육에는 에비슨에 의해 간행된 의학 교과서 외에도 다른 선교사들이 간행한 책이나 조선예수교서회에서 간행한 책들이 사용되었다. 에바 휠드는 에비슨이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온 1900년 10월 이후 자신의 한국어 선생의 통역을 통해 수학을 강의했는데, 자신이 저술한 <산술신편>을 교재로 사용하였다. 또한 조선예수교서회에서 1907년부터 간행된 약 30종의 위생 관련 책자들도 의학생 교육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제중원에서 발행된 의학 교과서들은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면서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일제의 강요로 일본어 의학 교재를 사용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관립)의학교에서의 의학 교과서 번역
▲ 산술신편 제일권(1902).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
하지만 1902년 유창희가 번역한 <병리통론>과 1907년의 <해부학> 번역본이 남아 있다. 이외에 의학교 교사 후루시로의 책(<종두신서>(1898), <위생신론>(1899))과 교관 남순희의 것(<정선산학>(1900), <정선산학해식>(1900))은 의학 교육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책들을 저술하였다.
대한의원에서도 <근세물리학>(최규익, 1909) 및 <근세화학>(최규익, 1909) 등 몇 권의 책이 발간되었다. 하지만 1909년 4월 중순 신학기부터 일본인 교수가 일본어로 강의를 진행하고 통역을 없애면서 더 이상의 한국어 번역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 의학교에서 간행된 <병리통론>(1902)과 <해부학>. ⓒ동은의학박물관 |
▲ <정선선학>(1900)과 <종두신서>(1898). ⓒ동은의학박물관 |
제중원과 의학교에서 출판된 해부학 교과서의 비교
이 때, 제중원과 의학교에서 동일한 원서를 각각 번역하여 출판한 책이 있어 흥미를 끈다. 그것은 바로 <해부학>인데, 모두 일본인 이마다 츠카네의 <실용해부학(實用解剖學)>을 번역한 것이다.
먼저 1906년 발행된 김필순의 번역본은 원본과 같이 3권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원본과는 몇 가지 점에서 달랐다. 번역자의 의도에 따라 일부가 삭제되거나 필요에 따라 그림에 변화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실제 해부를 통한 경험은 아니지만 이전 번역에서 얻은 경험을 새 번역에 적용한 것으로, 의학의 토착화라는 관점에서 중요한 진전이라고 볼 수 있다.
본문을 비교해 보면 뼈, 근육, 혈관 등 해부학적 구조의 명칭은 이마다의 원본과 특별히 다른 것이 없었다. 모두 당시에 통용되던 한자였기 때문에 그것들을 한국에서 사용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당시 사용되었던 용어 중에 현재 사용되지 않는 것들이 자주 보이며 상당히 어려운 한자가 사용되었다.
해부학 용어와 달리 구조에 대한 설명은 대부분 한국어로 풀어서 쓰고 있는데, 이 과정에 번역자의 노고가 컸음을 짐작케 한다. 또한 설명이 간결하게 되어 있는 <실용해부학>의 내용은 모두 포함하되 필요에 따라 원문에는 없는 설명이나 항목이 보충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전의 <그레이 해부학> 번역에서 얻었던 경험을 반영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에비슨과 김필순에 의해 1906년 간행된 한국 최초의 해부학 교과서는 독일 의학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이마다의 책을 기본으로 하되 영국(및 미국)의 <그레이 해부학> 번역에서 얻었던 자신들의 귀중한 경험을 더함으로써 단순한 번역에 그치지 않고 독일과 영국의 해부학을 아우르는 완성도 높은 해부학 책을 편찬하고자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907년 의학교에서 발행된 번역본은 1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교사 고다케(小竹)가 추린 것을 유병필이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은 탁지부 인쇄국에서 제조하였으며, 활자로 찍은 양장본이다.
책의 구성을 보면, 1907년 5월에 쓴 민영소의 축하의 글과 1907년 2월 10일자 의학교 교장 지석영의 서문, 목차 17쪽, 본문 501쪽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문은 국한문 혼용으로 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서론과 골학 총론, 인대학 총론, 근학 총론, 내장학 총론, 혈관학 총론, 신경학총론 등 6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골학 총론은 골학 각론, 사지골의 2장으로, 인대학 총론은 구간인대, 상지인대, 하지인대 등 3장으로, 근학 총론은 근학 각론 구간제근(軀幹諸筋), 사지근으로, 내장학 총론은 소식기(消食器), 호흡기, 비뇨기, 생식기, 혈관선, 오관기(五官器)로, 혈관학 총론은 심장, 동맥, 정맥, 임파관으로, 신경학 총론은 동물성 신경계통의 중추부, 동물성 신경계통의 말초부, 교감신경계통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이 의학교 번역본은 모든 용어들은 한자를 그대로 썼고 토씨만을 한국어로 썼으며, 본문 속에 삽도나 도판이 전혀 없다는 점이 김필순의 번역본과 크게 대비되는 점이다.
[자료] 제중원-세브란스병원에서 간행된 의학 교과서 책 이름에 꺽쇠를 한 것은 현재 남아 있는 책에 적혀 있는 실제 제목이다. 1. 그레이 저 인체해부학. 필사본, 1899년 3월 탈고. (원고를 보관했던 조수가 사망함에 따라 원고가 없어짐.) 2. 화학. 1901년 사용. (일본책을 번역한 것임.) 3. 그레이 저 인체해부학. 필사본, 1904년 9월 현재 탈고. (김필순과 함께 번역했으며, 등사 직전에 원고가 불에 타버렸음.) 4. <약물학 상권. 무긔질.> 대영국 의사 어비신 번역, 1905. 5. 약물학 하권. 유긔질. 대영국 의사 어비신 번역, 1905. 6. <해부학 권일.> 대한국 사인 김필순 번역, 대영국 의사 어비신 교열, 1906. 7. <해부학 권이.> 대한국 사인 김필순 번역, 대영국 의사 어비신 교열, 1906. 8. <해부학 권삼.> 대한국 사인 김필순 번역, 대영국 의사 어비신 교열, 1906. 9. <신편 화학교과서. 무기질.> 대한국 사인 김필순 번역, 대영국 의사 어비신 교열, 1906. 10. 신편 화학교과서. 유기질. (김필순 번역, 에비슨 교열. 1906년 초 현재 번역이 끝남.) 11. <신편 생리교과서. 전.> 대한국 사인 홍석후 번역, 대영국 의사 어비신 교열, 1906. 12. <진단학 1.> 대한국 사인 홍석후 번역, 대영국 의사 어비신 교열, 1906. 13. <진단학 2.> 대한국 사인 홍석후 번역, 대영국 의사 어비신 교열, 1907. 14. 치료학(Therapeutics or Diseases and their Treatment). (1904년 9월 현재 번역을 계획하였고, 1906년 현재 끝남.) 15. 위생학(Hygiene). (1906년 현재 번역이 끝남.) 16. 간호학(Nursing). (1906년 현재 번역이 끝남.) 17. 식물학(Botany). (1906년 현재 번역이 끝남.) 18. 내과(Practice of Medicine). (1906년 현재 번역이 끝났음. 김필순이 내과책을 번역했다는 기록이 있음.) 19. <피부병 진단치료법 단.> 대한 륙군 군의 홍종은 번역, 대영국 의사 어비신 교열, 1907. 20. 세균학. (1906년 초 및 1907년 9월 현재 번역이 끝난 상태임.) 21. <병리통권.> 1907. 22. <무씨 산과학.> 의사 홍종은 역, 1908. 23. 고등생리학. (1907년 9월 현재 번역 중이었으며, 1908년 현재 끝났음.) 24. <해부학 권일.> 대한국 의사 김필순 번역, 대영국 의사 어비신 교열, 1909. 25. <신편 화학교과서. 유기질.>한국 의사 김필순 번역, 대영국 의사 어비신 교열, 1909. 26. 신편 화학교과서. 무기질. (1909년 새로운 등사판이 발행된 것으로 추정됨.) 27. 신편 생리교과서. 전. 대한국 사인 홍석후 번역, 대영국 의사 어비신 교열, 1909. 28. <외과총론.> 의학박사 김필순 역술. 1910년 10월. 29. 해부생리학(Combined Anatomy and Physiology for Nurses). (D. Kimber이 지은 <Anatomy and Physiology for Nurses>를 김필순이 번역한 것이며, 간호원양성소에서 1908-9년도에 가르침.) 30. 현미경(Microscope). (1909년 8월 현재 번역 완료.) 31. 내과(Practice of Medicine). (1908년 8월 현재 번역 중이었으며, 1906년 번역을 완료한 것과의 관계는 확실하지 않음.) 32. 의학사전. (1908년 8월 현재 번역 중.) 33. 조직학(Histology). (1909년 번역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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