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은 유희춘이 이조판서에게 천거를 하면서 내의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유희춘이 지은 <미암일기>를 보면 양예수가 매월 유희춘을 방문해 진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허준 역시 평생 그의 후원자였던 유희춘의 집을 드나들었다. 이런 기록을 염두에 두면, 허준은 내의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양예수와 알고 지냈을 가능성이 크다.
근거는 또 있다. <어우야담>을 보면, 양예수는 장한웅이라는 도인을 만나서 의술을 전수 받았다. 양예수가 관여한 <의림촬요>를 사람들이 <장씨의방>이라고 부른 점을 염두에 두면, 그가 장한웅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허준의 <동의보감>에도 이런 도가의 논리는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양예수는 지금은 사라진 <향약집험방>을 저술했다. 이 책은 선조가 "중국이 아닌 국내 약재 처방을 기록하라"고 지시해 집필된 책이다. 이런 양예수의 <향약집험방>의 내용은 허준의 <동의보감>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줬을 것이다. <동의보감>에 민간 처방이 많은 것도 그 증거이다.
▲ 드라마 <허준>에서 허준을 괴롭히던 양예수야말로 허준의 진짜 스승인가? ⓒ프레시안 |
의학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사상, 진료 스타일, 약물을 쓰는 방식 등에서 유사점이 발견되기 마련이다. 허준과 양예수는 이런 점들에서 큰 차이가 보인다. 우선 <동의보감>의 중심 사상은 도가 사상 중에서도 '정기신론'이다. 그러나 <의림촬요>에는 이런 식의 언급이 전혀 없다.
약물을 쓰는 방식도 크게 달랐다. 양예수는 인삼을 위주로 한 따뜻한 약재를 집중 투약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어우야담>은 이렇게 기록한다.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양예수의 투약 방법은 패도와 같아서 집중적인 투약으로 효과가 빠른 반면 사람을 상하게 하는 일이 많았다."
허준은 이런 양예수와 정반대였다. 허준의 처방은 오히려 차가온 약재를 선호하는 경향이 컸다. 1608년 광해군 즉위년 사간원은 선조의 죽음의 원인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언급했다. "허준이 망령되게 찬 약을 써서 마침내 선왕께서 돌아가셨으니 청컨대 다시 국문하여 법에 따라 죄를 줄 것을 청합니다."
<미암일기>에 나온 허준에 대한 언급도 똑같다. 허준이 쓴 처방은 강심탕, 청폐음, 건갈상지탕 등으로 대개 차가운 약재였다. 양예수가 인삼을 중심으로 한 따뜻한 약물에 치중하면서 극한 약재를 선호한 반면 허준은 차가운 약재를 선호하면서 안전한 처방을 구사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인이 보면 처방 선택에 큰 의미가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스승과 제자의 증상과 처방을 보는 눈은 분명한 일치점을 보인다. 의사의 처방 선택은 아는 것에 의존하기보다 경험적인 것에 더 큰 신뢰를 갖는다. 스승의 경험은 중요한 선택의 기준이며 습관처럼 제자에게 습득된다. 이 점을 감안하면 허준과 양예수는 다른 학맥에서 성장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허준의 스승이 양예수가 아니라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동의보감> 집필 과정이다. 1596년 드디어 선조는 <동의보감> 집필을 명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 <동의보감> 집필의 책임자는 허준이 맡고 정작, 양예수 등도 집필자로 참여한다. 만약 양예수가 허준의 스승이라면 유교 사회에서 허준이 책임자로 임명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설사 임명되었다 할지라도 스승에게 양보하거나 양보의 청을 올리는 게 당시의 관습이었다. 그러나 허준은 그렇지 않았다. 결국 양예수는 내의원 우두머리였지만 역사적인 편찬 작업에서 제외되는 수모를 겪는다. 만약 양예수가 <동의보감>이 훗날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는 걸 알았다면, 끝까지 책임자를 고집했을까?
모를 일이다. 아무튼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동의보감> 편찬 작업이 무산되면서 허준은 이 책을 단독으로 집필한다. 그렇다면, 양예수가 아니라면 허준의 진짜 스승은 누구일까? 다음 글에서 그 비밀이 공개된다. 허준과 관련된 또 다른 놀라운 사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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