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이 진행되던 나흘 동안 그나마 잠잠하던 도장 공장 안팎은 다시 협상 전으로 돌아갔다.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시작되는 경찰의 진입 시도도 마찬가지였다. 철판으로 된 공장 옥상 위를 날며 최루액을 투하하는 경찰의 헬기도 똑같았다.
농성장 안에 있는 한 관계자는 "이곳 생활을 하다 보면 하루가 완전히 똑같아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조차 잊은 지 오래"라고 말했다.
경찰의 진입 시도와 동시에 해가 뜨고, 오전이 되면 사측 직원과 용역 경비원이 출근을 한다. 낮 동안 최루액이 떨어지고, 곳곳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발생하고, 해가 지면 방송 차량에서 가요가 나온다. 밤새 이어진 방송이 동틀 무렵 경찰의 시끄러운 진압 시도에 묻히면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된다.
점거 파업 중인 노조원에게 음식물 반입이 차단된 지는 이날로 19일째, 물과 가스가 끊긴 지는 16일째다. 게다가 지난 2일부터는 전기마저 끊겼다. 파업 74일을 맞은 도장 공장 내부는 어떤 상황일까? 이탈자의 증언과 현장 취재 기자들의 증언을 종합해 정리했다.
"그 어떤 빛도 들어오지 않는 공장 안은 그야말로 칠흑"
지난 2일 실시된 단전의 효과는 대단했다. 도장 공장 내부는 암흑 상태로 변했고, 선풍기조차 사용이 어려워져 찜통 그 자체인데, 환기 시설도 전혀 작동이 안 된다. 8시간씩 사용이 가능한 자가발전기를 이용하고 있지만 500여 명의 생활에는 택도 없다.
현장에서 취재 중인 한 기자는 "휴대전화에서 나오는 빛으로도 공장 안이 보이지 않지만, 촛불을 밝히기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화재의 위험 때문이다.
▲ 지난 2일 실시된 단전의 효과는 대단했다. 도장공장 내부는 암흑 상태로 변했고, 선풍기조차 사용이 어려워져 찜통 그 자체인데다, 환기 시설도 전혀 작동이 안 된다. ⓒ<노동과 세계> 이명익 기자 |
전기가 끊기면서 물 마시기가 더 어려워졌다. 지난달 20일 물 공급이 중단된 이후 파업 노동자들은 에어컨의 냉각수를 받아놓았다가 이를 끓여 각종 생활용수로 사용해 왔지만 이마저 불가능해졌다.
단전 이전에는 비록 1인당 하루에 마실 수 있는 물은 500밀리리터에 불과했지만, 냉장고에 넣어 시원하게 마실 수 있었는데 그조차 안 되는 상황이다.
하루에 세 번 나오는 주먹밥도 부탄가스로 만들고 있다. 한 관계자는 "부탄가스도 거의 다 떨어져가는 상황이라 겨우 겨우 밥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음식물 반입은 물이나 가스, 전기보다 더 일찍 차단된지라 음식물도 넉넉하지 않다. 당연히 한 끼에 조합원에게 제공되는 주먹밥은 고작 한 덩어리다.
"삼삼오오 모여 앉으면 여기서 나가면 무엇을 먹을지 얘기하는 것이 제일 큰 위로"다. 바닥에는 김치, 통닭, 소주, 맥주, 삼겹살, 물, 담배 등 먹고 싶은 것들이 스프레이로 적혀 있다.
▲ 바닥에는 김치, 통닭, 소주, 맥주, 삼겹살, 물, 담배 등 먹고 싶은 것들이 스프레이로 적혀 있다. ⓒ<노동과 세계> 이명익 기자 |
"철판 위로 쏟아지는 여름 햇볕에 떨어지는 최루액…공장 밖도 지옥"
▲공장 내부만 지옥이 아니다. 답답한 공기가 숨 막혀 옥상에라도 올라가볼라 치면, 헬기에서 끝없이 최루액이 떨어진다. ⓒ연합뉴스 |
혹시 내 얼굴이 드러날까 싶어 온갖 방법으로 얼굴을 가리고 올라가도 "내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은 떨칠 수가 없다. 그래도, 낮에는 시도 때도 없이 진압을 시도하는 경찰과 건너편 옥상에서 새총으로 볼트 등을 쏘는 용역 경비원에 맞서느라 정신 차릴 겨를도 없다.
해가 지고 기온이 떨어지면 육체적 고통은 덜해지지만, 정신적 스트레스가 극심해진다. 조용한 도장공장에 사 측이 틀어놓은 선무 방송이 울려 퍼진다. 전인권의 <행진>,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는 단골 메뉴다. 한 취재진은 "발랄한 최신가요라도 틀어주면 기분이라도 나아질 텐데 꼭 애절한 가요만 크게 틀어 지겹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라고 말했다.
지금 도장 공장은 그야말로 안팎으로 모두 "감옥보다 더한 지옥"인 것이다. 당연히 조합원들의 심리 상태도 불안정하다. 협상 결렬 후 공장을 빠져 나온 한 이탈 노조원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고립 70일이 넘으면서 심리 상태가 불안한 사람들이 많다"며 "가장 걱정되는 일은 누가 욱하는 마음에 공장에 불이라도 지르는 것"이라며 말했다.
이탈자들 "노조가 아니라 회사에 실망해 내가 떠나련다"
70일 가까이 거의 변화가 없던 파업 참가 조합원의 숫자는 지난 2일 회사 측의 협상 결렬 선언 이후 줄어들고 있다. 경찰 집계에 따르면 총 114명이 도장공장을 떠났다. 협상 결렬 당일인 2일 86명이, 3일에는 19명, 4일 새벽에는 9명이 농성장을 빠져나왔다.
현장 취재진은 "나가는 사람들에 대해 막는 분위기는 전혀 아니"라고 전했다. "나간 사람 중에는 자신은 살기 위해서 들어왔지만 출구 없는 파업으로 가족들이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노조 간부들도 '고생했다'며 보내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 이탈자의 언론 인터뷰도 이를 반영한다. 이 이탈자는 "비용이 들지 않는 무급휴직마저 회사가 받아들이지 않을 줄 몰랐다"며 "교섭 결렬 후 단전까지 하는 것을 보고 사측이 (회사를) 살릴 마음이 없구나 싶어 자포자기했다"고 말했다.
회사는 '청산형 회생 계획안'을 얘기하고, 협력업체는 '조기 파산 신청'을 밀어붙이는 상황에서 이탈자 발생은 노동자들이 노조의 강경한 노선에 등을 돌렸다기보다는, 회사에 정이 떨어진 탓이 크다는 설명이 가능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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