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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주의를 전복하라, 비근대주의 세계를 상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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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주의를 전복하라, 비근대주의 세계를 상상하라!"

[화제의 책]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인생을 살다 보면 아주 가끔씩 세상을 전혀 새롭게 볼 수 있는 길을 안내하는 사상을 만나게 되는 기쁨을 누린다. 필자가 약 10여 년 전부터 접하게 된 '행위자-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ANT)'이 그런 기쁨을 선사했는데, 브뤼노 라투르는 바로 이 이론을 만들어낸 대표자 중 한 사람이다. '행위자-연결망 이론'은 원래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학제적으로 연구하는 과학기술학 분야에서 출발했지만, 오늘날 그것은 사회학, 인류학, 문화연구, 지리학, 환경학, 정치철학, 기술경제학, 경영학, 정보학 등에까지 그 적용 범위를 넓히면서 매우 유력한 사회이론으로 부상하고 있다.

라투르가 1991년에 불어로 발표한 저서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영어 번역판은 1993년 출간, 이하 <근대인>)는 그가 과학기술학에서 축적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이를 근대성에 관한 정치철학적 분석으로 과감하게 확장시킨 책이다. 결코 쉽게 읽혀지지 않는 책인데도 현재까지 20여 개 국가에서 번역된 것으로 보면 라투르의 저서 중에서 가장 널리 읽히고 또 큰 영향을 미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국내에서는 그 동안 라투르가 쓴 논문이 번역되거나 '행위자-연결망 이론'을 소개하는 글들이 몇 편 발표된 적은 있지만, 그가 저술한 책이 번역 출간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그 의미가 크다.

▲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브뤼노 라투르 지음, 홍철기 옮김, 갈무리 펴냄). ⓒ프레시안
이번에 국내에 번역 출간된 <근대인>의 서두에서 라투르는 1989년에 세계가 두 가지의 위기를 맞았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베를린장벽의 붕괴로 상징되는 사회주의의 위기이고, 다른 하나는 그 해 처음 유럽 여러 도시에서 열렸던 지구적 환경회의들이 상징하는 자연주의의 위기이다. 전자는 얼핏 자본주의의 승리를 나타내는 듯 보였지만, 후자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정복이 실패하였음을 드러내며 자본주의 역시 위기에 빠졌음을 보여 주었다. 이 동시적 위기의 원인과 처방을 찾는 것이 <근대인>의 전체 내용을 이루고 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라투르는 그 위기의 원인은 '근대적 헌법'이 지닌 이중적 모순에서 비롯된다고 진단한다.

그가 말하는 '근대적 헌법'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근대인의 인식과 실천을 지배하는 원칙을 일종의 권력분립 제도로 비유한 것인데, 첫째는 인간 대 비인간의 이분법이고 둘째는 정화의 실천과 번역(=매개)의 실천 사이의 이분법이다. 근대인은 인간 존재와 비인간 존재를 철저히 구분하고 분리하면서 순수하게 인간만으로 이루어진 사회, 순수하게 비인간만으로 이루어진 자연이라는 이원적 존재론을 신봉한다. 이것이 바로 '정화'의 실천이다. 반면에 그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인간과 비인간을 끊임없이 결합시켜 하이브리드들을 창조해내는 행위를 하는데, 이것이 '번역'의 실천이다. 이는 전근대인들도 항상 해왔던 일이며 오늘날은 이것이 주로 과학과 기술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근대인의 모순은 정화의 실천과 번역의 실천이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라고 라투르는 강조한다. 근대인들은 정화의 실천을 통해 자신은 비인간과 인간, 자연과 사회를 구분 못했던 전근대인들의 비합리성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났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합리적 활동이라고 생각하는 과학과 기술을 통해 하이브리드들을 지속적으로 창조함으로써, 사실은 전근대인들과 연장선 상에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근대인이 정화의 실천 때문에 이 하이브리드들에게 적절한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하지 않고 무시해왔다는 것이다. 그 결과 하이브리드들은 오히려 아무런 규제도 받지 않고 무한정으로 증식되어 왔으며, 이것이 결국 오늘날 생태적 위기가 초래된 원인이라는 것이다. 정화의 실천이 없었던 전근대인에게는 그런 위기가 있지 않았음에 반하여.

이러한 모순을 지니는 '근대적 헌법'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과학기술학자인 스티븐 셰이핀과 사이먼 샤퍼가 공저하여 1985년 출간한 책 <리바이어던과 공기펌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라투르는 지적한다. 이 책에서 셰이핀과 샤퍼는 17세기 중반 영국이 시민혁명과 왕정복고로 혼란스러운 시기에 토마스 홉스와 로버트 보일 사이에 있었던 과학논쟁의 복합적 성격을 분석하고 있다. 홉스와 보일은 모두 군주, 의회, 순종적이고 통일된 교회를 원했고, 기계론 철학을 신봉한 합리주의자였지만, 지식 또는 진리가 어떻게 산출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의견이 대립하였다. 홉스는 수학적 합리성만이 진리를 산출한다고 믿었던 반면에, 보일은 실험을 통해 진공이라는 자연적 사실이 존재함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홉스는 시민들의 계산에 의해 도달되는 사회계약과 그것을 근거로 성립되는 주권자 리바이어던을 제외하고서 사회의 어디에서도 진리가 산출되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즉 권력과 지식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진공(자연)을 인정하게 되면 이는 신처럼 주권자가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존재를 다시 한번 인정하는 셈이 되고, 결국 이는 사회의 분열과 저항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보일은 실험에서 인간의 편견이 없는 비인간 사물의 증언을 기록함으로써 정치와 확고히 구분되는 자연적 사실의 세계가 있음을 보이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견이 허용되는 사회적 공간의 확립이 오히려 질서를 유지하는 데 유리하다는 점을 설득함으로써 과학자들의 활동 공간인 왕립학회를 인정받고자 하였다. 이 논쟁에서 보일이 승리함으로써 과학과 정치는 확고히 분리되었는데, 더 중요한 점은 이 두 사람에 의해 자연(비인간)에 대한 과학적 재현과 사회(인간)에 대한 정치적 재현이라는 근대적 헌법이 마련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라투르는 홉스와 보일에 의해 생겨난 자연/사회의 구분이 칸트에 와서는 객체/주체로 완전히 분리되었으며, 이후 헤겔과 현상학 그리고 하버마스와 탈근대주의자들에 의해 점점 더 그 간극이 넓혀져 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렇게 정화 작업이 심화될수록 그 밑에서 하이브리드들의 증식 즉 매개 작업은 촉진되며, 역으로 하이브리드들이 증식될수록 자연/사회의 양극은 점점 더 거리가 벌어지게 된다. 이것이 근대의 역설이다. 근대인은 초월적인 자연과 자유로운 사회라는 관념으로 인해 인간과 비인간의 아무런 결합도 유보하거나 배제하지 않았고 그 덕분에 하이브리드들의 대규모 팽창을 이루었다. 반면에 전근대인은 항상 자연과 사회의 결합을 조심스레 숙고함으로써 하이브리드들을 최대한 억제하였다.

처음에는 근대인이 전근대인에 비해 성공한 자처럼 보였으나 생태적 위기는 이에 깊은 의문을 던지고 있다. 인간과 비인간을 너무 광범위하게 동원한 결과 확대 재생산되는 수많은 하이브리드들이 생겨남으로써, 이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근대적 헌법이 통제권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근대적 헌법은 하이브리드들을 과학기술의 실험재료로는 허용하면서도 이들이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은폐한 결과로 침몰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정체를 올바로 이해하고 수용하기 위한 존재론적 공간을 마련해줄 필요가 있다고 라투르는 주장한다. 그것은 근대적 차원(즉 정화 작업을 나타내는 수평축)이 아닌 새로운 공간으로서, 근대적 차원의 중간지대에서 수직축(즉 매개 작업을 나타내는 축)을 이루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를 라투르는 '비근대적' 차원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근대인이 처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라투르의 처방은 무엇인가? 그는 근대인이 저지른 잘못이 크기는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처럼 이를 자본주의, 제국주의, 과학, 기술, 지배 등 총체적 체계로 간주하여 책임을 묻는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그리하면 그 체계를 종식시키려는 총체적 혁명을 추구하게 되고, 그러한 혁명을 수행하는 데 총체적으로 실패하자 총체적인 탈근대적 절망에 사로잡히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문제의 원인은 난공불락의 총체성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취약하고 수정가능한 하이브리드들과 이를 만들어낸 매개 작업들에 있었다고 보면, 이를 재구성하는 데서 해결책을 찾는 것이 훨씬 낫고 현실적이라고 라투르는 진단한다. 이를 위해 그는 근대적 헌법과 대조되는 원리를 지닌 비근대적 헌법을 확립할 것을 제안한다.

비근대적 헌법은 총체적 혁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근대인과 전근대인 그리고 탈근대인 각각에서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버림으로써 만들어질 수 있다고 그는 본다. 예컨대 근대인으로부터 자연/사회의 분리는 버리되 행위의 대규모성은 취하고, 전근대인으로부터 규모 한계와 자문화중심주의는 버리되 비인간들에 대한 명시적 인식과 증식은 취하며, 탈근대인으로부터 근대주의에 대한 믿음과 비판적 해체는 버리되 구성주의와 성찰성은 취하자는 것이다. 그 결과 탄생하는 비근대적 헌법은 단일한 대자연과 대사회의 분리가 아니라 인간-비인간 연결망들로서의 작은 자연들과 사회들이 매개 작업에 의해 공동 생산되는 것을 보장한다. 또한 이러한 하이브리드들의 생산은 명시적이고 집합적이 됨으로써 그 생산의 속도를 조절하고 늦출 수 있는 확장된 민주주의의 대상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라투르는 '사물의 의회'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것은 오늘날 과학과 기술에 의해 창조되는 사물들을 위한 정치적 대표를 인정하여 민주주의를 사물에까지 확장하자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 하이브리드 사물들의 생산은 조절되고 재지향이 될 수 있다고 그는 보는 것이다.

이 책에서 라투르가 주장하는 바는 물론 서구의 경험에 기반하고 있지만, 오늘날 서구가 근대주의에 대한 낙관적 믿음을 상실하고 앞으로 나아가길 주저하고 있는 데 반해 아직도 근대주의를 철저하게 신봉하며 극단적으로 밀고나가고 있는 우리나라에 주는 시사점이 더 크다는 생각도 든다. 기후변화에 대한 우려는 물론이고 대운하, 원자력 발전소, 유전자 조작 식품, 광우병, 줄기세포, 나노기술 등 사회기술적 논쟁들이 이미 우리나라에도 빈번한 것이 현실인데, 국내의 근대주의자들은 과학기술이 객관적 합리성의 산물로서 경제 성장의 도구임을 철저히 신봉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은 단지 자연의 반영이 아니며 불확실성과 인간적 성격을 반드시 내포하고 있음을 전혀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산물을 정치와 무관한 객체로 보면서 아무 민주적 토론이 없이 무제한 생산할 때 이른바 '위험사회'가 심화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또 라투르의 책은 사물과 과학기술을 사회의 외적 요인으로 취급하면서 자신의 연구 대상으로 삼지 않는 기존의 사회과학에 대하여서도 경종을 울린다. 사회는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인간들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을 통해) 비인간 사물들을 내부 요소로 끌어들여 그 내구성과 규모를 지속적으로 증대시켜 왔음을 라투르는 강조한다. 단적인 예로 원숭이 사회와 인간 사회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간 사회는 비인간 사물이 없이는 거의 한 순간도 지탱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비인간들과 분리된 인간들만의 사회가 있는 것처럼 상정하고 이것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기존의 사회과학은 자연/사회의 이분법에 안주하는 근대주의의 또 다른 모습에 다름 아니다. 인간들과 비인간들이 역동적으로 결합되어 만들어지는 집합체 또는 공동세계를 연구대상으로 삼는 비근대적 차원의 사회과학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점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번역에 대하여서도 한마디를 덧붙이고자 한다. 난해하기로 소문난 라투르의 책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번역하여 소개한 노고에 대해서 우선 감사한다. 라투르의 사상과 어휘를 소화하여 우리말로 옮기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도 전체적으로 비교적 큰 오역이 없는 것으로 보여서 필자도 안도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말 문장이 어색하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여기 저기 있어서 책의 원문을 보고서야 뜻을 알게 된다든가, 단어의 번역이 의아스럽거나 일관성이 없는 것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예컨대 'imbroglio'를 혼합체가 아닌 '난맥상'으로 번역한다거나, 'reality'를 실재가 아닌 '실제' 또는 '현실'로, 인명인 'Callon'을 '깔롱'과 '칼론' 또는 '칼롱'으로, 그리고 정화 작업과 매개 작업을 각각 '정화 작용'과 '매개 작용'으로 번역한 것 등은 아쉽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이 정도의 아쉬움은 라투르의 책을 우리말로 처음 읽게 된 반가움에 비하면 작은 편에 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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