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한국 최초 의사는 왜 '개업'을 하지 않았나"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한국 최초 의사는 왜 '개업'을 하지 않았나"

[의학사 산책] 한국 최초의 의사는 누구인가?

한국 최초의 의사는 누구일까? 환웅? 허준? 서재필? 그 대답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이 글에서는 서양 의학이라는 견지에서 누가 최초의 한국인 의사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1886년 3월 29일 제중원의학교에서 시작된 한국 최초의 서양식 의학 교육은 사회적 여건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그와 관련된 의료 선교사, 조선 정부, 의학생들 모두 부족한 점이 많았다. 따라서 의학 교육은 원활하게 지속되지 못했고, 결국 '의사 배출'이라는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이러는 사이 몇몇 한국인들이 미국과 일본에서 의사가 되어 귀국했다. 서재필은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후 미국으로 망명해 의사가 되었고, 김점동(박에스더)과 오긍선은 선교사의 후원으로 미국에서 의사가 돼 돌아왔다. 일본에서 의사가 된 김익남, 안상호, 박종환은 관립일어학교를 졸업한 사람들로서 조선 정부가 일본으로 유학을 보낸 학생들이었다.

▲ 1898년의 서재필(왼쪽)과 그가 1929년 <세브란스교우회>에 기고한 '내가 의학을 학득한 이유'. ⓒ동은의학박물관

서재필과 김익남

우선 서재필(1864~1951)의 경우를 살펴보자. 그는 김옥균의 권유로 1883년 일본 도쿄의 도야마육군학교에 입학하여 1년 동안 현대적 군사훈련을 공부하고 1884년 7월 졸업 후 귀국하여 조련국의 사관장이 되었다.

그는 김옥균, 홍영식 등과 함께 갑신정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병조참판 겸 후영영관에 임명되었으나, 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하지만 일본인들의 냉대로 그는 제중원이 설립될 즈음인 1885년 4월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서재필은 1886년 9월 펜실베이니아 주 윌크스 배리에 있는 해리 힐맨고등학교에 입학해 1889년 6월 졸업했다. 졸업할 당시 그는 이미 미국 국적을 취득한 상태였다. 그 해 9월 펜실베이니아 주의 라파예트대학에 들어가 법률학을 공부하다가 중국의 쑨원처럼 의사가 되기 위해 1889년 컬럼비아의과대학(지금의 조지워싱턴의과대학) 야간부에 입학하였다. 1892년 6월 이 대학을 졸업한 서재필은 한국인 최초의 의사가 되었다. 1895년 12월 말과 1947년 7월 1일에 귀국을 하였지만 그는 의사로서 활동하지 않았다.

[자료] 내가 의학을 학득한 이유

내가 대학 보통과를 필한 후에 법률로 출세할 생각으로 현재 조지 워싱턴대학교의 전신이 되는 콜롬비아대학교 법과로 입학하였습니다. 내가 당시 군의학교 내의 도서실과 표본실에 취직하고 있던 관계상 자연 의학서적과 해부학적으로 병리학적 재료의 다양다종을 접촉하는 호기회가 있었으므로 나의 의학에 대한 취미가 환기되었습니다. 고로 나는 법학 대신 의학을 배우기로 작정하고 이듬해에 그 대학 의과로 전학하였습니다.

한편, 김익남(1870~1937)은 어려서부터 한문을 배웠으며 20세가 되던 1890년 3월까지 3년 동안 집에서 한의학을 배웠다. 1894년 9월 10일 관립일어학교에 입학한 그는 학부로부터 일본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1896년 1월 12일 도쿄자혜의원의학교에 입학하여 1897년 7월 30일 의학 전기를 수료하였고, 9월 12일 의학 후기 과정에 들어가 9월 15일부터 내과, 외과, 안과의 실지견습수술을 배운 후 1899년 7월 30일 졸업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본에서 개업할 생각이 없어 졸업시험을 치루지 않았기 때문에 의술개업인허장을 받지 못하였다. 1899년 8월 10일부터 도쿄자혜의원의 당직의사로 근무를 시작하였지만 1900년 8월 귀국하였다.

의학교 교관으로 활동하던 김익남은 1904년 9월 23일자로 교관을 사임함과 동시에 육군 3등 군의장으로 임명되어 군부 의무국 제1과장으로 보임되었고 1905년 4월 22일에는 육군 2등 군의장으로 승진하면서 한말 한국군의 대표적인 군의로 성장하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서재필은 미국 국적을 가진 상태에서 의사가 되었기 때문에 최초의 한국인 의사라는 견해가 있다. 그 대신 김익남을 최초의 의사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익남은 일본에서 개업할 생각이 없어 졸업 시험을 치루지 않아 의술개업인허장이 없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그를 근대적 의사라고 보기는 어렵다.

▲ 김익남(왼쪽)과 그의 관원 이력서. ⓒ국사편찬위원회

선교사들의 후원

미국에서 의사가 된 사람들 중 서재필과는 다른 경로를 거친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다.

▲ 김점동(박에스더). ⓒ동은의학박물관
한국 최초의 여의사 김점동(1876~1910)은 세례명이 에스더였고, 박유산과 결혼하면서 박에스더로 불리게 되었다. 그녀는 부친이 미 북감리회의 선교사 아펜젤러의 집에서 잡무를 보게 된 것을 계기로 1886년 11월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수학하게 된다. 그녀는 1890년 10월에 내한한 로제타 셔우드의 통역 일을 맡았는데, 로제타는 보구녀관에서 기초의학을 가르치는 의학반에 박에스더를 입학시켜 각별한 관심으로 그녀를 지도했다. 그러던 중 남편 윌리암이 사망하여 1894년 12월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 로제타는 박에스더를 동반하였다.

박에스더는 1896년 10월 1일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현 존스홉킨스대학교)에 입학하여 1900년 6월에 졸업하였다. 그녀는 같은 해 11월에 귀국하여 보구녀관에서 의료 활동을 시작하였고 1903년부터는 평양의 기홀병원에서 근무하였다. 그녀는 10개월 동안 3000명 이상의 환자를 치료하는 등 활발한 진료 활동을 벌였으나 과중한 진료 업무 속에 몸이 허약해져 1909년 결핵에 걸렸고, 1910년 4월 13일 아깝게도 35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오긍선(1878~1963)은 한학을 수료하고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1896년 10월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그는 독립협회와 협성회에서 활동하였는데, 1898년 12월 서재필이 추방당하고 독립협회가 해체되면서 수많은 간부들이 투옥되자 1899년 1월 검거를 피해 침례교 선교사 스테드만(F. W. Steadman) 목사 집에 피신하였다.

▲ 오긍선. ⓒ동은의학박물관
오긍선은 스테드만에게 한국어를 가르쳤으며, 그를 따라 공주로 내려가 선교 활동을 도왔다. 그러나 스테드만은 동경으로 떠나게 되었고, 오긍선은 군산 예수교병원장으로 막 부임한 미 남장로회의 알렉산더(A. J. A. Alexander)를 소개받아 그의 한국어 선생이 되었다. 6개월 후 알렉산더의 부친이 사망하여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자 오긍선은 1902년 1월 그를 따라 도미하였다.

오긍선은 켄터키 주 덴빌에 있는 센트럴대학에 입학하여 1904년 3월까지 2년 동안 의학에 필요한 기초 과목인 영어, 수학, 생물학, 물리학, 화학 등을 공부하였다. 이어서 그는 루이빌의과대학에 편입하여 1907년 3월 졸업했고, 그 후 6개월 동안 인턴 수련을 받으며 피부과학을 연구하였다. 그는 미 남장로회의 의료선교사로 임명되어 1907년 11월 귀국하였으며, 호남지방에서 활동하다가 1912년 5월 세브란스병원의학교의 교수로 취임하였다.

관립일어학교 졸업생들의 일본 유학

김익남에 이어 관립일어학교 졸업생 몇 명이 일본에 유학하여 의사가 되었다.

안상호(1874~1927)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 상경하여 마포의 친척 집에 의탁하면서 1894년 관립일어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명동에 있던 한성병원의 와다 야치호(和田八千穗) 원장을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일본 유학을 권유받은 안상호는 1896년 정부 유학생으로서 일본 유학의 길에 올랐다.

▲ 안상호의 <신편생리학교과서 전>(1909). ⓒ동은의학박물관
그는 1898년 11월 초 4년제인 도쿄자혜의원의학교에 입학하였고, 1902년 7월 졸업에 앞서 의술개업 시험에 합격했다. 이는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일본에서 개업할 권리를 얻은 것이었다. 1902년부터 부속병원에서 일을 하던 안상호는 1903년 의친왕의 왕진 요청을 받은 이후 의친왕을 보필하게 되었다.

그는 1907년 3월 21일에 귀국하여 종로에 개업을 하면서 1910년부터 전의로 활동하였다. 1919년 1월 22일 고종 태황제가 덕수궁 함녕전에서 뇌출혈로 쓰러지자 당직의사였던 그는 일본인 의사 모리야스 랜키치(森安連吉)와 함께 진료하였는데, 끝내 생명을 구하지는 못했다. 이로 인해 그는 일본인의 사주로 고종에게 독약을 투약했다는 등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소문에 둘러싸여 있다.

박종환(朴宗桓, 1878~?)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1899년경 4년제인 제1고등학교 의학교에 입학하여 1903년 7월 제1고등학교 의학교가 개칭된 지바의학전문학교(千葉醫學專門學校)를 졸업했으며, 졸업 후 병원에서 임상훈련을 마치고 1905년 12월 귀국하였다. 그는 1908년 안상호의 권유로 궁내부 전의로 임명되었다.

그는 일본에 유학을 하면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는 1909년 손병희 등 다수의 천도교 신자가 관계된 총리대신 이완용 모살미수사건에 연루되었고 결국 1910년 3월 17일 전의의 직에서 해임되었다. 1913년 천도교는 부속병원을 설립할 계획을 발표했는데, 천도교 신자인 박종환이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928년에는 경기도 이천군 읍내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후 활동은 알려져 있지 않다.

최초로 개원한 박일근

박일근(1872~?)은, 비록 정규 의학교를 졸업하지는 않았으나, 최초의 한국인 개업의였다. 그는 1890년 8월 일본인 의사 이노우에(井上太郞)로부터 의학을 배우다가 일본 나가사키로 건너가 1892년 4월 구마모토현에 있는 교토구(行德健男) 병원의 의학교육 과정에 입학하여 6년 동안 의학을 배웠다. 의학 공부가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했다고 느낀 박일근은 1897년 5월 귀국하여 1898년 3월 서울 교동에서 제생의원(濟生醫院)이라는 이름의 병원을 개원하였다.

이상과 같이 1886년 한국에서 처음 시작된 의학교육이 뚜렷한 열매를 매지 못하는 사이 몇 명의 한국인들이 미국과 일본에서 의사가 되었다. 그중에서 김익남과 오긍선처럼 후진 양성에 참여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선교부 병원 혹은 개인 병원에서 진료를 담당하였다.

▲ 박일근의 자서전 <계은자술>(왼쪽)과 1898년 <황성신문>에 낸 개업 광고. ⓒ동은의학박물관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