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도 안 되는 세미나에 서툰 지혜를 사용하느라 한참을 애쓰다 귀가하는 어느 날이었다. 무식하면 몸이 고생한다고 했던가. 그래도 한참을 애쓰고 난 뒤라 귀가 시간이 참으로 꿀맛 같았다. 더욱이 같이 애쓰시던 동료 선생님과 함께하는 귀가는 언제나 즐거운 담소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런데 정문 앞에 이르자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정보가 귀에 들어온다. 최근 새로 공사한 교문의 구조가 여러 가지 반발과 비판에 부딪히자, 학교 측에서 교문 공사를 다시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시에서 약 80억 원을 지원 받고 시공사에서 40억 원을 대는 것으로 해서 말이다.
120억 원!
여간해선 요즘 이 돈은 돈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내가 가질 수 없는 액수에 대해 너무 무감각해진 듯하여, '내 연봉이 120억 원이라면 어떨까?'하고 생각을 해보았다.
음……. 잠깐 동안 한 생각이지만, 그 시간은 귀가의 즐거움을 앗아가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니까 이 원인 모를 불쾌함은 처음에 120억 원을 '양'으로 생각했던 데서, 이를 내 노동이자 삶의 보상인 연봉이라는 나만의 '질'로 바꿔 생각하자마자 발생한 것이었다.
사실 내가 들은 말이 사실인지 허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흔히 떠도는 헛소문을 주워들은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 귀는 주변에서 무심히 듣게 되는 행정 착오 또는 부실공사 등으로 인해 낭비되는 수많은 유령같은 돈들에 대한 소문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이다. 이 돈들이 많은 사람들의 감각을 무디게 하고선 엉뚱한 다수의 호주머니에서 빠져나와 또 다른 소수의 호주머니로 옮겨간다는 사실이 귀가를 편치 않게 했던 셈이다.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남의 돈으로 자신의 후덕함을 자랑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누구의 후덕함을 위해 희생되고 있는 것일까?
적어도 대학만 놓고 보자면, 높은 등록금 때문에 방학과 학기를 모두 아르바이트로 보내야하는 학생들 그리고 낮은 수당을 받으며 대학 강의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시간강사(비정규교수)들 아닐까? 약자의 삶을 무심히 지나쳐버리는 수많은 유령들, 이 유령을 깨우는 '악마의 맷돌들'.
이쯤 되니, 서툰 인문학자의 상상력이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착한 행정을 통해 남은 예산들을 사회적 약자에게 환원하고 이렇게 한 행정부서나 기업에게 합당한 포상(보상)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따위 서투른 상상력에는 항상 빈틈이 있다. 그게 바늘구멍이면 좋겠지만, 언제나 그 구멍은 황소가 드나드는 구멍이다. 왜냐하면 이런 것도 결국 제도에 불과하므로 제도적으로 인정된 약자만이 이런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사실 강사는 법과 제도적으로 보상받을 수 없는 처지에 있다. 더욱이 '강사'는 비정규직 보호법의 보호 대상이 아니다. 그러니 시간강사는 제도라는 안경을 써서는 절대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존재'인 셈이다. 함께 살고 있지만, 절대 보이지 않는 존재. 제도적인 '내부'에서는 존재감 제로를 자랑하는 존재, (아감벤 식으로 말하자면) 배제라는 방식으로 포함된 바로 그 존재가 강사라는 말이다. 교문 앞에 이르자 이런 생각이 물밀듯 밀려온 것이다.
니체가 말을 붙들고 울며 미쳐갔다고 했던가? 나는 니체 정도의 고수는 아니라서 그가 왜 그렇게 미쳐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교문이 니체가 붙들었던 말의 이미지와 겹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한 번 드리워진 잡념의 그림자가 귀가하는 길 내내 마음을 육중하게 누르고 있었다. 나의 귀가 시간은 그렇게 가위에 눌려 버리고 말았다. 비가시적 존재, 시간강사 그리고 끊어지지 않을 것 같은 불쾌한 귀가의 연쇄.
비극이 이어지지 않기를 원하는 어느 시간강사로부터(비가시적 존재에게 이름이 붙어있을 리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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