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큰 매듭
한국인에게는 "한"(恨)이라는 고유한 정서가 있다는 주장이 있다. 그래서 "한의 문화"라는 문구까지 만들어져서 종종 사용된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한글판에서는 이렇게 풀어놨다. "한은 가장 한국적인 슬픔의 정서이다. 다른 민족에는 원(怨)의 정서는 있어도 한과 부합하는 정서는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다. 한국의 한과 다른 민족의 원의 차이는 그것을 어떻게 푸느냐는 방법에 있다. 즉 원은 그 가해자에게 같거나 비슷한 복수를 함으로써 풀어지는 데 반해 한은 여러 가지 이유로 복수를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으며, 다른 방법으로 가슴 속에 맺힌 응어리를 푼다. 한의 피해자가 복수를 하지 못하는 것은 그가 정치적·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이며, 복수를 하지 않는 것은 그가 속한 문화가 잔인한 복수의 정서를 비교적 적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이라는 정서에게도 존재의 이유가 있다고 보는 이런 발상이 어디선가는 유용하게 쓰일 수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것이 백해무익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정치의식에서는 하루 빨리 불식해야 할 발상이다. 한이라는 정서에서 "한국적"인 정체성을 찾을 일이 아니라 애당초 한이라는 것 자체를 털어버리고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국정치가 질적으로 개선될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나는 확신한다. 무엇보다 불의나 피해를 당했을 때 원한은 오직 잔인한 복수로만 풀 수 있다는 발상이 유치하고 편협하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정의와 불의의 구분이 도덕에 기반을 둔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제4부에서 길게 논의했듯이 도덕적 진리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따지게 되면 결국 끝없는 논쟁에 빠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문명사회에서는 도덕과 사법을 엄밀하게 구분하고, 의도보다 행태에 처벌의 과녁을 맞추며, 복수보다는 사회평화에 목적을 둔다. 정의란 개인적인 영역에 속한 사항이 아니라 오직 공동체의 자산이므로, 어떤 행위를 불의로 보느냐 그리고 불의를 저지른 주체를 어떻게 처벌하느냐는 등의 판단을 내릴 권한은 오직 공동체에게만 속한다. 위에 인용한 『브리태니커』의 해설은 정치적 공동체와 정의 사이의 내면적인 연관에 관한 이와 같은 이해와 전혀 접촉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적 공동체라는 것이 이웃과 더불어 공유하는 가치를 추구하기 위한 인공적 수단이라는 사회계약론적 발상이 깃들지 못하고, 정치권력과 깡패권력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정치를 원천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다.
최소한 이천년 가까이 정치의 역사라는 것이 그런 식이었다고 보면 인민의 마음 깊은 곳에 공적 자산으로서 정의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것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부터도 계속 그 모양으로, 무슨 일을 당했을 때마다 풀지도 못하고 용서도 못한 채, 정의의 실현에 관해서는 포기하면서 동시에 한은 한대로 품고 살아야 할 필요는 전혀 없다. 이웃과의 협력이나 연대를 통해서 공동체 차원의 정의를 확립할 수 있는 길이 우리에게 활짝 열려있는 것이다. 문제는 분풀이라는 것이 얼마나 미숙하고 유치한지를 깨닫고, 그 대신에 정의와 사회평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데에 있다. 내가 지금까지 작게는 명목척도와 순서척도의 차이를 강조하고, 크게는 사회현상을 이해함에 있어서 다차원적 시각의 중요성을 역설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개인적인 위신충족이나 복수심에서 벗어나 사회전체의 평화와 발전을 지향하는 안목이 생기기 위해서는 주어진 주제에 관해 여러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야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나 자신의 감정과 원한 자체를 상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거부-분노-흥정-침울-수용이라는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쿠블러-로스(Elisabeth Kübler-Ross)는 정리한 바 있다. 이는 죽음에 맞닥뜨린 사람들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원한의 다섯 단계라고 일컬어진다 (☞ "Kübler-Ross Model"). 정치사회경제적으로 맘에 안 드는 일을 만났을 때도 사람들은 대개 가장 먼저 거부와 분노의 반응을 보인다. 즉, "그럴 리 없다" 또는 "그까짓 거 무시해도 돼" 등이 거부고, "어떻게 그런 일이", "왜 나만 이런 일을 당하는 거야" 따위가 분노다. 죽음의 경우에는 흥정해보려고 해도 안 되니까 침울의 단계를 거친 다음에나 수용이 되지만, 정치사회경제적인 문제들은 거의 모든 경우에 흥정이 가능하다. 괘씸한 상대를 속 시원하게 응징하겠다는 생각에만 집착하지 않고, 응징하지 못하면 남들에게 우습게 보이리라는 불안감에만 휘둘리지 말고, 나에게 무엇이 실제로 이익인지에만 초점을 맞춰서 생각한다면 대부분의 정치적 쟁점들은 흥정에 의해서 해결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갈등을 그때그때 정리하고 넘어감으로써 원한의 응어리와 앙금이 누적되는 폐해를 피할 수 있다는 점만 쳐도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사회적 덕성임이 분명하다.
보기 싫은 일을 자기 맘대로 거부하거나 무시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은 전능한 초월자가 아니라면 무자비한 폭군을 부러워하는 셈이다. 문명사회의 시민은 보통 상대를 자기 맘대로 거부하거나 무시하기보다는 뭔가를 서로 주고받는 상호작용 속에서 살아간다. 상대가 어이없는 요구를 한다면 거절하는 것이지만, 그것만으로 차후 모든 협상의 여지를 닫아버리지는 않는다. 즉, 특정한 요구를 거부하거나 무시할 수는 있지만 상대방의 존재 자체에 대해 그렇게 하지는 않는 것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그런 뜻이다. 지금까지 어떤 악행을 했더라도, 그 악행만큼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정해진 처벌은 가해져야 하지만, 장차 개과천선해서 사회질서에 협조할 가능성은 열어두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 문화에서는 어떤 문제가 인식되었을 때 하나의 결정적인 원인을 찾아 제거하면 끝난다는 발상이 통념을 깊게 지배한다. 제2부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지역주의"에다가 한국정치의 문제를 몽땅 뒤집어씌우거나, 한국 경제체제의 문제가 "신자유주의"로 요약된다고 보는 태도 등이 두드러진 사례다. 이런 태도는 숭례문 화재의 책임을 유홍준에게 묻고, 군대에서 사고가 나면 사단장에게 책임을 물으며, 태풍과 같은 천재지변 때마다 "인재"(人災)를 탓하는 고질적인 습관으로 쉽게 연결된다. 어떤 경우에 한 개인에게 잘못이 귀책되는 경우는 분명히 있다. 그렇지만 제4부에서 논의했듯이, 현재 한국 정치체제가 시스템의 차원에서 드러내고 있는 문제들은 사회의 전반적인 사유형식과 생활방식이 달라져야 해결될 수 있는 것이지 단순히 몇 사람을 지목해서 혼쭐내는 마녀사냥으로 풀릴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지금까지 이 연재에서 한국정치의 진보를 위해 우리사회의 지배적인 사유형식이 바뀌어야 할 대목들을 제시했다. 내가 주로 비판한 요지는 언어의 표피 수준에 머무르는 가짜문제와 마녀사냥, 합리성을 지나치게 단순한 도식으로 파악하는 바람에 구체성이 결여된 채 말로만 무성한 각종 구호들, 개인적 감성적 느낌을 사회적 매개 없이 곧 바로 도덕적 기준으로 연결하는 탓으로 빚어지는 교조주의 성향들, 그리고 민족주의를 신비화한 데서 연유하는 말초적이고 경직적인 우리/저들의 구분 등이다. 어떤 사회에서나 이런 식으로 사유하는 사람들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비율로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데까지는 현재 인류가 도달한 지성, 감성, 덕성의 수준에서 누구나 인정해야 하리라고 본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비율이 무시해도 좋을 정도까지 내려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한국 사회에 대해서 기대하는 상태는 저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온전하게 보수층으로 분류되고, 저런 폐쇄적인 정신상태에서 대체로 벗어난 사람들이 진보세력을 구성하는 상황이다. 진보의 리더십이 열린 마음에 의해서 인도되어야 풍성한 상상력과 엄밀한 현실감각이 조화를 이뤄서 미래를 열어나갈 실제적 추동력이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뉴시스 |
그런데 현재 한국사회에 관해서 말하자면, 보수세력은 두말 할 나위가 없고 진보세력에 속하는 사람들 다수마저도 폐쇄적이고 경직적이며 가식적인 사고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맘에 들지 않는 정치적 현실에 한이 맺힌 경험들이 줄곧 누적되다 보니, 배신감과 좌절감에 진보적 영혼이 너무나 큰 상처를 입어서 미지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조망하면서 기회를 탐색하지 못하고 일단 두려움과 거부감으로 움츠러들면서 과잉방어 태세를 취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사회구조를 질적으로 개선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제도의 변화와 공론의 변화라는 두 차원이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야 하는데, 한국에서 진보를 자임하는 정치의식은 대부분 경직적이고 폐쇄적인 과잉방어 태세에서 시작하는 바람에 제도와 공론이라는 차원을 자주 혼동해서 현실에 대해서 충분히 적응력을 갖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
민주주의란 하나의 제도로 이해한다면 단순히 인민의 선거로 공직자를 선거하는 최소주의적 의미에 그친다. 이 의미의 민주주의는 법령의 정비를 통해서 달성할 수가 있다. 반면에 흔히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통해서 표상되는 이상, 다시 말해 최대주의적으로 해석되는 민주주의는 특정 제도의 이름이 아니라 주어진 제도가 "바람직하게" 작동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런데 어떤 제도이든지 법령의 문구를 통해 "바람직한" 작동을 보장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이것은 어떤 기계장치에 관해서든 제작자가 바람직한 작동을 보장하지 못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정치적 장치이든 기계적 장치이든 바람직한 작동은 오직 실제 작동과정을 통해서 실현되는지 아니면 그렇지 못 하든지로 갈리는 일이다. 기계의 바람직한 작동은 누가 어떻게 조종하고 관리하느냐에 달려있는 일이고, 정치제도의 바람직한 작동은 공론이 어떻게 형성되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느냐에 따라 좌우되는 일일 수밖에 없다.
나는 사회구성원들이 모두 최소한의 생계가 보장되고,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약간의 우아한 생활까지도 가능한 수준의 사회가 바람직하며, 현재 한국의 경제적 역량에 비춰서 실제로 가능하다고 본다. 국가 예산으로 급료를 받는 공직은 상하를 막론하고 지금보다 훨씬 더 기능과 성과 중심으로 개편되어야 마땅하고, 불필요한 번문욕례와 꼬투리잡기용 관료제는 눈에 띄는 대로 즉각 철폐해야 한다고 본다. 보다 창조적인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활동과 성취 자체에서 나오는 보람이 유인과 동기로 작용하므로, 시장에서 획득할 수 있는 보상에 대해서는 가령 70 내지 80%에 이르는 소득세를 거둬도 사회전체의 창조적인 역량이 감소할 리는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하는 일은 없이 놀다가 가끔 앵무새 노릇이나 몸싸움에 가담하는 공로로 직위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사람, 남의 성취에 기생해서 뜯어먹는 사람, 공적 자금 근처에서 편법 또는 탈법을 통해 떡고물을 훔쳐 먹는 사람 등등, 비생산적인 정도를 지나 사회생활의 생산성을 해치는 방식으로 생계를 꾸리는 인종들을 생산적인 노동에 종사하도록 체계적으로 유도한다면, 사회 전체가 대단히 건강한 기풍으로 충만해질 것으로 확신한다.
그러나 이런 차원의 이상은 명시적인 법제를 통해서 달성할 일이 아니라 오직 공론의 질서가 그런 종류의 가치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확립한 다음에나 바랄 수 있는 사항이다. 물론 개별적인 작업장이나 직책과 관련해서 부패나 무능이나 놀고먹기라는 현상이 두드러진다면 법령을 통해 어느 정도까지 개선이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사회 전체의 기풍이 위선보다는 정직, 야만보다는 개명, 전쟁보다는 평화, 파괴보다는 건설, 증오보다는 아량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바뀌는 일은 법령으로만은 절대로 이뤄질 수가 없다.
로베스피에르, 마르크스, 레닌, 체 게바라 등이 추구한 방향의 혁명을 원하는 시각에서 보면 내가 제안하고 있는 방식의 변화는 매우 성에 차지 않고 무척이나 보수적이라고 비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회구조를 질적으로 개선하는 방법으로는 내가 제안하는 방법이 현실이 허용하는 가능성 안에서 가장 실질적으로 진보적이라고 믿는다. 개별적인 정책 대안들을 기존의 절차에 따라서 제시하는 가운데, 공론장에서 토론을 통해서 서서히 그러나 꾸준히 희망에 대한 개명된 확신의 씨앗을 뿌리는 방식이 그것이다.
진보된 세상의 모습에 관해서 말해보라면 입 있는 자는 모두 한 마디씩 거들어서 중구난방을 면할 수 없겠지만, 그 사회가 평화롭고 아름답고 서로 아량과 배려를 주고받는 가운데 자신의 활동과 성취를 통해 보람과 자아정체성을 추구하는 방향이어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사회는 낯선 대상이나 관념에 대해 무작정 낯을 가리면서 방어용 적대감을 드러내기보다는 선의에 이끌린 호기심으로 접근하고, 이웃이 실패했을 때 저주하기보다는 용감한 도전정신에 찬사를 보내는 종류의 사회이기가 쉬울 것이다. 그런데 한국사회의 진보정치의식은 선의, 호기심, 도전정신, 찬사, 아량, 배려, 성취, 보람, 평화, 아름다움 등을 남에게 요구할 때는 쉽게 말하면서도, 자신에 대해 누가 적용하면 일단 고깝고 아니꼽게 반응하는 경향이 대단히 짙다. 진보를 추구한다는 사람들이 "이상은 그럴듯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가장 보수적인 핑계에 너무나 편리하게 안주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정권의 획득을 통해, 5년 내지 10년 정도의 임기를 통해, 현재의 부익부빈익빈 현상을 근본적으로 타파해서 한국사회를 계급적으로나 신분적으로 평등한 사회로 개편하기가 불가능하다. 부분적으로 지금보다 좀더 평등한 사회로는 만들 수가 있겠지만, 예컨대 고위공무원, 법률가, 의사 등의 신분을 선망하는 사회의식은 내가 제안하는 방향의 변화에 현재의 진보세력이 완전히 동감해서 매진하더라도 최소한 두어 세대 이상의 세월이 지나야 기세가 꺾일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래서 이런 차원의 목표는 단기적으로는 개별적인 제도들의 수선에 집중하는 가운데, 장기적으로 공론의 변화가능성에 대한 탐색을 병행해야 하는 것이다. 장기적인 공론의 변화가능성은 개별적으로 개선된 정책의 성과에 따라서 상당한 추동력을 지원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사항은 진보를 자처하는 정치세력이 정치적 경쟁에 임해서 취하는 행동을 통해서 선의와 평화와 아량이 인류사회 개선의 유일한 열쇠라는 강력한 신념을 보여줘야 한다는 점이다. 사회의 진보란 결국 이웃을 신뢰할 수 있는 세상을 향한 프로젝트이며, 이웃에게서 받는 신뢰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만이 이웃을 신뢰하는 선의의 가치를 음미할 수 있는 도덕적, 지성적 역량은 물론이고, 정서적 역량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진보를 추구한다는 사업이 위선에 그치지 않고 조금이나마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질 수 있으려면, 이러한 역량을 몸소 실천해 보임으로써 세상에 씨를 퍼뜨리는 데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시작은 진보운동을 자임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메마르기보다 풍성해지고, 안목이 편협하기보다 너그러워져야 가능한 일이다. 그래야 위신에 집착하지 않고 장기적이고 개명된 공동이익이 어디에 있는지, 나아가 그런 공동이익을 어떻게 나눠가지는 것이 온당한지를 차분하게 찾아낼 수 있는 균형 감각이 가능하다. 요컨대 절차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자유주의의 결합이야말로 현실적으로 책임감 있는 한도 안에서 추구할 수 있는 진보적 이상의 최대치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