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온 지 5년 반 정도가 지나 건강이 나빠진 에비슨 부부는 서울의 다른 선교사들의 권유로 1899년 3월 말 안식년을 얻어 캐나다로 돌아가게 되었다.
평소 제중원은 조선식 건물일 뿐더러 병원으로서의 시설이 미비했었기 때문에 에비슨은 제중원을 어떤 식으로든 개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제중원은 난방은 말할 것도 없고 급수, 하수 시설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또 당시 조선에서는 선교 의사들이 몇 명 있었으나 뿔뿔이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선교 목적을 실현시키기에는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이것의 해결 방안으로 에비슨은 연합 병원의 건설을 생각하고 있었다.
받는 당신의 기쁨보다 주는 나의 기쁨이 더 크다
▲ 세브란스. ⓒ동은의학박물관 |
그가 발표한 내용의 요점은 각 선교 단체에서 서울에 파견된 의사 7명이 각자 진료소를 운영하고 있는데 서로 협력하여 하나의 병원에서 일을 한다면 훨씬 효율적으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마침 그 강연을 들은 클리블랜드의 부호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는 에비슨의 연합 의료기관 설립 계획에 공감을 표시하고, 1만 달러를 기증하였다. 세브란스는 1876년부터 1895년까지 스탠다드 석유회사의 회계 담당자로 근무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으며, 이 회사의 대주주로서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자료] 겸손한 기부자 어느 독지가가 병원 건립을 위해 1만 달러를 기증했다는 소식을 들은 에비슨은 세브란스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이에 대해 세브란스는 "받는 당신의 기쁨보다 주는 나의 기쁨이 더 크다(You are no happier to receive it than I am to give it)"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
순조롭지 않았던 병원 건축
호사다마라고 할까. 기부금을 갖고 돌아온 에비슨은 뜻밖의 암초에 부딪혔다. 우선 평양 지역 선교사들이 전도 사업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병원 건립에는 1만 달러가 아닌 5000달러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평양에서 사용해야 한다고 나선 것이다. 1만 달러를 들여 병원을 지으면 조선인들이 기독교가 자선 단체로 잘못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자칫 서울과 평양의 선교사들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어질 수 있는 사안이었다. 그러나 기부자 세브란스는 "현재 할 일은 병원 건립인데 그것에 5000달러로 충분하다면 나의 기부금도 5000달러로 하겠습니다. 이번 기부금에서는 단 한 푼도 다른 사업에 쓸 수는 없습니다. 물론 복음 전도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지금 지원하려는 것은 병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라고 단호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에비슨은 새 병원을 구리개 제중원 내에 짓고 싶었다. 그런데 새 병원 건립 기금의 기증 소식을 미국 공사 알렌을 통해 전해들은 고종은 새 병원을 지을 대지를 기증하겠다고 나섰고, 1901년 2~3월경 이런 내용이 담긴 고종의 친서가 에비슨에게 도착했다. 그리고 재무담당관인 이용익을 보내어 부지 선정에 협조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에비슨으로서는 건축 경비를 절감할 수 있어 무척 기대가 컸다. 고종의 약속이 곧 실현될 것처럼 보였지만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병원 부지 선정이 자꾸 지연되는 것을 답답히 여긴 세브란스는 1902년 5월 5000달러를 더 보내면서 더 이상 조선 정부에 기대지 말고 속히 병원 대지를 구입할 것을 요청하였다. 동시에 병원 장소는 도심이 아닌 사대문 바깥으로 했으면 하는 강한 희망을 피력했다. 이에 에비슨은 한 번 둘러 본 적이 있는 남대문 밖 남산 기슭의 복숭아골 대지를 선택하였다.
세브란스 기념 병원
▲ 세브란스병원의 건축을 담당한 고든. ⓒ프레시안 |
1902년 11월 27일 추수감사절 날 오후 3시에 주춧돌을 놓는 정초식이 거행되었다. 정초석을 놓은 미국 공사 알렌의 감개는 어떠했겠는가? 자신의 제안으로 설립된 조선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 선교부로 이관된 후 거금을 들여 최신식 병원으로 탈바꿈했으니 말이다.
새 병원 건립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배관 공사였다. 당시 조선에는 배관 작업을 해 본 사람이 없었기에 고든, 에비슨, 김필순이 해결해야 했다. 에비슨은 병원에서 일을 끝내면 즉시 공사장에 달려가 일을 했다. 먼저 하수가 잘 빠지게 지하실 바닥 밑에 타일을 사용하여 하수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일꾼을 시켜 도랑을 파고 설계도대로 관을 넣고 연결 부분을 시멘트로 접합시켰다. 그리고 욕실에서 내려오는 관들을 설치했다. 4인치짜리 철관의 연결에는 납땜을 이용했다. 철관의 길이를 맞추어 끊는 일, 새지 않게 연결하는 일 등 모든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1903년에 들어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11월 제중원의 일본인 간호사 2명이 일본 정부에 의해 소환당하는 등 정세가 매우 불안정해졌고, 건축자재 값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11월의 어느 날 건축업자 해리 장은 계약을 포기했고, 1904년 중반까지 거의 일용직 일꾼을 고용해 공사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 1902년의 정초식 광경과 알렌의 정초식 기념사. ⓒ동은의학박물관 |
에비슨이 이 사실과 함께 공사비가 예상했던 것을 훨씬 초과해 확실하진 않지만 1만 달러가 훨씬 넘을 것이라는 사실을 세브란스에게 알리자 걱정 말고 공사를 진행하라고 회답을 보내왔다. 세브란스는 잘 갖추어진 훌륭한 병원을 원했지 비용은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건물이 완공되기까지 세브란스의 건축 기금 1만 달러, 부지 구입비로 추가 기부한 5000달러, 그리고 뉴욕의 북장로회에서 보낸 1만 달러 등 2만5000달러 이상의 경비가 소요되었다.
드디어 1904년 9월 23일 오후 5시 새 병원의 봉헌식을 올림으로써 조선 최초의 현대식 종합병원 세브란스병원이 문을 열었다. 입원실은 필요에 따라 40개의 침대를 놓을 수 있었고, 격리 병동은 6개의 침대가 놓일 예정이었다. 이날 에비슨 부인이 은제 열쇠로 병원 문을 처음 열었으며 에비슨이 병원을 건립하게 된 경과를 짧게 보고하였다. 이어 마펫과 언더우드 목사가 봉헌식 축사를 했으며, 다시 에비슨이 건축 과정 중에 겪었던 여러 애로점을 설명했다.
▲ 완공 직후의 세브란스병원 전경. ⓒ동은의학박물관 |
한국인들을 빛으로 인도하다
새 병원에서는 10월 4일 처음으로 수술을 시작했는데, '빛으로 인도한다(letting in the light)'는 의미로서 특별히 백내장 환자를 선택하였다. 한편, 정식 개원식은 그해 11월 16일 좋은 날씨 속에 병원 2층의 큰 방에서 열렸다.
1904년 세브란스병원의 새 건물에서 진료를 시작하면서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새로 허스트가 의료진으로 합류했다는 점이다. 그의 합류로 향후 세브란스에서는 중단 없이 진료와 교육이 진행될 수 있었다. 그리고 1908년 제1회 졸업생들이 합류하자 보다 전문적인 진료가 가능하게 되었다.
▲ 1905년 세브란스병원의 직원 일동. ⓒ동은의학박물관 |
1902년의 5000달러가 지금은?
세브란스가 기부한 돈은 지금으로 환산하면 어느 정도가 될까? 시대와 국가에 따라 물건의 가치가 다르기 때문에 세브란스 등이 기부한 2만5000달러를 환산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가 병원대지 구입을 위해 보낸 5000달러를 따져 보자. 그가 보내 준 돈으로 구입한 땅은 약 1만 평이었는데, 현재 이 지역의 1 평방미터는 공시지가가 2200만 원이므로 이를 환산하면 약 6600억 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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