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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리지 않은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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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리지 않은 계절

김민웅의 세상읽기 <145>

두터운 옷을 껴입은 겨울의 전령이 어느새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문턱까지 다가 온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잠시 마음을 풀고 있던 계절의 수문장이 당황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늦가을의 날씨치고는 아침저녁으로 싸늘한 공기가 몸을 움츠러들게 하는 것은, 이제부터인가는 마치 무언가 단단히 준비해야 할 것 같은 긴장을 불러일으킬 징조처럼 여겨집니다. 그래도 낙엽이 아직은 도시를 추억처럼 뒤덮지는 않아 다소간의 안도감마저 듭니다.

한동안 익숙해져 있던 계절을 떠나보낼 때마다 아쉬움도 그렇게 익숙해져 가는가 봅니다. 어떤 계절도 다 자신의 색깔과 개성을 지니고 있는 법이어서, 서로 비교해가며 우열을 따지는 것은 아무래도 부질없는 노릇일 겁니다. 그 계절의 아름다움을 이모저모 발견해서, 그걸 마치 자기 몸의 일부처럼 새겨가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그 계절에 대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예의라고 스스로에게 가르쳐 봅니다.

사실 각기 다른 계절이라고 해도 그걸 하나로 엮으면 결국 세월이고, 계절은 어찌 보면 그 세월의 잘게 쪼갠 시간마디의 표정일 수 있습니다. 길게 보면 하나이고, 미분(微分)의 시선으로 살펴보자면 서로 전혀 다른 존재인 듯 한 것입니다. 혹시 '철학적 적분(積分)'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계산법의 결산이 도달하고 싶은 지점은, 그때 마다 뿜어낼 수 있는 가장 찬란한 색조를 거의 모두 빠짐없이 상실하지 않고 지니고 있는 이의 인생이 아닌가 합니다.

유년의 거침없는 생기는 그 무엇으로도 억제시킬 이유 없는 천상의 축복 같은 발랄함입니다. 그걸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은 언제나 순수의 용기를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소년시절의 꿈과 그 꿈을 시와 음악과 우정으로 나눌 수 있는 힘을 기른, 그 탄력이 풍요한 세월을 성인이 되어서도 되풀이 연마해 온 이는 어른 속에 소년이 사는 법을 아는 쾌활함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청년의 절기에 품은 사랑과 희망이 세월에 여전히 마모되지 않는다면 그는 아라비아의 보석 같은 아름다움이 퇴색되지 않는 영혼의 소유자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지치지 않는 낭만이 있습니다. 중년의 무게가 노쇠와는 다른 힘이 있는 이에게는 젊음에 대한 시기와 경쟁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선 자의 쓸쓸하지 않은 경륜이 품겨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 경륜의 강을 건너는 자는 자신의 성지를 순례하는 거룩한 나그네가 됩니다.

모든 계절을 다 통과한 노년의 때에, 눈앞에서 분명하게 사멸해가는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니라 이러한 축복을 누린 인생에 대한 감사가 그득하면, 그에게는 젊은이들이 결코 따를 수 없는 깊은 미소와 따스한 눈동자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노년은 외롭거나 초라하지 않으며 또한 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마침내 늙음이 도리어 부러움을 사는 성자(聖者)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하여 계절은 지나간 것이 아니라 내 몸 안에 영혼의 문신처럼 새겨져 있는 셈입니다. 손을 흔들고 돌아설 준비를 하며 떠나보낸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다소곳이 불러들인 것입니다. 나의 인생이 곧 그 사계절의 무대입니다. 내 삶의 마디마디가 이제 움터나는 생명의 시작이요, 격렬한 열정의 순간이자, 익고 익어 들판을 바라보는 늦가을의 태양이며 온 몸에 봄을 안고 길러내는 설렘입니다.

그런 이에게는 그 어느 계절도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요, 이루어진 시간의 찬란한 기록이 될 것입니다. 그걸 간직하며 사는 인생은 어느 절기가 찾아와도 생명의 축제를 만끽할 것입니다. 겨울이 와도 내 안에는 가을이 함께 숨쉬고 있을 것입니다.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센타'(오후 4-6시/FM 104.5, www.ebs.co.kr)의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에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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