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던 정부가 결국 예정대로 밀어붙이겠다는 쪽으로 입장을 굳힌 것. 이에 따라 내년에 소득세 최고세율이 35%에서 33%로, 법인세 최고세율이 22%에서 20%로 낮아진다. "감세는 이명박 정부 세제정책의 기본 방향으로 세금을 낮춰 기업이 국제무대에서 경쟁할 수 있게 하고 국민부담도 덜어줘 소비진작에도 기여한다"는 게 재정부의 설명이다.
냉장고 등 4개 가전제품에 개별소비세 부활
▲ 윤증현 장관이 내년 법인세 및 소득세 인하와 관련해 다소 혼란스런 태도를 보이기도 했으나, 재정부는 결국 감세정책을 예정대로 시행한다고 밝혔다. ⓒ뉴시스 |
이명박 정부가 가전제품에 대한 개소세를 부활하는 명분은 에너지 절약. 이명박 정부가 내세운 '녹색성장'과도 부합된다는 설명이다. 에너지 절약이라는 명분에 맞게 정부는 에너지 효율등급을 기준으로 4~5등급 저효율 제품에 개별소비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검토했었다. 그러나 에너지 효율이 떨어질수록 저소득층이 사용하는 저가의 제품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비난 여론이 쏟아졌다. 법인세, 소득세 등 직접세를 깎아주는 '부자감세'로 부족한 세수를 결국 서민들에게 떠넘기려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그래서 대안으로 나온 게 용량을 기준으로 세금을 매기는 방법이다. 고가의 대용량 제품은 부유층이 더 많이 소비한다고 볼 수 있어 '서민 증세' 논란을 피해갈 수 있다. 대용량 기준은 품목별 총 판매금액의 20% 내외를 차지하는 고가 제품으로 TV는 40인치대 후반, 드럼세탁기는 세탁 용량 10kg 이상으로 정해질 것으로 알려졌다. 세율은 최대 8% 정도. 개소세는 결국 제품가격에 포함돼 해당 제품가격이 10만-30만 원 정도 올라갈 것이라는 게 업계의 전망이다.
'명분' 따로 '세금' 따로…자영업자 세부담 증가
재정부는 가전제품에 대한 개소세 부활로 증가한 세수로 에너지 고효율 제품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개소세로 제품가격 인상이 불가피하겠지만 에너지 고효율 제품으로 수요가 이동하는 정책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서민 증세' 논란을 피하기 위해 '용량'을 기준으로 개소세를 매기기로 하면서 과연 의도한 정책 효과를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고가의 대용량 제품은 저가의 저용량 제품에 비해 오히려 에너지 효율이 높다. 정부가 개소세를 매겨 거둬들인 세금을 에너지 고효율 제품에 지원하겠다는 설명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또 용량을 기준으로 해서 '서민 증세' 논란을 피해가려고 하지만 자영업자들의 세금 부담이 늘어나게 됐다는 점에서 완벽하게 논란을 피해갈 수 없다. 자영업자들은 '사치'가 아니라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대용량 제품을 쓸 수밖에 없다.
과연 개소세 부활로 세수가 늘어날지도 의문이다. 안 그래도 경기침체로 가전제품 소비가 줄고 있는데 가격이 올라갈 경우 소비는 더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소비가 줄면 기대했던 만큼의 세수 증대 효과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가전업계는 정부 개소세 부활 방침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이 같은 반론을 펴고 있다.
역진적 세금 부과, 역진적 세출
기준이 '용량'이 됐든, '에너지 효율' 됐든, 제품에 매겨지는 세금은 간접세라는 점에서 역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소득 재분배를 통해 소득 격차를 줄이는 게 세금의 효과 중 하나인데, 오히려 소득 격차를 늘린다는 얘기다.
하지만 세금 부과의 역진성보다 더 중요한 게 세출의 역진성이다. 유럽 국가들은 부가가치세 등 간접세 비중이 미국에 비해 높다. 세금 체계만 놓고 보면 유럽이 미국보다 역진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유럽은 복지 예산 비중이 미국에 비해 훨씬 높다. 세금을 어떻게 거두느냐 보다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자들에게 집중되는 감세정책을 쓰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세출은 어떤가. 재정부는 지난 9일 내년 예산요구안(기금 포함) 298조5000억 원을 발표했다. 이중 보건 · 복지 · 노동분야가 82조1000억 원이다. 올해 정부의 복지지출액 80조4000억 원에 비해 1.7조 원 증가했다. 오건호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은 "작년에 비해 2.1% 늘어난 것으로 물가상승율(3.0%)를 감안하면 실질적으로는 복지 예산이 줄어드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올해 우리 정부의 복지지출은 대략 GDP의 8% 수준으로, OECD 국가 평균 복지지출(GDP 21%)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또 산업 · 중소기업,에너지 분야는 13조6000억 원으로 올해 본예산과 비교해 16.2%나 줄었고 교육분야도 35조7000억 원으로 6.9%가 감소했다.
반면 사회간접자본(SOC)은 26조2000억 원으로 5.7%의 증가율을 보였다. '4대강 살리기' 예산도 6조4000억 원이나 증가했다. SOC, 4대강 살리기 등 대형 토목사업 예산은 대기업 건설사들에게 돌아가는 몫이 크다. 또 토지보상비의 형태로 부동산 투기세력의 주머니에도 일부 들어간다. 정부는 토목사업을 통해 수십만개의 일자리가 창출된다고 주장하지만 저임의 임시 일자리가 대부분이다.
김종인 박사(전 청와대 경제수석)가 최근 <프레시안>과 인터뷰에서 "(세수가 부족하면) 차라리 부가가치세를 올리고 세출에 있어 4대강 사업 등 역진성이 뚜렷한 정책을 포기하라"고 강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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