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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조선 최초의 간호사는 누구일까?"

[의학사 산책] 조선 정부, 제중원에서 손을 떼다

비좁은 재동의 제중원

일반 가옥을 개조하여 만든 제중원은 처음부터 병원으로 적합하지 않았다. 제중원은 시간이 지나면서 환자가 증가하자 진료나 입원에 더 애로를 겪게 되었다. 또 학생 교육이 시작되면서 병원 확장의 필요성도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알렌은 더 넓은 장소로 이전하고자 1886년 8월 14일 <공립병원 이전 확장에 대한 건의서>를 제출하였다. 이 건의서에서 알렌은 병원이 환자를 수용하기에 협소하다는 점, 주민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이용에 불편하다는 점, 병원이 비위생적이라는 점을 이전의 이유로 들었다.

이 건의서의 취지는 병원으로서 제대로 기능하려면 위생적이고 청결한 시설과 많은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알렌은 이에 합당한 부지로 건평이 6700평에 이를 정도로 매우 큰 남별궁(南別宮)이 최적지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새로 이전될 제중원은 이전의 재동 시기보다 몇 배로 확장되는 것이 불가피했음을 알 수 있다.

구리개로 이전하다

▲ 구리개 제중원의 입구. 오른쪽 동양척식회사에서 길을 따라 두 번째에 위치한 골목이 입구였다. ⓒ동은의학박물관
결국 제중원은 1887년 초 구리개로 이전하였다. 구리개 제중원은 현재의 을지로에서 명동성당에 이르는 언덕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부지는 재동의 약 850평에 비해 2~5배 정도 넓은 것이었다. 구리개 제중원도 약 40병상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배치도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여러 건물에 주병동, 대기실, 대진료실, 창고 등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887년 9월 알렌은 주미 한국공사관의 참찬관(參贊官)으로 임명되면서 선교사직을 사임하였다. 알렌에 이어 제중원의 책임을 맡았던 헤론이 1890년 7월 말 이질로 사망하자 제중원의 운영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빈튼에 이어 1893년 11월 에비슨이 제중원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 구리개 제중원. ⓒ동은의학박물관

미국 북장로회의 선교 병원, 제중원

에비슨이 본 제중원은 약국 정도로만 운영되는 상태로 진료 환경이 대단히 열악하였다. 더구나 조선 정부에서 파견한 주사들은 수입을 늘이고자 에비슨이 수술실로 만들려고 준비해 둔 방을 허가 없이 일본인 의사에게 세주기까지 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에비슨은 조선 정부의 관할 아래 제중원을 운영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운영권의 미국 선교부 이관을 추진하였다. 6개월에 걸친 협상 끝에 마침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던 조선 정부는 에비슨의 제안을 수용하고, 1894년 9월말 제중원에서 손을 떼었다.

▲ 에비슨. ⓒ동은의학박물관
이때 미국 선교부는 조선 정부와 협약을 맺었다. 미국 선교부가 구리개의 땅과 건물을 무기한 무료로 사용하되, 서로 필요에 의해 제중원 건물과 대지를 조선 정부에 돌려줄 때 그 동안 대지와 건물의 유지에 들어간 비용을 조선 정부가 지불하기로 한 것이다.

그 동안 이원적으로 운영되던 제중원은 이를 계기로 미국 선교부의 관할로 귀속 이관돼 온전한 사립 선교병원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제중원이 설립된 지 9년 만에 병원의 운영 주체와 방식에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이전의 제중원이 조선 정부와 미국 선교부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병원의 성격을 갖고 있었던 데 반해, 이제부터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가 단독으로 운영하는 민간병원의 성격을 갖게 된 것이다. 동시에 그 동안 금지되었던 선교 활동도 훨씬 더 자유롭게 되었다.

병원의 위치도 의사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다만 행정직을 담당했던 조선인 관리들이 사라진 것일 뿐, 그것이 환자들에게 제중원의 변모로 인식될 리 없었다. 선교사나 조선인에게는 여전히 제중원이었을 뿐이었다.

▲ 1894년 에비슨의 제중원 사직 통보(왼쪽), 제중원을 선교부로 넘기는 1894년 9월 조선 정부의 외교 문서(오른쪽). ⓒ서울대학교 규장각

변함없는 의료 활동

미국 선교부가 제중원의 책임을 맡은 이후 여성 의료인의 합류가 두드러졌다. 1895년에는 여의사 화이팅, 간호사 제이콥슨, 1897년 10월에는 여의사 휠드, 간호사 쉴즈, 12월에는 여의사 휘시가 내한하여 제중원 진료에 참가하였다. 휠드는 1899년 에비슨이 안식년으로 제중원을 비운 사이 운영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빈튼, 하디 역시 에비슨의 공백을 메웠고, 고종의 어의 분쉬는 에비슨의 수술을 도와주기도 하였다.

제중원에서 의료 활동 외에 에비슨과 의료 선교사들은 1895년 콜레라 방역 활동에도 참가하였다. 조선 정부는 콜레라가 서울로 전파될 우려가 있자, 서울의 모든 의사들이 참여하는 방역국을 조직하고 총감독자 한 명을 선정했는데, 바로 에비슨이었다. 이후 서울과 평양의 전투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치료해 주었다.

▲ 의사 흴드(왼쪽), 한국에 온 최초의 서양인 간호사 제이콥슨(오른쪽). ⓒ동은의학박물관

건물과 대지를 반환하다

1902년 세브란스병원의 건축이 진행되자 조선 정부는 구리개 제중원 부지와 건물을 반환받아 원수부에서 사용하겠다는 의도를 내비쳤다. 하지만 실제 반환 협상은 세브란스병원이 건립된 이후 일본공사관이 나선 다음에야 타결되었다.

▲ ⓒ프레시안
1905년 3월 조선 정부와 미국 공사 및 선교사 등은 반환 협상을 타결했다. 당시 일본은 "미국인이 제중원의 토지와 가옥을 무기한 점유하는 것은 조선 정부에 불리한 일"이라며 하기와라 서기관을 내세워 제중원의 토지 및 가옥 반환 문제를 타결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일견 일본이 나서서 조선 정부의 이익을 찾아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일본 측이 개입한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일본이 반환 후 건물의 용도로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바로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의 거주지였다. 일본 공사관은 조선 정부를 돕는 척하면서, 사실은 제중원 건물을 자신의 의도대로 사용하려 한 것이었다.

어쨌든 1905년 3월 7일 외부대신은 탁지부대신에게 공문을 보내 제중원을 구매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1905년 3월 21일 탁지부대신은 제중원 구매비를 예비금에서 충당할 것을 의정부회의에 상정하였고, 3월 31일 황제의 재가를 얻어 제중원 구매를 최종 결정하였다. 이 사실은 4월 3일 <관보>를 통해 공표되었다.

제중원의 반환이 결정되자 4월 10일, 조선 정부와 미국 선교부는 <제중원 반환에 관한 약정서>를 비롯한 제반 서류를 작성하고, 대금을 지불했다. 그런데 이날 지불된 대금은 제중원과 관련된 것뿐이 아니었다. 우선 제중원과 관련해 그 동안 선교부가 건물의 증개축에 사용한 경비 1만1269원90전, 1년 전에 통고하지 않고 급히 땅과 건물을 돌려받음에 따른 주택의 임차료와 이사 비용 1700원, 여의사 에바 휠드 소유로 되어 있는 저동 소재 집과 대지에 대한 구매 비용 1만9020원 등도 포함되었다.

▲ 1906년 제중원 찬성금과 관계된 조선 정부의 문서. ⓒ프레시안
병원에 입원했던 환자와 설비는 1904년에 새로 지은 복숭아골로 옮겨 새 병원에서 진료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반환 계약이 완료될 당시 의사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던 구리개 제중원의 대지와 건물은 조선 정부에 되돌려졌다.

조선 정부가 하사한 제중원 찬성금

1906년 5월 조선 정부는 에비슨과 알렌의 요청에 따라 그 동안 제중원에서 환자를 치료한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찬성금으로 3000원을 지원하였다. 1906년은 현재의 서울역 앞의 복숭아골로 이전한 다음이다. 이 병원은 흔히 세브란스병원이라고 불렸지만, 조선 정부는 그 동안의 활동에 대한 격려의 의미를 담아 제중원 찬성금을 지원했던 것이다.

조선 정부가 사립 선교 병원인 세브란스병원을 제중원이라 지칭한 것을 보면, 이미 조선 정부가 제중원이 세브란스병원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기독교 관련 선교부에서 설립한 병원은 광주 제중원, 대구 제중원, 평양 제중원, 재령 제중원 등으로 불렸다. 제중원이 선교 병원의 상징적인 이름으로 사용된 것이다.

제중원 찬성금

제중원의 설치가 이미 수십 년이 지났는데 백성의 생명을 구제하는데 열심이어서, 경향 민생의 병이 있으나 의지할 데가 없는 자와 치료를 하여도 효과가 없는 자가 제중원에 부축되어 이르면 정성을 다해 치료한다. 죽다가 살아나고 위험한 지경에서 목숨을 부지하게 된 자를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인데 아직 한 마디 치하하는 말이 없고 한 푼 도와주는 돈이 없으니 이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제중원을 돕는 돈을 보내자는 의견이 이미 정부의 방침인 바 결코 보류할 수 없어 이에 송부하니 잘 검토한 다음 찬성금 3000원을 예산 외에서 지출하여 제중원에 보내서 그 널리 시술하는 의미를 길이 장려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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