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최초의 의대 졸업생 진로는? 공무원!"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최초의 의대 졸업생 진로는? 공무원!"

[의학사 산책] 한국 최초의 서양 의학 교육

알렌은 병원 설립안에서 제중원이 조선의 젊은이에게 서양의 의학과 위생학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의 역할도 담당할 것을 밝혔다. 하지만 개원 후 하루 50~70명에 달하는 많은 환자들 때문에 알렌은 계획했던 의학 교육을 시작할 수 없었다. 다만 임시방편으로 젊은이를 의료 조수로 뽑아 수술 보조, 처방약의 조제 등에 도움을 받았을 뿐이다.

알렌의 의학 교육 추진

▲ 1886년의 제중원의학교 배치도. ⓒ동은의학박물관
1885년 6월 헤론이 합류하고 언더우드가 있었기 때문에 알렌은 자신을 얻어 대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미국 공사 폴크가 아직 미국인 교사가 도착해 있지 않다는 이유 등의 문제점을 지적했고, 그의 제안대로 우선 제중원과 연관된 의학교의 설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1885년 12월 통역관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고종은 폴크에게 의학교의 설립을 적극 추진하라고 요청하면서 화학, 해부 등에 필요한 기구와 골격 표본 등 교육에 필요한 기구의 구입비로 250달러를 지급했다. 또 제중원 북쪽에 위치한 약 250평 대지에 놓인 가옥을 구입해 교사로 사용하게 하는 등 의학교의 설립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당시 의학교의 이름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제중원에 부속되어 있기에 흔히 제중원의학교라 부른다.

한국 최초의 서양의학 교육기관, 제중원의학교

▲ 1886년 7월 일본 <아사노신문>에 실린 제중원의학교 학생 선발 기사. ⓒ동은의학박물관
마침내 1886년 3월 29일 한국 최초의 서양의학 교육기관인 제중원의학교(濟衆院醫學校)가 개교하였다. 조선 정부는 일부 재정적인 지원과 함께 학생 모집을 담당하였다. 제중원의학교에는 학칙과 교수진이 있었고, 교육 과정과 더불어 졸업 후의 정부의 주사로 임명할 계획을 세워 사전에 진로를 정했다. 사실상 현대 의학 교육 기관과 큰 차이가 없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제중원의학교야말로 한국 서양 의학 교육의 효시였다.

학교 규칙은 외아문의 독판 및 협판과 선교 의사들의 회의에서 채택되었는데, 경쟁 시험을 통해 선발된 16명의 학생들은 4개월 동안의 예비 기간을 거친 후 성적이 우수한 12명을 정규 과정에 편입시키고, 나머지 4명은 낙제시키기로 했다. 학생들에게는 식사비, 기숙사비, 학비 등이 제공되었고, 과정을 끝낸 후 주사의 직책을 가진 정부 관리로 등용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또 학생들은 학교 당국의 허락 없이는 중퇴할 수 없었다. 의학 훈련 과정은 5년 정도 하는 것으로 예정되었으며, 학생들의 수업은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까지였다.

제중원 의사들의 갈등

제중원의 고유 기능인 진료가 알렌에 맡겨진 것을 넘어 의학 교육은 모든 것이 선교 의사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런데 제중원에서 독주하는 알렌에게 헤론, 엘러스 등 다른 의사들이 불만을 표시하여 갈등이 빗어지자 선교 의사들 사이에 1886년 12월 말 다음과 같은 합의가 이루어졌다.

제중원의학교 및 병원의 운영에 관한 선교사들의 합의

1. 제중원의학교와 관련하여 교수들은 교수회를 구성하고 매월 정기회의와 1명의 발의로 개회할 수 있는 임시회의를 가질 것.
2. 외국인이 관계하는 한 학교의 모든 운영권은 그들에게 있으며, 한국인이나 다른 외국인과의 협정은(회원 1명으로 된 특별한 분과는 제외) 교수회와 충분한 협의가 없으면 맺지 못함.
3. 학교로서 정부와의 모든 연락, 학생과 사무실에 관한 규칙, 교과 과정에 관한 모든 결정, 학생 입학 사정 등에 관한 모든 지침은 교수회에서 최소한 2명의 협의와 찬성을 얻은 후 만들 것.
4. 제중원과 관련하여 세 의사는 각자 동일 권한을 가지는 이사회를 조직할 것.
5. 의료 사업을 담당하는 위원회를 구성할 것.
6. 모든 약품의 주문은 이 위원회에 제출하여 허락을 받을 것.

한국 최초의 의학생들

▲ 제중원의학교 초기 의학생 최종악. ⓒ동은의학박물관
1886년 7월 현재 제중원의학교에서 의학을 배웠던 의학생들은 이의식, 김진성, 우제익, 이겸래, 김진성, 최규성, 최종악, 윤호, 이진호, 진학순, 상소, 고제자, 김의환 등이었다. 당시의 의학 교육과 관련된 구체적 자료가 남아있지 않으므로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학생들은 최대한 빠른 속도로 영어를 배운 후, 기초 과학인 수학, 물리, 화학을 배웠다. 소정의 과정이 끝난 학생들은 영어로 해부학, 생리학, 의학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알렌이 골격 표본과 해부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러한 실습 교재를 해부학 교육에 활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결실을 맺지 못한 의학 교육

이들 학생들은 일정 수준 이상의 학식이나 배경을 갖춘 개화된 청년들이었으며, 신학문의 습득을 통한 입신양명을 추구하였다. 조선 정부는 졸업생들에게 주사의 직을 보장함으로써 학생들을 유인하고자 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그 당시로는 기본 체계가 완전히 다른, 새롭고 어려운 학문을 장기간, 그것도 외국어로 공부해야 했기 때문에 공부할 흥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또 영어를 아는 것만으로도 통역관이나 다른 일을 할 수 있었기에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이 시기의 의학 교육은 의사 배출이라는 뚜렷한 결실을 맺지 못했다. 13명 중 후의 행적이 밝혀진 6명은 모두 관료로서 활동하였고, 적극적으로 친일행각을 벌여 일제하에서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에 임명된 사람도 있었다.

2기 학도의 모집

▲ 제중원의학교 초기 의학생 이의식의 이력사. ⓒ국사편찬위원회
하지만 이러한 의학 교육의 성과가 있었음을 나타내는 자료가 있다. 고종이 1886년 6월 14일 개원 이래 제중원이 거둔 성과를 치하하면서 학도였던 이의식을 제중원 주사로 승진시킨 사실이다. 처음 예정했던 대로 소정의 과정을 끝낸 후 주사의 직책을 가진 정부 관리로 등용하였던 것이다.

또 이 의학 교육이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이어졌음을 나타내는 기록이 있다. 1886년 6월 14일 고종이 개원 이래 제중원의 성과를 치하하면서 포상한 내용 중에 주사 김의환을 학도로 임명한 일이다. 김의환을 제중원의학교의 2기 학도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1기 학도 중에서 이의식이 주사로 승차한 것을 일종의 수료로 간주하면, 새로운 학도로 들어 온 김의환은 2기생이랄 수 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헤론의 죽음

알렌이 미국으로 돌아간 후 제중원의학교에는 헐버트와 기포드가 합류하여 교육을 계속했다. 하지만 헤론이 진료 등으로 거의 교육에 참여하지 못하는 가운데 헤론과 언더우드는 1888년 9월 8일 조선 정부에 대해 학교 설립을 허가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제중원의학교의 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이를 허가 하지 않았다. 결국 제중원의학교는 영어 학교로 그 성격이 변질되어 운영되다가 1890년 7월 헤론이 이질로 사망하자 중단되었다.

▲ 제중원의학교의 교수진. 왼쪽부터 헤론, 언더우드, 헬버트. ⓒ동은의학박물관

에비슨에 의한 의학 교육의 재개

▲ '제중원 교사'라는 명칭이 들어 있는 조선 정부의 문서. ⓒ서울대학교 규장각
제중원에서의 의학 교육은 3년 후인 1893년 11월 부임한 에비슨에 의해 재개되었다. 에비슨 역시 임시방편으로 의료 조수를 고용하여 도움을 받고 있었다. 1895년 7월의 콜레라 유행에서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방역국장의 책임을 맡아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조수들을 훈련시켰고, 이들의 큰 역할을 확인한 에비슨은 콜레라 유행이 끝나자 의학 교육에 박차를 가하였다. 1895~6년도에 남학교에서 조수로 선발한 몇 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의학 교육을 시작했는데, 이때 교사는 에비슨, 제이콥슨, 빈튼, 화이팅 등이었다.

에비슨은 조선 정부의 협조 없이 학생을 모집했는데, 고생해 뽑은 학생이 길어 봤자 3개월이 지나면 그만 두었기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다행히 이런 문제는 기독교 신자들이 학생으로 들어오면서 해소되었다.

어느 정도 의학 교육이 자리를 잡히자 에비슨은 한국어 교과서를 편찬하기로 했다. 우선 해부학 책 번역에 착수했다. 이미 1897년 초에는 상당 부분 번역이 진행됐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에비슨의 이러한 초기 의학 교육은 학년이나 수업 연한이 정해지지 않았고 강의도 규칙적이지 않은 등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1899년 에비슨은 병가로 안식년을 얻어 캐나다로 돌아가자 구심점을 잃은 학생들은 흩어져 버렸다.

▲ 에비슨의 초기 의학 교육 상황을 보여주는 <1895~6년 보고서>. ⓒ동은의학박물관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