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노무현'은 환생했습니다. 생전의 업에 따라 다음 세상에서의 생이 결정된다는 49재 기간 동안 노무현은 온전한 인간으로 환생했습니다. 어렵게 컸기에 비슷한 이웃을 끌어안을 줄 알았던 '어머니' 같은 존재로 다시금 각인됐습니다.
'정치인 노무현'도 부활했습니다. 49재 기간 동안 노무현은 올곧은 정치인으로 환생했습니다. 고난의 정치도정을 자신을 버리는 지혜로 이겨냈던 '바보 정치인'으로 다시금 평가됐습니다.
하지만 '대통령 노무현'은 환생하지도, 부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49재 기간 동안 그 누구도 쉬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대통령 노무현'의 공과를, '노무현 정부'의 공과를 함부로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슬픔이 물결치는 추모기간이니까 차가운 시각과 건조한 어투는 삼가야 한다고 모두가 여겼습니다.
2.
노무현을 영원히 떠나보내며 확인합니다. 이제는 아닙니다. 슬픔이 자리했던 가슴에 열정을 담고 눈물을 자아냈던 눈망울에 이성을 채워야 합니다. 그리고 평가해야 합니다. '대통령 노무현'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합니다.
예단은 하지 않습니다. '대통령 노무현'에 대해 실패 또는 성공의 낙인을 미리 찍지 않습니다.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골방에 틀어박혀 개인적으로 '대통령 노무현'에 별점을 매기는 행위는 그리 생산적이지 않습니다.
함께 해야 합니다. 봉하마을에, 서울광장에, 대한문 앞에 모였던 모든 이들이 함께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다 함께 '대통령 노무현'을 평가해야 '노무현의 가치'를 계승하고 혁신하는 힘과 세력이 생깁니다.
3.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아주 절박한 심정으로, 매우 긴요하다고 말하는 겁니다.
'대통령 노무현'은 단 한 번도 진지하게 평가된 적이 없습니다. '대통령 노무현'의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실패' '무능' 심지어 '사기'라는 낙인을 찍었습니다. 그리곤 버렸습니다.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버림'이 '충분한 사유'를 동반한 것이라면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없었습니다. '충분한 사유'는 몇 개의 조각이었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전제해 놓고 그 가치에서 일탈한 '대통령 노무현'의 사례 몇 개를 얼기설기 엮은 것이었습니다.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전후 사정을 참작할 수 있었습니다. 대선과 총선에서 잇따라 참패하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고, 느닷없이 켜진 촛불에 황망해 했습니다. 눈앞의 대사에 밀려 지난 대사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촛불이 스러진 뒤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안 됩니다. 이번에도 경황없이 흘려보내면 안 됩니다. '대통령 노무현'의 공과를 인상비평 영역에 남겨둬서는 안 됩니다.
ⓒ프레시안 |
4.
'대통령 노무현'의 '해원'을 위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원'엔 이미 주장이 깔려있습니다. '억울하다'는 주장, '부당하다'는 주장이 깔려있습니다. 나아가 '정당하다'는 주장 또한 스며있습니다.
'해소'를 위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억울하다' '정당하다'는 당사자의 주장과 '실패' '무능' '사기'라는 제3자의 주장이 엇갈리는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서입니다.
'해체'를 위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억울하다'는 주장과 '실패'라는 평가 사이에서 팽팽하게 조성된 반목과 갈등을 해체하기 위해서입니다. 49재 기간동안 휴전상태에 있었던 이 반목과 갈등이 49재 이후에 격화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입니다.
5.
캐릭터에 의존한 정치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몇몇 '이미지 정치인'이 실증합니다. 순간적 인기는 끌지 몰라도 지속적 지지는 받지 못합니다.
'노무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노무현'의 캐릭터에 압도된 세력 단합과, '인간 노무현'의 캐릭터에 의존한 정치 모색은 일장춘몽으로 그치기 십상입니다. 민주당 내에서 '친노통합론'이 제기되고, 일부 친노 세력 내에서 '독자신당론'이 모색되지만 부질없습니다.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평가가 끝장을 보지 않는 한 그런 주장과 모색은 모두 공염불에 그치고 맙니다.
6.
국민은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 노무현'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을 여미면서 '민주시민'의 도리를 다 하고자 하지만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서성이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어느 세력인가를 지지하고 싶지만 대상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습니다.
'민주'를 위해 '행동하는 양심'이 돼야 한다는 훈수는 타당하지만 그것이 대안이 될 수는 없습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승리하는 세력'이 되는 비전을 제시해야 훈수는 비로소 완결됩니다.
그러려면 성찰하고 극복해야 합니다. '대통령 노무현'에 붙어있는 '좌파 신자유주의'란 딱지를 걷어내야 합니다. 그 딱지에 스며있는 각인각색의 '진보 카테고리'를 하나로 통일시켜야 하고, 그 위에 '민주'를 결합시켜야 합니다.
'인간 노무현'은 보내고 '대통령 노무현'은 불러내야 합니다. '인간 노무현'의 영면을 기원하면서 '대통령 노무현'의 불면상태를 끌어내야 합니다. 오늘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노무현 49'재에 부치는 발제문입니다.
* 이 글은 뉴스블로그 '미디어토씨(www.mediatossi.com)'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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