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이들은 이 연재를 위해서 연세대 의과대학 동은의학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미공개 사료의 일부를 공개한다. 동은의학박물관은 국내에서 근대 의학 관련 사료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곳이다. 매번 글과 함께 사진으로 공개되는 근대 의학 관련 사료는 우리를 생생한 역사의 현장으로 데려다 줄 것이다. <편집자>
한국 현대 의학의 시원(始原)을 찾아서 : 연재를 시작하며 1884년 9월 20일 파란 눈에 머리카락이 붉은 6척 장신의 서양인이 서울로 가기 위해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중국 상하이에서 내한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의사 알렌(Horace Newton Allen)이었다. 미국 북장로회가 파견한 의료 선교사로 이미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했던 알렌은 새로운 선교지로 한국을 선택했다. 알렌의 도착으로 한국은 개항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일본 의사와 함께 일군의 서양 의사(의료 선교사)들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은 그동안 접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의학을 맛보게 되었다. 그로부터 1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 서양 의학은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우리는 병원에서 태어나고 일생동안 병원을 드나들다가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어느새 서양 의학은 우리의 생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일부가 되었다. 학문적으로 명명된 '사회의 의료화'가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의학은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지금 한국의 병원에서는 인간의 손이 아닌 로봇을 이용한 수술이 진행 중이다. 또 알렌의 후예들인 한국인 의료 선교사들은 아프리카를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활동 중이며, 한국에게 세계 2위의 선교국이라는 지위를 안겨주는데 일조하고 있다. 한국에서 근대 130년의 모습은 말 그대로 역동적인 한국, 다이내믹 코리아가 단순한 수식이 아님을 보여준다. 다소 무시하는 의미도 들어있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근대를 거치면서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뜨거웠던 1980년대를 거치면서 제도적 차원의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있기도 하다. 식민지를 거친 국가 중 한국은 민주화와 공업화를 동시에 성공시킨 국가의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근대'가 가진 경직성과 파괴에 대한 비판들이 제기되고 있기는 하지만, 한국의 성장이 보여주는 모습이 근대화가 지향한 하나의 목표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서양 의학은 근대 한국이 탄생하는 한가운데 있었다. 조선 정부는 부국강병이라는 국가적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서양 의학을 수용하였다. 일본의 무력에 굴복하여 개항해야 했던 조선 정부로서는 부상당한 군인들을 치료하는데 효과를 나타내고 있던 서양 의학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알렌은 입국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제중원이라는 서양식 병원을 개원하기에 이른다. 제중원에는 서양 의료 선교사들이 속속 입국하여 활동하였고, 개원 1주년에 즈음해서는 한국인 학생들에 대한 교육이 시작되었다. 전국 각지에는 제중원과 같은 선교 병원들이 속속 설립되었다. 1899년 관립으로 설립된 의학교는 1902년부터 서양 의학을 학습한 졸업생들을 정기적으로 배출하였다. 의학교에는 외국에서 서양 의학을 공부한 김익남이 교수로 참여하여 한국인 졸업생의 배출에 일조하였다. 제중원을 이은 세브란스병원의학교는 오랜 산고 끝에 1908년 7명의 첫 졸업생들을 배출하였고, 이들에게는 대한제국에서 부여하는 의사면허 1번부터 7번이 부여되었다. 대한제국이 이미 통감부의 입김 아래 있었다는 점에서 자주적인 의사 면허 부여라고 보기 힘든 점도 있지만, 한국에 새로운 직업이 탄생하고 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이후 정규 교육을 마치고 면허를 받은 의사들이 배출되면서 의사의 지위도 상승하기 시작했다. 조선 시기 의사 중 최고의 지위에 속했던 어의들은 비록 자신의 실수가 아니더라도 국왕이 사망할 경우 응분의 징벌을 받아야 했다. 의학의 실용성에 주목했던 실학자들은 의사를 노비와 같이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서양 의학이 수용되고 식민지시기를 거치면서 의사들은 세상 사람들의 존경과 숭배를 받는 최고의 전문 지식인으로 성장하였다. 의학교의 입학 경쟁률은 점차 높아져 갔다. 전통시대 중인에 불과했던 의사는 한국 최고의 엘리트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서양 의학의 성장이 순탄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먼저 서양 의학은 이방인의 학문이요,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서양 의학을 처음 접한 한국인들은 그 의학에 겁을 먹었다. 익숙하지 않은 대상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때로는 반발도 일어났다. 백신 접종은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지석영이 세운 우두국은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불탄 증오의 대상이었다. 서양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병원은 아이를 잡아먹는 소굴로 매도당했다. 선교 병원을 출입하던 한국인은 돌을 맞아야 했다. 한국을 침략, 지배하고자 했던 일본의 의사들에 의해 서양 의학이 전수되고 있었던 것도 문제였다. 일본 의사들은 자신이 먼저 성취한 '근대'를 한국에 이식하고자 했다. 그 행동은 선의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일본의 지배를 한국이 수용하도록 만드는데 목적이 있었다. 한국인 학생들은 한국인의 열등성을 두개골의 크기로 입증하려는 일본인 교수에게 저항하는 모습도 보였고, 차별에 대한 반감으로 독립운동에 를 한국이 참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식민지시기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 지배의 정당성을 교육받았다. 해방 이후 한국에 진주한 미국은 그들에게 어쩌면 다른 모습의 '근대'였고, 따라서 그 수용이 어렵지 않았을지 모른다. 식민지 시기 동안 전통 의학은 필요 이상의 억압을 받았다. 이제 의학은 당연히 서양 의학이었고, 전통 의학은 자신의 이름 앞에 '한'을 붙인 한의학이 되었다. 한의사들도 의사가 아닌 의학을 배우는 학생, 즉 의생(醫生)으로 격하되었다. 서양 의학이 콜레라와 같은 급성 전염병에 일정한 대응책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검역이나 백신은 한의학에서 이루어지지 않던 새로운 방법이었다. 하지만 페니실린이 발견되기 전까지 서양 의학 역시 치료 효과에서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1930년대에 이르면 한의학은 서양 의학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동등한 대우, 나아가 특별한 대우를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래가 드문 의료의 이원화는 식민지시기에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근대라는 시기를 거치면서 서양 의학은 한의학을 넘어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2000년 일어난 의료 대란에 한국이 소용돌이 칠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한국인의 일상을 장악한 서양 의학이 있었다. 대란이 본격화되면서 나타난 상황, 즉 병원이 문 닫을지 모를 상황, 실제로 병원에서 의사를 만날 수 없게 된 상황은 공포 그 자체였다. 물속에 들어가서야 우리가 공기를 호흡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듯이 의료 대란을 거치면서 한국은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서양 의학의 위력을 실감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하나의 일상이 되어버린 서양 의학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을 시작하고자 한다. 이 연재가 취급하는 시기는 대체로 서양 의학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는 개항 전후부터 식민지가 끝나는 1945년이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한국의 전통적인 의식주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서양적인 내용으로 변경되고 채워졌다. 즉, 이 시기를 거치면서 전통적인 한국은 새로운 한국으로 거듭 났다. 근대 한국의 탄생이었다. 이 연재는 한국 근대의 변화 속에 있던 서양 의학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서양 의학이 한국에 어떻게 수용되었고, 그 의학을 수용하면서 한국 사회는 어떻게 변해나갔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 연재를 진행하는 필자들은 직간접적으로 역사학과 연계를 가지고 있다. 역사학의 생명은 흔히 사료라고 이야기한다. 해석은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그 해석이 객관적인 사료에 입각해야 한다는 점에 역사학자들은 동의한다. 필자들도 서양 의학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이 원칙을 견지하고자 한다. 글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재미를 위해 약간의 윤색이 이루어질 수 있지만, 그 바탕은 어디까지나 철저한 사료에 있음을 미리 밝혀두고자 한다. 박형우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교실 교수 의사학과 겸임교수, 동은의학박물관 관장 대한의사학회 회장 박윤재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학과 교수 |
한국, 서양 의학을 만나다
의학이란?
의학은 '인체의 구조와 기능의 연구는 물론, 질병의 치료 및 예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러면 서양 의학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세계의 의학을 지리적으로 서양 의학 혹은 동양 의학으로 나누어 해석하면, 서양에서 발달하여 후에 동양으로 전해진 의학일 것이다. 그렇다면 서양 의학과 동양 의학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지리적인 차이와 상관없이 원시인들은 본능적인 경험을 통해 좋다고 생각되는 방법이 있으면 자기 자신에게만 그치지 않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했는데, 이것이 원시 의학의 시초를 이루었다. 원시인들은 인체의 건강, 질병 또는 죽음을 포함한 모든 현상이 신령이나 악마와 같은 신비력에 의해 나타나거나 치료될 것이라는 신념을 가졌고, 이로부터 발생한 수많은 주술이 민간 의학의 큰 부분을 이루게 되었다. 이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및 중국 문명이 탄생하면서 의학도 이곳들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4대 문명의 의학
우선 서양 의학의 발달을 살펴보자. 메소포타미아에는 이미 의사란 직업이 존재했으며, 기원전 2200년경 설형문자로 쓴 의학서도 만들어졌다. 이집트의 의학에서는 의신 임호텝(기원전 2600년경)이 가장 유명하며 미라도 만들어졌다. 이집트의 의학은 고대 그리스로 이어졌고, 서양 의학의 모체가 되었다. 인더스 문명에서 발달한 인도 의학은 기원전 1500년경 북방에서 침입해온 아리안족에 의해 발달했다. 인도 의학의 중흥 시조라 불리는 챠라카의 <의록>은 히포크라테스의 <의서>와 상당히 유사한 점이 많은데, 어느 것이 더 앞서 영향을 주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 의학들 사이의 상호 관련이 매우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 히포크라테스. ⓒ동은의학박물관 |
4세기 말 게르만인들의 침입으로 로마가 서로마제국과 동로마제국으로 분리되었다. 서로마제국은 가톨릭의 위세에 눌려 의학이 답보 상태에 있었다. 반면 동로마제국은 비잔틴제국을 이루어 동방으로 진출하였고, 7세기에 이슬람교가 만들어지고 아라비아제국이 탄생하면서 그리스, 로마, 인도, 중국의 의학이 융합된 아라비아 의학이 발전했다.
16세기에 들어 유럽 전역에 르네상스시대가 도래했고, 베살리우스는 인체 해부를 통해 중세 의학을 지배했던 갈레노스의 의학을 송두리째 붕괴시켜 버렸다. 서양 의학의 근대화가 시작된 것이다. 동시에 정확한 해부학 지식을 바탕으로 한 서양 의학이 외과 요법에 관한 기술적 특징이 없는 중국 의학과 차이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 문명권의 한국
▲ 베살리우스. ⓒ동은의학박물관 |
고대 중국에서는 신농(기원전 2800년경)과 황제(기원전 2600년경) 등에 의해 독자적인 의학 체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전하며, 한대에 이르러 음양오행설이 의학과 접맥되었다. 한반도와 만주 지방을 중심으로 발달한 한국의 민간 의학은 지역적으로 중국 문명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삼국시대에는 불교가 전래되면서 불경 및 중국 남조시대의 의방을 통해 인도 의학이 간접적으로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설명한 바와 같이 인도 의학에는 간접적으로 그리스의학의 영향을 받은 요소가 섞여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실크로드를 통한 고승들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불교에 수반된 인도의 의설과 의방이 신라 의학에 더욱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또한 페르시아, 아라비아 및 동로마와의 교류를 통해 당나라로 들어온 약재들이 간접적으로 신라에까지 전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아라비아의 상인을 거쳐 직간접으로 서방의 풍부한 약재들이 수입되었는데, 당시 서양 의학의 주도적 위치에 있었던 아라비아의 의학 지식 역시 수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통일신라시대의 외과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창증의 복약 및 고약 도포, 골절, 타박상 등을 다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 들어 침구술이 분과로 발달해 오다가, 조선 세종 이후로 침구의나 치종의 같은 외과 분야의 전문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외과의 전문 분야는 서양 의술과 달리 정확한 해부학적 지식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환자를 보거나 제자를 키워 학문을 전수하는데 많은 한계가 있었다. 또한 당시의 유교적인 관습 역시 외과 분야의 발전을 가로 막는 큰 걸림돌이었다.
선비들 서양의서를 읽다
▲ 샬폰벨. ⓒ동은의학박물관 |
먼저 소개된 책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일인 예수교 선교사 샬폰벨이 저술한 <주제군징>(1629)이다. 이 책은 가톨릭의 교리를 다룬 책이지만, 그 내용 중에 갈레노스의 해부생리학 이론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것은 학술적으로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된 서양 의학 이론이다. 하지만 그 내용은 그리스나 로마의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중세적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이 책은 당시 여러 학자들에게 상당히 널리 읽혔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유학자 이익은 <성호사설>(1760년 경)에서 "서국의"라는 제목으로 생리 원칙, 혈액, 호흡 및 뇌척수신경에 관해 설명하였다. 그는 서양 의학이 중국 의학에 비해 더욱 자세하다고 소개하고, <주제군징>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했다. 이규경도 <오주연문장전산고> 권19(19세기 중엽)'에 "인체내외총상변증설(人體內外總象辨證說)"이라는 제목으로 <주제군징>의 내용을 소개했다.
▲ <주제군징>(1639).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
서양 과학을 '과학적'으로 접근한 정약용
이들과 달리 정약용은 '의(醫)'에 관한 여러 문제를 모아 놓은 <의령(醫零)>(1798)에서 음양오행의 이론을 배제하였다. 그는 이 책의 '근시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원시와 근시의 원. 그음양의 부족에서 찾던 기존 이론과 달리 근대 물리학적 이론을 통해 설명하는 등 질병에 대해 상당히 과학적으로 접근했음을 엿볼 수 있다. 정약용은 <마과회통>(1798)에 처음으로 우두법을 소개하였다.
정약용이 이해한 안경의 원리 안구가 편평하면 시심(視心)이 원(遠)에 모이는 고로 원시가 되고, 돌출되어 있으면 시심이 근(近)에 모이는 고로 근시가 된다. 안경이 편평하면 문자가 좀 멀리 떨어져도 잘 볼 수 있으나, 돌출되어 있으면 가까운 것은 볼 수 있어도 조금 멀면 잘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
최한기, 해부학 지식을 높게 평가하다
▲ <전체신론>(1851)에 실린 인체 해부도. ⓒ동은의학박물관 |
최한기는 이들 책을 근거로 자신의 의도에 부합하도록 어떤 부분은 삭제하고 순서를 바꾸거나 합하여 <신기천험>(1866)을 저술하였다. 그는 중국 의학이 음양오행이나 오운육기와 같은 추상적인 이론으로 병리 현상을 설명하는 것을 비판하고, 서양 의학이 정확한 해부학 지식을 토대로 성립되어 있음을 높게 평가하였다. 하지만 인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궁극적으로 조물주를 통해 설명하려는 기독교적인 태도를 비판하였다.
개인적인 차원에 머문 실학자들의 관심
이러한 관심은 국가적인 차원이 아니라 학자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으며, 책을 통한 차원이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서양 의학의 본격적인 도입은 1876년 개항 이후 외국의 의사들이 들어옴으로써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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