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일 감독의 <반두비>는 오랜만에 만나는 시대를 반영한 한국영화다. 특히 그동안 치부됐던 이주노동자 문제를 통해 한국사회의 폐부를 정면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기획의 과감함이 돋보인다. <반두비>를 향한 평단의 찬사는 그런 감독의 진심어린 태도가 드러난 까닭에 누리고 있는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다만 신동일 감독이 누차 강조한 바, 청소년을 위해 만들었다는 의도의 방법론에 있어서는 선뜻 동의하기가 쉽지 않다. 민서(백진희)로 상징되는 청소년들에게 감독 자신이 바라는 바를 이상화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드는 것이다.
▲ ⓒ프레시안 |
'반두비'는 방글라데시어로 '친구'를 의미한다. 하지만 고액의 학원비로 고민에 빠진 여고생 민서와 직장 체불금으로 곤란을 겪는 이주노동자 카림(마붑 알엄)은 친구가 되기엔 먼 사이처럼 보인다. 민서가 버스에서 카림의 지갑을 줍지 않았더라면, 그런 민서를 카림이 끝까지 쫓아가 잡지 않았더라면 이들은 남남이었을 것이다. 경찰서로 넘기려는 카림에게 민서는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제안하고 이를 계기로 둘은 친구를 넘어 연인사이로 발전한다. 그러나 카림을 향한 한국인의 불편한 시선은 결국 이 둘을 추억을 간직한 친구사이로 갈라놓고야만다.
줄거리에서 감지되듯 이주노동자를 대하는 한국인의 시선은 폐쇄적이다. 110만의 이주민이 존재하는 다인종 사회라고는 하지만 이주노동자를 축으로 극이 진행되는 영화는 <반두비>가 처음이다. 이처럼 <반두비>는 과거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관계가 전면에 나선다는 점에서 진보적이다. 또한 <처음 만난 사람들> <로니를 찾아서> <시선1318>의 '달리는 차은'까지, 이주노동자가 중요한 역할로 등장하는 영화가 <반두비> 개봉을 전후해 집중됐다는 점에서 징후적이기도 하다. 한국영화의 배경에 불과했던 이주노동자는 이제 주인공으로까지 격상했다. 삶의 고민을 나누는 친구로,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가족으로 한국(인)의 정체성이 된 것이다. 그중에서도 <반두비>가 보여주는 민서와 카림의 로맨스는 할리우드 내의 백인과 흑인의 사랑처럼 커뮤니티 안에서 암묵적으로 꺼려지던 인종관계를 한국영화사(史) 최초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가히 혁명에 가깝다.
안 그래도, <반두비>는 신동일 감독의 전작 <방문자>(2006) <나의 친구, 그의 아내>(2006)에 이은 '관계3부작'의 완결편이다. 이들 작품은 모두 성장배경이 상이한 이들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관계의 현상을 다룬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띤다. 다만 연출의 방식에 있어서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방문자>가 여호와의 증인 청년과 386지식인의 우정을 우화로, <나의 친구, 그의 아내>가 계급이 서로 다른 친구 사이의 우정의 이면에 잠재한 죄의식을 그리스 비극으로 형식을 가져갔다면 <반두비>는 로맨틱코미디의 틀을 빌려와 민서와 카림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로맨틱코미디의 차용은 민서와 카림의 관계가 주는 혁명성의 충격을 얼마간 완화한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청소년 영화라는 감독의 말을 상기할 필요도 없이 장르의 재미를 우선하면서 주제를 부각하는 방법은 자칫 설교조로 전락할 수 있는 이야기의 안전핀 역할을 한다. 소수자이면서 약자이고 이방인인 민서와 카림을 통해 한국사회의 비뚤어진 면을 발가벗김으로써 상식을 설파하는 작품이라고 볼 때 형식은 <반두비>의 전략적인 화술로 기능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형식의 가능성을 최대한 활용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민서와 카림의 목소리보다 감독의 목소리가 더 잘 들리는 까닭이다. 작심이라도 한 듯 MB를 향해 쏟아 붓는 날선 농담들은 그 의도가 눈에 뻔히 보여 민서와 카림을 뒤로 밀어내는 경우가 잦다. 장르 특유의 능청스러운 유머와 여유에 앞서 MB정권을 향한 감독의 분노와 야유가 먼저 느껴진다. 인물의 사연을 보여주기보다 감독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한 꼭두각시로 민서와 카림을 내세운 형국인 것이다. 그래서 "명박이 믿고 뉴타운에 투자했다가 망했어" "왜 이명박 대통령의 별명은 쥐인가요?"와 같은 장면을 대할 때마다 과연 영화의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물론 이는 신동일 감독을 위시해 MB 정권의 정책에 반대하는, 아니 한국사회의 탈골된 상식에 반대하는 이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감정이다. 하지만 영화라면 현실의 모순을 좀 더 세련되게 접근하는 예술적 절제가 필요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을 피할 길이 없다. 더욱이 신동일 감독의 의도처럼 지금의 사회를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청소년들에게 더 나은 미래의 가능성을 제시하려 했다면 말이다. 오히려 그런 강박관념이 민서의 캐릭터를 대상화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차별받는 이주노동자의 모습으로 스테레오타입화된 카림과 달리 민서는 매력적인 캐릭터로 등장하는데, 아르바이트로 학원비도 벌고, 카림이 겪는 부조리에 대신 저항할 줄도 아는 모습에서 신동일 감독 본인의 분노를 치유하기 위한 희망의 발로로 이상화된 청소년의 모습이 겹지는 것이다.
지금의 청소년들에게는 현실참여도 일종의 놀이다. 극중 민서와 같은 이들은 놀이로써 현실에 저항한다. 전경이 쏘아대는 물대포에 머리감기로 응수하고 곤봉을 폭력 삼는 진압에 춤과 노래를 방패삼을 줄 아는 세대다. 오히려 감독의 자의식을 살짝 덜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었더라면 어땠을까. 이야기 속에 담긴 직접적인 분노를 형식의 유머와 여유로써 우회했다면 청소년에게 더욱 밀착하는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오해 마시길! 이 얘기가 영등위의 청소년관람불가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이 영화가 왜 청소년관람불가인지 이유를 모르겠다.) 나는 선한 의지만 가지고 세상이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는 정교한 과정이 동반됐을 때 선한 결과를 담보한다고 믿는다. <반두비>가 반가우면서 한편으로 아쉬운 이유다.
허남웅 /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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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들이 볼 수 없는 십대 영화, <반두비>
평론가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반두비>는 다소 규범적인 영화이다. 모험을 하지 않고 보여줄 것은 보여줄 수 있는 방식으로 보여주고, 이야기는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들려준다. 영화는 조곤조곤하고 편안하다. 심지어 민서가 유사 성매매업소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장면마저도, 거기에서 뜻밖의 사람과 조우해서 해프닝을 벌이는 장면조차도, 얌전하다. 이런 말을 하면 감독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반두비>는 착한 영화이다. 물론 내 취향을 말하자면, 이런 착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반두비>는 내 욕심을 좀 접어두고 생각해야 할 것 같다. 김수영처럼 나도 때로는 작품보다 '정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반두비>는 잘 만들어진 영화이다. 여기에서 잘 만들어졌다는 말은 형식상으로 관객이 충분히 공감하고 따라올 수 있는 영화라는 뜻이다. 그리고 영화가 전달하는 내용도 '상식적'이다. 여기에서 상식적이라는 말은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의 수준이 낮다는 의미가 아니다. 지금 현재 한국사회에서 제기되고 있는 이슈를 적절한 수위로 다루고 있다는 뜻이다. 관객이 수긍할 수 있는 방식으로, 상식적인 재현의 틀에 충실하게 <반두비>라는 영화는 이야기를 끌고 간다. 한 마디로 부담 없이 와서 볼 수 있는 영화이지만, 그렇다고 일반적인 상업영화가 제공하는 방식으로 '즐거움'을 주는 영화는 아니다.
▲ ⓒ프레시안 |
어떻게 보면 <반두비>는 평범한 한국 사회의 장삼이사들이 머릿속에서 그려보는 '단편영화'의 이미지에 충실한 영화일지도 모른다. 마치 <워낭소리>처럼 이 영화는 관객이 상상하는 단편영화의 모범에 아귀를 성실하게 맞추고 있는 것 같다. 영화가 다루는 내용은 이른바 '시민사회'의 상식이고, 세계화 시대에 당면한 타자에 대한 이해라는 정언명령이다. <반두비>의 미덕은 이 정언명령을 심각하게 풀기보다, 발랄하게 풀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누군가에게 이 사실은 불만사항일 수도 있겠지만, 한국사회의 수준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도 감당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정작 영화의 잠재관객이었던 청소년들이 <반두비>를 관람하지 못하는 판결이 내려졌다는 사실에서 이런 우려는 현실화한다.
지극히 상식적인 영화가 상식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여기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반두비>는 그 상식적인 성격으로 인해 한국사회에서 비상식적인 사건을 불러 일으켰다고 할 수 있다. 평범하기에 비범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반전이 여기에 숨어 있다. 이 반전을 통해 영화는 한 소녀의 성장드라마를 유지하면서 사회적인 문제에 개입한다. 한국사회의 현재를 암시하는 다양한 실마리들이 숨은 그림처럼 장면마다 감춰져 있지만, 이런 요소들은 감초같은 역할을 할 뿐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 영화를 지배하는 감각적인 것에 대한 열정이다.
흥미롭게도 여주인공 민서는 끊임없이 밥을 먹는다. 그는 배고픈 소녀이다. 그 배고픔을 유발하는 허기는 소통의 부재에서 발생한다. 학교도 가족도 사회도 그에게 아무 말을 건네지 않는다.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원어민 영어학원에 가려는 민서의 집착은 소통의 언어에 대한 갈증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에게 소통의 언어는 곧 이방의 언어인 것이다. 그는 이방의 언어를 통해 소통을 획득하려고 하지만, 또 다른 주인공 카림은 반대로 '부탁'을 통해 민서에게 다가온다. 민서는 처음에 카림을 만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그 부탁을 이행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카림을 돕기 위해 나서면서 민서는 마침내 '윤리'를 발견한 것이고, 돈을 받아내기 위해 카림과 '연대'하면서 마침내 소통의 방법을 깨닫는 것이다.
그 소통의 완성은 바로 음식과 사랑이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민서의 집에 카림이 찾아와서 방글라데시 고유의 음식을 만들어주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민서와 카림의 친밀감을 보여준다. 그러나 민서는 여전히 카림과 소통할 줄 모른다. 카림이 제공한 즐거움에 보답하기 위한 민서의 행동은 엉뚱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필연적인 것이다. 카림의 지갑을 훔친 민서가 자신의 잘못을 무마하기위해 보인 행동과 집으로 찾아온 카림에게 보인 행동은 민서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민서가 엄마의 남자친구를 혐오하면서 "짐승 같다"고 말하는 것과 이런 행동은 모순적이지만, 동시에 카림을 그 '짐승'과 동일선상에서 보고 있는 민서의 무의식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카림은 이런 민서와 다른 욕망의 배치를 가진 타자이다. 카림은 민서의 세계에 들어와 있지 않은 존재인 것이다.
민서는 카림을 이해하지 못한다. 못 사는 나라에서 와서 한국 \사회의 쾌락을 즐기지 못한다는 민서의 타박에 카림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 카림은 가난하지만 당당하다. 여기에서 민서의 인생은 다른 욕망의 통로를 발견하는 것이다. 민서가 카림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이런 개연성 때문이다. <반두비>는 겉으로 보기에 단순한 이야기구조를 갖고 있지만, 사실은 남녀의 사랑을 빗대어 한국사회의 진실을 드러내는 한 편의 알레고리이다. 이 알레고리가 펼쳐지는 방식은 상당히 감각적이다. 마지막에 민서가 예전에 카림이 손수 만들어줬던 방글라데시 음식을 먹는 롱테이크 장면은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반두비>는 평범하지만 용감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보통 특정 국가의 영화에서 타자는 여성으로 재현되기 마련인데, 신동일 감독은 과감하게 이 문법을 뒤집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파이란> 같은 영화를 뒤집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미국에서 백인 영화감독이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의 사랑을 직접적으로 그리는 것이 여전히 꺼려지는 일 중 하나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반두비>에 내재한 문제의식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영화를 '한국인' 감독이 만들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나는 한국영화의 저력을 발견한다. 특히 영화에서 주인공 민서 역을 맡은 백진희의 연기는 감탄을 자아냈다. 감독의 연출력과 백진희 연기 덕에 우리는 훌륭한 십대를 위한 영화 한 편을 얻었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떠올린 것은 그래서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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