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울먹이는 표정으로 부탁했다. 오로지 이 곳을 보기 위해 수만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왔다고, 예외를 만들 수 없겠느냐고 빌었다. 난감한 표정을 짓고 '절대' 안 될 것처럼 이야기하던 호르헤 씨는 관리인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관리인도 난처해하는 눈치였다. 몇 마디가 오간다 싶더니 호르헤 씨가 한숨을 쉬며 말을 했다.
"좋습니다. 관리인 말에 의하면 특별히 출입을 허가하겠답니다. 다만 사고가 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해 달라는 부탁입니다. 당신들이 전적으로 책임지겠다고 해도, 여긴 국립공원이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당신들 의사와 상관없이 우리가 책임을 져야만 하기 때문이에요. 차가 있나요? 좋습니다. 일단 알또 델 나랑호(Alto del Naranjo) 입구까지 올라가야 하는데, 걸어서 갈 수 있지만 시간을 아끼는 차원에서 차를 타고 가야 합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하마터면 꼴로라도(Colorado)쪽으로 차를 돌려야 할 뻔 했으니까.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피델의 꼬만단시아를 못 보고 가는 것도 억울한 일이었다. 하지만 또 사소한 문제가 기억났다. 기름이 거의 바닥을 치고 있는 사실인데, 얘기를 들어본 즉슨, 시에라 마에스뜨라를 빠져나가는 길에 있는 소도시인 '바르똘로메 마소'에 주유소가 있다고 한다.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것은 주유소가 도시 외곽에 있기 때문이었단다. 하지만 지금 당장이 중요했다. 무려 15분 이상, '더' 차로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그 엄청난 경사라니. 기름 먹는 소리가 들려온다. 만약 걸어서 간다면 두 시간은 족히 걸릴 거라 했다.
이런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호르헤 씨가 호텔에서 렌트 서비스를 해 준다고 한다. 옳다, 좋다. 우리는 내친김에 부탁을 했다. 그런데 기다리란다. 오늘 관리 사무소에서 입산 금지로 퇴짜 맞은 분들이 호텔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같이 가다가 눈에 띠기라도 하면 '이건 웬 차별이냐'고 들고 나올 수 있다는 말씀. 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호텔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 중에 우리보다 먼 곳에서 날아온 여행객은 없을 것이다.
독립전쟁과 혁명전쟁, 쿠바 역사의 성지 시에라 마에스뜨라
호르헤 씨는 혼자 털레털레 호텔 쪽으로 발을 옮겼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시에라 마에스뜨라 산은 안개로 덮여 있다. 이 곳은 비단 쿠바 혁명의 근거지였을 뿐 아니라 스페인 식민시절 쿠바 독립군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쿠바에서 가장 험준한 시에라 마에스뜨라는, 본의 아니게 쿠바 역사의 성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1956년 12월, 꼴로라도 해변에 '불시착' 한 82명의 정체불명의 선원들이 바띠스따(Batista) 정부군의 폭격과 소탕작전 속에서 옛 독립혁명의 근거지에 오른다. 처절한 사투 끝에 남은 사람은 11명 '쁘라스' 1. '1'은 아르헨띠나 출신의 외국인, 체 게바라다.
숨을 헐떡이며 돌아온 호르헤 씨는, 여행 내내 우리를 괴롭혔던 운명에 걸맞게도 '남는 차가 없다'는 비보를 들고 왔다. 불안하지만 우리 차를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름이 떨어지면, 호텔에 가서 조금 얻어 살 수 있다고 하는 호르헤 씨의 말을 믿기로 했다. 일단 움직이는 게 급선무다. 입장료는 일인당 11 쎄우쎄(단체 손님은 일인당 10 쎄우쎄로 모신다고 한다), 그리고 카메라 한 대당 4 쎄우쎄다.(나중에 인터넷에서 확인한 바로는 카메라는 2 쎄우쎄, 캠코더는 4 쎄우쎄라고 되어 있었다. 그새 오른 걸까? 아니면 2 쎄우쎄가 이 관리인 주머니로 들어갈 건가? 모르겠다.) 결국 우리는 한 대의 카메라를 포기하기로 했다. 그 때 통역을 해 주던 호르헤 씨가 카메라를 한 대밖에 못 가지고 들어가는 대신 우리에게 깜짝 놀랄 선물을 하나 주겠다고 귓속말로 속삭인다.
덧붙여서 산에서 내려오면 바로 먹을 수 있도록 식사 준비를 해 놓을지에 관해 물었다. 그것도 호텔 식당보다 싼 가격으로. 관리인이 눈을 슴벅이며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일인당 약 8 쎄우쎄 정도면 된다고 한다. 아하? 여기에서도 불법은 '자행' 된다. 관리인의 집에서 우리는 '불법' 식사를 하게 될 터였다. 그러나 뭐 어떠랴. 이 기회에 쿠바인이 사는 민가도 구경해보기로 한다. 지루한 호텔 식당 따위에서 질리도록 맛 본 서양식 식사에 10쎄우쎄나 들이느니 그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5개국어를 말하는 가이드
호르헤 씨는 재원임에 틀림없었다. 대학에서 영어와 프랑스어를 가르쳤다는 그는 영어, 프랑스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독일어와 아랍어도 할 줄 안다고 했다. 물론 아직까지 학생들을 가르치긴 하지만, 지금은 '관광 가이드 양성'을 목표로 하는 교육기관에 몸을 담고 있다. '아르바이트'로 하는 관광 가이드 수입은 원래 직업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수입을 보장해 준다. 이는 쿠바의 씁쓸한 현실이다. 뻬루에서도 느낀 바 있었지만, 쿠바에서는 더 심한 편이다. 우리가 지불한 11 쎄우쎄의 '입장료'에는 가이드 피까지 포함되어 있을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일인당 6 쎄우쎄, 즉 12 쎄우쎄를 팁으로 주어야 한다는 '계약'을 하고서야 호르헤 씨를 우리 가이드로 '모실' 수 있었다. 대학 교수의 수입은 일년에 많아야 700뻬소(물론 뻬소 나시오날이며 30US달러정도 된다.)를 넘지 않는다. 이 역시 요즘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는 쿠바의 임금 현실을 반영한 것이지만 쿠바에 들어온 서구의 다양한 상품들을 소비하며 살기에는 언감생심.
해발 약 900미터 지점에 있는 알또 델 나랑호 입구까지 오르는 길은 험하다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었다. 도로 한 가운데 아토스만한 바위가 우릴 보고 인사한다. 며칠 전에 굴러 떨어진 거라는데 아직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알또 델 나랑호 입구에서 차를 세웠다. 내 카메라를 차 안에 두고 나오자 호르헤 씨가 한 쪽 눈을 찡끗 하며 말한다.
"카메라 챙기세요. 제가 카메라를 한 대밖에 못 가져가는 대신 선물 하나 드린다고 아까 말 했죠? 대신 올라가서 다른 사람 눈에 띄면 안 됩니다"
깜찍한 선물이다. 카메라 한 대는 가방에 숨겼다. 온전히 비를 막아내지 못하는 무성한 밀림을 뚫고, 질퍽한 황토 길을 서걱서걱 밟으며 15분 정도를 들어가자 '꼬만단시아 데 라 쁠라따(Comandancia de la Plata)' 관리 사무소가 나왔다. 이 곳은 오스발도 메디나(Osvaldo Medina)가 살던 집이다. 오스발도 메디나는 피델이 게릴라 근거지를 마련하는데 큰 도움을 준 혁명 영웅인데, 사면초가의 혁명군을 위해 기꺼이 피난처와 음식을 제공해주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피델과 함께 끝까지 싸웠다. 뭐로? 음악으로. 오스발도 메디나는 음악가였다.
"오스발도 메디나는 무기를 다룰 줄 몰랐지요. 하지만 누구보다도 강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어요. 바로 음악, 그리고 정신이었죠"
그는 5인조 밴드를 만들어 혁명에 관한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의 노래는 산 중에서 외로이 사투를 벌이고 있는 수많은 게릴라들의 정신에 갑옷을 입혔다. 혁명 후에도 밴드 활동을 계속 했으며 그의 자식들 역시 메디나의 뜻을 이어 음악을 하고 있단다.
관리 사무소 주변에서 태양열 발전 시설을 보았다. 친환경적이어서라기보단, 이 곳까지 전기를 끌어 올 수 없는 물리적인 사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산 중에 있는 태양열 발전 시설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우릴 맞이한 안나(Anna)는 일한지 이제 3 개월 정도 되었다고 했다. 물론 5개월에 한 번 관리인이 바뀐다. 안나는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이 곳에 왔기 때문에 이젠 제 집처럼 익숙하단다. GP에 들어가는 한국 군인들의 사이클과도 닮았다. 우리가 출출함을 호소하자 바나나를 잔뜩 내어 왔다. 근처에는 바나나 농장과 커피 농장이 많다.
카스뜨로의 약속 이행, 혹은 정치적 제스처?
잠깐 숨을 돌린 후, 본격적인 산채 탐방이 시작되었다. 호르헤 씨의 안내에 따라 마리오 무뇨스 병원 (Hospital Mario Munoz)으로 향했다. 헐떡거리며 가는 도중에는 서로 말이 별로 없다. 진흙과 자갈이 뒤섞여 있는 길은 매우 미끄러웠는데, 중간 중간에 애기 주먹만한 말똥이 굴러다닌다. 비에 반쯤 용해된 상태라 밟는 느낌이 가히 좋지 않다. 참 나, 맑은 날을 택해 왔어도 힘들었을 길인데, 추적추적 내리는 는개 속에서 말똥이 뒹굴어 다니는 진흙 길을 걷고 있는 형편이라니. 게릴라들은 이런 길을 수 없이 다녔을 것이다. 오히려 평지를 걷는 것이 더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물리적인 고행은 정신적으로 무장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 일부러 이런 고행을 택한 건 아니다. 다만 고행을 모르는 살진 파시스트들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곳이라면 진흙 구덩이가 아니라 지옥이라도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혁명군과 정부군이 각각 맞이하게 될 운명은 애초부터 명백했을 수도 있다.
훌리안 뻬레스(Julian Perez)의 집은 이 곳, 꼬만단시아에서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된 곳이다. 그 역시 12인의 상처투성이 게릴라들을 도와주었다. 음식과 보금자리를 제공했고, 산중 생활에 관해 유능한 조언자가 되었다. 훌리안 뻬레스의 집 위에는 식량 저장고와 부엌으로 쓰이던 장소가 있다. 호르헤 씨의 말을 인용한다면 '이 곳은 모든 평등한 군인들을 위한 부엌이며 같은 재료로 같은 음식을 만들어 나누어 먹었다'고 한다. 조리 도구, 식탁, 의자 모두 당시에 있던 그대로 '오리지날'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호르헤 씨의 표정에는 비장함마저 엿보였다. 식당 옆엔 무기 저장고가 있다. '숙소'는 따로 없고, 해먹을 친 곳이 바로 잠자리가 되었단다. 하지만 피델은 개인 침대를 가지고 있었다. 사령관에 대한 예우였던 셈이지만, '평등'에는 어울리지 않다.
훌리오 뻬레스의 집 마당에는 사탕수수를 갈아 음료로 만드는 기구가 아직도 놓여 있었다. 호르헤 씨의 말버릇처럼, 이 역시 50년 전부터 있어왔던 '오리지날'이다. 피델은 훌리오 뻬레스의 집에서 시에라 마에스뜨라의 농민들에게 토지를 약속했다. 물론 혁명 이전의 일이었다. 농민들이 피델의 약속을 믿었다는 건, 혁명에 대한 그의 굳은 의지가 전염성이 있었다는 말이겠다. 물론 피델의 약속은 실현되었다. 정치 홍보를 위한 제스처였을지 모르겠으나, 어찌되었든 혁명 이후인 1959년 5월 15일에 직접 이 곳에 들러 뜰을 가득 메운 농부들 앞에서 토지 재분배 문서에 사인을 했다고 한다. 쿠바 농민의 날은 그래서 5월 15일이다. 그는 혁명이 작동하는 방식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50년 이상 산채를 지켜온 체 게바라의 수술대는 '침묵의 목격자'
마리오 무뇨스 병원에 들렀다. 1953년 7월 26일 몬까다 병영 사건(1953년 7월 26일, 카스뜨로를 비롯한 150 여명이 산띠아고의 몬까다 병영을 습격하나 실패한다. 이는 카스뜨로가 쿠바 혁명의 의지를 굳힌 사건이며, 이후 '7-26 운동'을 조직해 3년 후, 시에라 마에스뜨라 산 중으로 들어오게 된다. 변호사 출신인 카스뜨로는 재판에서 '역사가 내 무죄를 인정할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을 피델과 함께 주도한 마리오 무뇨스 머레이라는 의사의 이름을 딴 병원이다. 병원의 약품 보관소 안에는 이름 모를 주사 캡슐과 알약을 담은 병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아니 보관되어 있다기보다는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받은 지저분한 병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다는 게 맞겠다. 대부분 미제란다. 피델은 자주 변장을 하고 마이에미에 들어가 의약품, 라디오 등 여러 물품들을 사왔다. 혁명을 수행하는데 꼭 필요한 '무기'들이다.
수술실로 들어갔다. 말이 수술실이지 텅 빈 좁은 방에 침대가 하나 놓여 있을 뿐이다. 호르헤 씨는 말을 멋지게 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이 방에서 많은 게릴라들이 살아났고, 또 많은 게릴라들이 죽어갔습니다. 말하자면 이 수술대는 '침묵의 목격자' 입니다." 의사이기도 한 체 게바라 역시 이 곳에서 수많은 동료들의 죽음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전쟁이 지독한 이유는, 우리가 죽음밖에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술대 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았는지는 중요치 않다. 사람은 원래 '사는' 존재다. 호르헤씨는 "당신이 보고 있는 이것이 우리 역사입니다"라고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단언했다.
59년생, 소위 혁명 이후 세대인 호르헤 씨는 쿠바 혁명사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강하다. 그 또래 세대가 아마 혁명 교육의 혜택을 가장 많이 봤을 것이며, 체제에 대한 믿음도 가장 강할 것이다. 사실 이들이 90년대 쿠바의 식량, 에너지 위기를 극복해낸 주역이기도 하다. 이 '산채'의 모든 것들이 50여 년 전부터 그 자리에 있어왔던 '오리지날' 임을 강조하고 있는 호르헤 씨에게 조금 다른 것을 물어 보기로 했다. 만약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 산채의 게릴라들이 모두 체포되었다면 어땠을까요? 무례한 질문일까? 역사엔 가정이 없다지만, 혁명에 대한 맹목적 자부심이 어느 정도일까, 확인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예상 밖의 대답이 돌아온다.
"혁명은 비극이죠"
"네?"
"혁명이란 원래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겁니다. 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은 그 전에 얼마나 민중의 삶이 처참했는지 말해주는 것이죠. 사람들이 평등하고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면 혁명은 애초에 있질 않았겠죠. 우리는 이 역사가 바뀌길 바라지 않지만, 이런 역사가 다시 재현되길 바라지도 않습니다. 쿠바인들은 평화를 사랑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미국은 군인을 만들지만 쿠바는 의사를 만듭니다. 미국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죠. 누가 테러리스트입니까?"
이 쯤에서 할 말은 많지 않다.
('시에라 마에스뜨라' 대신 '시에라 마에스트라' 등으로 적는 게 바른 표기법이지만, 여행기라는 특성을 고려해 현지 발음에 최대한 가깝게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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