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인터넷에서는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이라는 검색어를 쳐 넣기만 하면 전쟁을 방불케 하는 급박한 소식들을 여럿 접하게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옭아맸던 검찰의 "작전"과 꼭 같은 절차로 한예종의 몇몇 진보적 교수들에 대한 문화부의 표적 감사, 징계, 퇴진이 이루어지고 있고 보수 언론은 실시간으로 이를 생중계하고 있다. 한예종을 방문한 문화부 차관의 "우파 정권 때는 우파 총장이 나와야"라는 말은 현 정부의 의도가 무엇인가에 관하여 더 왈가왈부할 필요조차 없도록 종지부를 찍는다. 전선의 한편에는 "협동과정과 융합교육 폐지, 이론과들의 축소/폐지, 한예종 해체"를 외치며 들이닥치는 문화부와 이를 후원하는 보수적인 교수, 지식인들이 있다. 그리고 다른 편에는 이에 항전하는 예술가 단체와 교수, 학생들의 "공부하게 해주세요."라는 애달픈 1인 시위, 토론회, 동영상, 만화 등이 연일 쏟아져 나오는 중이다.
공대 출신으로 작은 논술 학원을 운영하는 대학 선배에게 이 사태에 대해서 의견을 물었다. 예술계에 대해서는 잘 모를 줄 알았던 선배의 입에서 핵심적인 몇 마디가 흘러 나왔다.
"이번 홍대 미대 입시에서 석고 데생이 왜 없어졌는지 알아? 그냥 그림만 예쁘게 그리는 솜씨만으로는 안 된다는 거겠지. 잘 그린 정물화가 수천만 원 할 때 보통 사람들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도 못하는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수십억 원이나 하는 이유가 뭐겠어?"
입시 전문가이자 사업가인 선배다운 답변이었다. 그런데 예술 평론가나 비판적 지식인과는 판이한 이러한 접근법만으로도 요즘 문화부가 한예종을 옥죄는 사태의 진실이 금방 드러난다는 게 신기했다. 게르니카는 1937년 고향인 스페인에 머물던 피카소가 나치의 공군 폭격으로 같은 이름의 스페인 도시가 파괴되는 것에 격분하여 한 달만에 완성한 입체파 양식의 그림이다. 프랑스 정부에 의해 '좌파'로 분류된 피카소가 시민권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사슬을 만난다.
"좌파/반파시즘-입체파 걸작-엄청난 금액"
이것을 학문 영역으로 다시 고치면 좀 더 여러 개의 고리들로 세분화될 것이다. "문화정치-미학이론-매체에 대한 지식-실습과 비평-예술 경영" 쯤 되리라. 물론 이 사슬은 그저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같은 현대적인 복합예술이라면 서사창작이나 유비쿼터스적인 CG, 전자 음악 같은 새로운 고리들이 원래의 사슬에 더 추가 되어야 한다.
▲ 전선의 한편에는 "협동과정과 융합교육 폐지, 이론과들의 축소/폐지, 한예종 해체"를 외치며 들이닥치는 문화부와 이를 후원하는 보수적인 교수, 지식인들이 있다. 그리고 다른 편에는 이에 항전하는 예술가 단체와 교수, 학생들의 "공부하게 해주세요."라는 애달픈 1인 시위, 토론회, 동영상, 만화 등이 연일 쏟아져 나오는 중이다. ⓒ프레시안 |
2.
나는 여기서 다음 세 가지, '융합' '실기' 그리고 '혁신과 모방'에 관련된 주장을 하려고 한다.
먼저, 컨버전스(convergence), 융합, 통섭 같은 핵심어들을 좌우파 논쟁의 구도와 연루시키는 것은 참으로 낙후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단어들은 경영담론에서도 즐겨 사용하는 디지털 시대의 징표들로서 이를 냉전논리로 호도하는 것은 심지어는 신자유주의의 자본 효율성에도 맞지 않는다. 그동안 분리되어 있던 서로 다른 기술이나 학문 영역들을 융합하는 것은 제레미 리프킨의 말을 빌면 소유의 시대에 이어 등장한 접속의 시대를 나타내는 표상들이다. 대기업이 주도하는 디지털 '컨버전스', 대학입학시험의 '통합' 논술, 거리의 '퓨전' 레스토랑, 이종 전문가들의 연합체인 기업의 프로젝트 팀제도 등을 보라. 게르니카의 예에서 핵심은 각각의 고리가 아니라 사슬의 연결성(접속)이었다.
문화부에서 한예종에서 주력하라고 요구하는 영재 교육의 영재란 아마도 준천재일 터인데 천재성이란 각각으로는 이미 익숙한 요소들을 획기적으로 조합하는 능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무용가는 철학자가 되어야하고, 영화인은 정치가가 되어야 하며, 미술가는 엔지니어가 되어야 한다. 또한 이들 모두는 자신과 동료들의 성과를 체계적으로 기획/반성/개선하기 위해서 이론으로 무장한 비평가가 되어야 하며, 사회의 나머지 영역과 자신을 연결시킬 예술 경영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두 번째로, 다른 예술 종합 대학들과 구별되는 한예종의 설립취지가 "실기 위주"라는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한예종 설치령에 따르면 이 학교는 "예술실기교육 및 예술이론교육"을 하도록 되어 있다. 물론 설치령에는 실기중심 교육이라는 표현이 두 번 정도 나온다. 다시 말해서 예술실기와 예술이론교육을 병행하되, 전자에 방점을 두도록 한다는 얘기이다. 다른 학교는 이론없는 실기 교육(전문대), 또는 실기 없는 이론교육(대학)을 해왔다면, 한예종은 양자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가면서 실기의 창조성을 드높인다는 점에 정체성의 핵심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는 이론 중심과 실기 중심의 구별을 동일성 안의 어떤 분업 가령,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 사이의 노동분업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실기 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애초에 기존 대학들과는 패러다임이 다른 것이다. 여기서 실기는 기능적 숙련이 아니라 실천을 통한 종합, 문제해결 능력을 의미한다. 이론 중심인 기존 대학들의 학제가 지적 전통의 갈래에 따라 나누어지는 방식이라면 한예종의 교육체계는 연주하고 춤추며 연기하고 찍는 최종 실천을 중심으로 지적 전통들을 새롭게 재편해내는 콘셉트에 기반하고 있다. 이 점은 수능시험을 보지 않는 대신, 학생들이 예상치 못한 재료들을 주고 그것을 분석하거나 변형해서 자신이 수립한 개념을 표현하게 하는 한예종 조형예술과의 입학시험의 사례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난다. 당면한 문제의 실천적 해결이라는 관점에서 수행적으로 교육을 진행하는 예는 오늘날 많은 대안학교에서 발견된다.
일반대학과 한예종을 구별시키는 "이론과 실기"라는 기준은 이런 의미에서 분과학문에 기초한 기성교육시스템과 공공영역의 지원을 받는 학제연합적인 대안교육시스템의 차이로 이해하는 편이 옳다. 물론 대안학교는 나중에 정규학교에 대하여 혁신가 그룹으로 판명날 수도 있고 낙오자 그룹으로 판명날 수도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한 사회가 대안학교라는 제도를 자연스럽게 고안해내는 이유이다. 기성 교육제도는 검증된 신뢰성과 안정성을 가질 수 있는 반면 자칫 정체와 보수성의 늪에 빠져서 그것을 의식조차 못할 수 있다. 이때 사회는 민간영역에서든, 공공영역에서든 일정한 비용을 투자하여 미래를 타진하는 일종의 실험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실기 중심의 대안학교가 갖는 의미일 것이다.
세 번째로 한예종이 보여준 지난 10여년 간의 성적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해 한예종과 일반 예술종합대학의 관계는 이미 혁신가와 모방가의 관계로 정립 되어야 함이 어느 정도 판명난 것 같다. 영화 <추격자>로 작년도 흥행에 크게 성공한 나홍진 감독과 16년간 국내외 유명 콩쿠르에서 1위 수상자를 400여 명이나 낸 기록이 이를 입증한다. 연극 <이(爾)>와 뮤지컬 <빨래> 극본·연출을, 영화 <괴물>과 드라마 <겨울연가>의 시나리오를 맡은 이 또한 한예종 출신이었으며 <달려라 아비>를 쓴 소설가 김애란씨와 애니메이션 <뽀롱뽀롱 뽀로로>를 만들어낸 최현명·고세윤 씨도 이 학교 출신이었다.
한예종 출신인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 ⓒ프레시안 |
창조적 혁신이 다수의 기성 그룹에 의해서 거부되던 역사의 수많은 사례에서 성공적 실험은 항상 "이상하다"는 첫 인상을 모방자들에게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불평이 공권력이라는 아이템으로 무장했을 때 지금 한예종 탄압 사태에서 보이는 일종의 역사적 반동이 생겨나는 것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한예종이 작년 3월부터 추진해온 '예술-과학 연구소'인 U-AT(유비쿼터스-아트 앤 테크놀로지)통섭교육 사업 예산이 올해 들어 전액 삭감된 사건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다수의 모방자 집단이 소수의 혁신가 집단을 자신의 위액으로 소화해버리려는 끔찍한 시도는 '모방자됨'을 거부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3.
한예종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접하다보면 그 학교를 나온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가 풍기는 묵시적 분위기가 시의적절하고 뭔가 예언적 힘까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잊지 못할 장면은 연쇄살인마인 범인이 거주하는 양옥집 마당의 밤풍경이다. 마당을 덮은 흙 아래에는 정과 망치 같은 둔탁한 흉기로 절단된 가련한 희생자들의 신체 기관들이 여기저기 묻혀 있을 것이다. 개 한 마리가 피 냄새를 맡고 고기를 찾아 흙 위를 킁킁 거리며 돌아다닌다. 관객들에게 정말 무서운 것들을 시각적으로 보여주지 않는 대신, 그 역겨운 냄새와 감촉의 이미지를 어슬렁거리는 개를 통해서 느끼게 하는 감독의 연출력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앞에서 말한 예교련과 문화미래포럼의 작년도 주제발표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풍경이 연출된 적이 있다.
서울대 S교수: 한예종 해체를 우리가 직접 주장할 필요 없이 정부가 진행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된다. 다만 해체 이후의 인력과 기자재 배치 문제를 논의하는 공청회를 하자.
고양문화재단 J 전 전시감독: 과거 수도공대가 홍익대에, 서라벌예대가 중앙대에 넘어갔듯이, 해체 이후의 배치 걱정을 하지 말라. 부분 인수할 대학도 많고, 입찰을 붙여서 띄워주면 간단하다.
개인에게 사지가 절단되지 않고 법의 보호 아래에 살아갈 자유가 있는 것처럼 대학의 교육과정 또한 대학이 자율적으로 정하고 정부는 사후에 이를 승인하도록 되어 있다. 이는 고등교육법과 학교 설치령이 보장하는 것이며 이를 침해하면 거꾸로 불법행위가 된다. 외부 대학교수들과 정부가 한예종을 상대로 벌이는 합동작전은 20세기 초반 어떤 극단적 예외상황을 묘사한 영화를 연상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올 초에 개봉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체인질링>에서 범죄자와 LA 경찰은 사실상 공모하여 20명의 어린이를 학살 농장으로 보낸다. 아이들은 광기 어린 범인에 의해서 학교와 집에서 사라지고, 유괴를 호소하는 어머니는 언론 플레이에 몰두하는 경찰조직에 의해서 정신병원으로 보내진다. 경찰이 데려온 "체인질링" (뒤바뀐 못생긴 아이)을 어머니가 가짜 아이라고 끝까지 항변했기 때문이다. 여주인공 크리스틴(안젤리나 졸리)을 돕는 구스타프 브리글렙 목사(존 말코비치)는 기관총으로 무장한 50명의 LA 경찰 소속 부대가 쏘아죽인 시체들이 거리를 나뒹굴 때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범죄자를 처단하는 것이 아니라 거슬리는 경쟁자를 처단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법과 범죄 사이의 역할 분담 관계, 그 둘이 미국의 20,30년대 금주령 시대를 조성해낸 공범임을 통찰하고 있다. 그리하여 범시민적인 저항과 시위에 부딪쳐 경찰 간부는 청문회에서 닦인 후 파직 당하고, 범죄자는 내부자인 소년의 고발로 교수대에서 잔혹하게 죽어간다. 1920년대 말의 실화에 기반을 둔 영화 속 이야기는 그로부터 90년이 흐른 현재 한예종을 둘러싸고 유사한 양상으로 반복되고 있다. "해당 예술 분야 안에서 기능적 숙련에 집중하는 이론 없는 영재교육"이라는 기묘한 정체성은 문화부가 "이것이 원래 네가 낳았던 아이"라며 한예종에게 받기를 강요하는 일종의 체인질링이다. 만약 학생들이 속한 몇몇 학과가 없어지고 융합/이론교육을 주도했던 교수들이 징계를 받는다면 이는 영화 속 아이와 어머니가 받았던 박해와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문화부의 이번 감사결과 처분 요구 행위는 대학이 스스로 결정하고 연구할 자유를 보장한 고등교육법과 학교 설치령을 위반하는 불법행위이다. 나아가 그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학문의 자유까지 파괴하는 행위이며 외부 대학교수들의 주장 역시 대학의 자율성을 파괴하는 행위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체인질링>을 통해 경고한 다음 메시지를 우리는 분명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자유주의'적인 국가가 자행하는 실질적 전체주의와 민간의 음침하고도 야만적 행위는 합쳐졌을 때 일종의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그 효과는 아이들의 뼈가 발굴되던 몽환적이고 참혹한 양계장 신이 상징하듯이, 비슷한 시기 대서양 건너편에서 파시스트들이 주도한 홀로코스트 상황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헌법/고등교육법/학교 설치령 모두를 위반하는 한예종에 대한 불법적 탄압은 민주주의가 몰수되고 공적 전체주의와 사적 야만이 득세하는 더 커다란 흐름의 일부일 뿐이다. 이는 엄중한 시민적 저항에 부딪칠 것임에 틀림없으며 자유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대중적 힘에 의해서 반드시 교정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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