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민족국가 이전의 민족
민족, 민족국가, 민족주의에 관한 논의는 출구를 찾기는 고사하고, 무엇이 주제인지에 관해 약간의 가닥을 잡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대단히 심하게 잡다한 요소들이 뒤엉켜있는 상태다. 여기에는 민족이 무엇인가, 국가가 무엇인가와 같은 사회적 개념의 의미에 관한 인식론적 질문에서부터 근대란 무엇인가, 근대국가가 언제 시작되었느냐고 하는 역사적 질문, 그리고 서유럽의 역사적 경험이 나머지 "기타" 지역에 어떤 함의를 가지며 가져야 하느냐와 같은 현실정치적인 질문들이 뒤섞여 있다. 그 와중에 물론 사실이나 이치만이 아니라, 명예욕, 지배욕, 물욕, 열등감, 위신, 원한, 소원, 혼동, 오해, 착각 등이 뒤죽박죽 엉켜있기도 하다.
이렇게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 능력은 내게 없다고 말해야 맞을 것이다. 따로 책을 쓴다면 모를까, 어쨌든 여기서 민족과 관련되어 엉켜 있는 실타래를 풀 수는 없다. 하지만 한국민족주의의 과잉 때문에 우리 정치의식에 어떤 피해가 발생하는지를 분별하려면, 아주 기본적인 수준의 가닥은 필요하다. 그래서 이 장에서는 예외적인 사람을 빼면 누구라도 인정해야 할 것으로 보이는 최소한의 수준에서 민족국가라는 현상이 유럽과 한국에서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민족국가(nation-state)란 하나의 민족이 하나의 정치적 단위, 즉 국가를 이루고 살아가는 형태를 말한다. 그런데 국가라고 하는 정치적 단위의 경계를 어디에 있는지 현실적으로 별로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바스크, 북아일랜드, 쿠르드, 티베트 분리독립운동이라든지, 여타 수많은 영토분쟁지역과 같이 현재 국가의 경계에 관해 현실에서 논란은 계속되고 있지만, 적어도 쿠르드 국가나 북아일랜드 국가가 현재 존재한다고 볼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국가라고 하는 정치적 단위는 뭐니 뭐니 해도 주어진 영토와 주민에 대해 배타적인 주권, 즉 유사시 강제력을 독점할 수 있는지에 따라 경계가 정해진다. 물론 독점적인 강제력이란 국제적으로 얼마나 공인되느냐에 따라서도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라크가 1990년 쿠웨이트를 침공한 것은 미국을 비롯한 34개국이 개입해서 수포가 되었지만, 중국이 1950년에 티베트를 침공한 일은 불씨가 언제든 잠복해 있지만 국제적으로 대충 묵인된 상태다.
국가가 무엇인지를 따지는 이론적인 논쟁은 언제나 끝없이 가능하다. 그러나 국가란 국제법과 국제정치의 현실에서 공인받는 실력에 의해서 정해진다. 반면에 민족은 국제법적인 단위가 아니다. 민족이란 역사 서술에서 사용되는 학술용어이자, 특정한 여건에 처한 개인들에게 다양한 방향의 호소력을 가지는 정치적 상징이다. 따라서 학자들 사이에, 그리고 정치인들 사이에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될 수밖에 없는 성격을 가진다.
민족국가가 언제 최초로 출현했는지는 학자들 사이에서 치열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주제이다. 혁명 후 프랑스 또는 영국에서 기원을 찾는 사람도 있고, 잉글랜드의 경우 그보다 훨씬 먼저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인구 대다수가 서로 하나의 공동체에 속한다고 여기는가(민족의식), 권위와 복종으로 구성되는 수직적 체계가 있는가(정치통합), 분명한 경계가 획정되어 있는가(영토), 등 세 가지 기준이 보통 중요시되는데, 각 기준마다 어느 정도 충족되어야 하나의 민족국가라고 일컫기에 충분한지 논쟁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족국가라는 개념 자체가 쓸모없다고 보지 않는 한, 유럽의 경우 적어도 10세기 이전에 민족국가가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혁명 후의 프랑스가 하나의 민족국가였음을 부정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 대신에 민족이 국가를 만들었는지 국가가 민족을 만들었는지에 관해서는 입장 차이가 크게 벌어진다. 원초론자(primordialist)들은 민족과 같은 자연적인 공동체가 원래 있다가 거기에 정치조직이 갖춰져서 민족국가가 생겼다고 본다. 반면에 근대론자(modernist)들은 근대 또는 중세후기에 근대적이거나 준-근대적인 정치조직이 만들어졌고, 그 관할권에 속하는 영토와 주민들이 하나의 "민족"으로 통합된 결과가 민족국가라는 입장이다. 이 쟁점을 파고들어가는 것은 이 연재의 주제와 거리가 멀다. 여러 번 지적했듯이, 정치란 세속적인 현실의 사업이기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쟁에 대한 해답을 기다릴 필요가 전혀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국민족주의가 어떤 면에서 과잉이고, 그 때문에 어떤 문제가 초래되는지를 논의하기 위해 원초론자와 근대론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론적 논쟁에 대한 정답이 선결조건으로 필요하지는 않다.
그러나 "민족과 민족주의를 연구하는 진지한 역사가는 결코 확신에 찬 민족주의자가 될 수 없다"고 한 홉스봄(Eric Hobsbawm)의 말처럼, 사실 원초론은 민족주의 운동가나 정치인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지향이다. 연구자라고 한다면 스미스(Anthony Smith)처럼 매우 많은 유보와 조건을 붙이는 가운데 원초론의 논점 일부를 고수하는 정도를 넘기는 어렵다. 단, 한국의 경우에는 많은 학자들이 내심 무의식적으로 대단히 강력한 민족주의적 지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연구자라면 민족주의자가 되기 어렵다는 홉스봄의 말 자체를 "서구민족주의의 특징"이라고 일축할 수 있을 것처럼 느끼기가 쉽다 (예컨대 최장집, 「한국민족주의의 특성」, 최상용 외, 『민족주의, 평화, 중용』(까치, 2007, p. 28). 이와 관련하여 우리 지식인들이 충분히 보지 못한다고 여겨지는 두 가지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민족주의에 관한 서양학계의 논의들이 한국과 같은 경우에 직접 적용되기 어려워 보이는 일차적인 까닭은 지리적 이동성이 유럽과는 크게 달랐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일례로 잉글랜드와 같은 경우 5-6세기에 게르만의 일파였던 앵글족과 색슨족 그리고 쥬트족 등이 건너가 먼저 정주하고 있는 주민들을 내쫓거나 정복하거나 동화되면서 왕국을 세웠고, 또 11세기에는 노르만디 세력이 건너가 왕족을 형성했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면 현대 잉글랜드라고하는 민족국가의 역사적 연속성이 1066년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반면에 한국의 경우는 7세기 신라에 의한 통일은 한반도 내부세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고, 그후에도 어떤 외부세력이 사소하지 않은 정도로 대거 유입되어 혈통이 섞인 경우는 없다고 일반적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유럽에서는 설사 민족국가가 근대 또는 중세 후기에 생겼다고 하더라도, 한반도에서는 적어도 7세기에 민족국가가 이뤄졌다고 봐야 할 것처럼 보인다.
유럽과 한반도의 사정을 비교할 때 이런 차이가 두드러지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차이는 두 지역 사이에 역사적 사정이 다름을 말해줄 뿐이지, 정치적 통합 이전에 자연적 공동체로서 민족이라는 것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백제인과 신라인이 민족이라는 테두리로 묶여서 하나의 공동체에 속한다는 관념은 사실 일차적으로 삼국통일의 의미를 민족사적 관점에서 찾은 후대 지식인들의 것이다. 당대 계백이나 연개소문과 김춘추가 "같은 민족"의 일원으로 여기면서도 서로 싸웠던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적과 동지의 구분에 따라서 서로 싸웠는지는 확인이 필요한 문제지만, 불행히도 우리로서 확인할 길은 거의 막혀있다. 나아가 통일신라가 얼마나 민족국가의 이념형에 부합하는지를 측정하려면, 저런 장군들 휘하에서 창칼을 들고 싸우다 죽거나 다친 병졸들, 그들의 가족으로 구성되는 일반 민중들이 그 전쟁을 "민족국가 건설"이라고 하는 대의명분을 위한 역사적 고비로 이해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적군을 물리친다는 마음이었는지도 확인이 필요하지만, 이런 확인은 불가능에 가깝다.
무엇보다도 "민족"이라는 단어가 당시에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 장에서 상세하게 논의하겠지만, 한국어에서 "민족"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고 확인된 사례는 1897년이 최초이고, 그 의미는 단순히 "인민"에 가까운 느슨한 것이었다. 물론 이런 사정은 "사회", "권리", "자유", 등등, 수많은 쌍음절 한자어에 공통된다. 그리고 가령 14세기 조선말 어휘에 "사회", "권리", "자유" 따위 단어가 없었다고 해서 실제로 사회, 권리, 자유가 없었다는 결론은 성급한 것이 틀림없다. 딱히 그런 용어는 없었다고 할지라도 행태와 제도와 습속에 이른바 "기능적 등가물"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7세기 이전 삼국의 지식인이나 민중들이 서로를 "하나의 민족"으로 인식했는지 여부를 "기능적 등가물"이라는 관점에서 확인하려면, 두 고비를 넘어야 한다. 먼저 자신과 상대에 대한 당대인들의 인식이 어떤 용어로 매개되고 있었는지를 알아야 하고, 다음으로 그런 용어들이 "민족"이라는 근대한국어 단어와 기능적으로 등가물이 될 수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이런 확인은 지금은 물론이고 장차 충분한 시간을 두고 생각하더라도 불가능에 가깝다고 나는 예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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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유럽에서도 포르투갈처럼 인구구성이나 영토에서 상대적으로 큰 변동을 겪지 않고 오랜 기간 동안 정체성을 유지한 사례가 없지 않다. 포르투갈은 13세기 중엽에 구획된 국경이 거의 변하지 않고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그래도 13세기의 포르투갈이 하나의 민족국가였는지는 역사적 증거에 입각해서 확인이 필요한 문제이다. 위에서 제시한 세 기준 가운데, 영토구획이 분명하다고 할지라도, 정치통합과 민족의식은 어느 정도였는지 확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치통합이란 단순히 하나의 정부가 있다는 데서 지나, 중앙의 시책과 규범이 방방곡곡에서 얼마나 충실하게 준수되는지를 봐야 한다. 민족의식이 수백 킬로미터 떨어져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기려면 니체의 문구로 "가까운 자에 대한 사랑"이 "멀리 있는 자에 대한 사랑"으로 연결되는 매개 장치가 반드시 필요하다. 근대론자들이 문맹률의 감소라든지 인쇄매체의 확산과 같은 근대기술의 바탕을 중요시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지리적으로 수백, 또는 경우에 따라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사는 사람들이 서로 "하나의 민족"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공통되는 정치규범에 준수할 의무를 느끼려면 소통을 담보해줄 물리적 기술적 기반이 필요한데, 그런 기반은 오로지 중세말기 또는 근대초기에나 가능해졌다는 말이다.
더구나 13세기 포르투갈이나 7세기 통일신라가 각각 하나의 정치적 공동체였다는 사실로부터 동시에 각각 하나의 민족공동체이기도 했었음을 유추하고자 한다면, 그러한 유추의 함의가 원초론을 지지할지 근대론을 지지할지도 한번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근대론의 피상적인 주장은 민족국가라는 현상이 근대에 시작되었다는 것이지만, 보다 깊은 곳에는 사실 혈연을 기반을 삼는 자연적 공동체라는 것이 모두 일정한 규모 이상이 되면 정치적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다분히 그 공동체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덧입혀지는 상징일 때가 많다는 지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각에서 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가 원래 하나의 민족이었기 때문에 삼국통일이 이뤄진 것이 아니라, 삼국통일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의 민족"이라는 상징이 강조될 필요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물론 이런 경우 상징은 "날조"는 결코 아니다. 가족, 씨족, 부족의 경계란 족내혼과 족외혼의 경계, 또는 땅위나 바다위에 긋는 국경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무지개 색깔처럼 연속적인 것이지, 자연계에 선명한 경계선이 존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다음 장에서 용어를 검토하면서 다시 한번 다룰 것이다.
둘째로 지적할 점은 한국민족주의의 경우 "민족국가"라는 말에 대단한 위신을 결부시키는 경향이 짙다는 사실이다. 이는 물론 식민주의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심성이다. 그러나 민족국가를 민족의 위신과 결부시키는 민족자결주의란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한 독일인들의 복수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어디까지를 하나의 민족국가로 묶느냐에 따라 위신이 높아지거나 낮아져야 할 선천적인 까닭은 전혀 없다. 당사자들이 위신을 결부시키면 위신문제가 되는 것이고, 결부시키지 않으면 위신문제가 아닐 뿐이다. 나는 지금 한국사회에서 위신문제라고 흔히 간주되는 사안들 가운데 상당한 수가 위신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당연히 위신문제"라고 보는 사람들 가운데, 보다 많은 수가 위신을 걷어내고 실제 이익의 관점에서 한국민족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의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가지고 주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이상은 나폴레옹 전쟁을 치르면서 영국과 프랑스 사람들에게 슬슬 내면화되기 시작했다. 전쟁기에는 항상 위신문제가 결부될 수밖에 없는데, 이미 혁명을 거침으로써 한 나라의 국민 또는 민족의 일원이라는 의식을 가진 영국인들과 프랑스인들은 전쟁을 왕실이나 귀족간이 아니라 민족간의 충돌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와중에 피히테는 1806년과 1807년에 걸쳐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한 베를린에서 『독일 민족에게 고함』을 강연했다. 그로써 게르만 민족의 위신을 고취하고 프랑스에 대한 적개심을 북돋웠다. 그때 피히테는 언어와 민족을 결부시킨 헤르더(1744-1803)에서 전거를 구했지만, 영국학계에서는 피히테가 헤르더를 자의적으로 인용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위신을 위해 민족간 서열을 매기는 성향은 헤르더와 상관없는 피히테의 창안이라는 것이다.
한국민족주의에서는 일제침략의 부당성을 알리려고 노력하는 와중에 조선이 하나의 자주적인 정치체였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와중에 조선이 하나의 민족국가로서 통일왕조를 이루고 있었음을, 누가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인도나 인도네시아 또는 기타 아프리카 여러 지역의 사정과 대비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민족국가를 이루지 못한 상태였던 인도나 인도네시아에 비해 우리는 보다 역사적으로 선진한 단계였다는 둥, 그러므로 먼저 국제적인 눈길을 받아야 옳다는 식의 수상한 서열매기기가 은근히 퍼지게 된 원인이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식민주의를 배격하려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서양이 만들어 놓은 단선적 역사관에 편승한다는 것은 그다지 자랑스러운 일은 못되는 것 같다. 인도나 인도네시아의 현재 정치적 단위는 물론 제국주의의 침탈이 있기 전에 비해서 다르지만, 민족국가 이전에 자연적 공동체로서 민족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종전에 있었던 다수의 지방적 정치단위들이 곧 민족적 단위였다고 보지 말아야 할 까닭도 없다. 나는 그런 정치체들을 민족이라고 부를 필요가 전혀 없다고 본다. 민족의식, 정치통합, 영토구획 등, 위에 제시한 근대국가의 기준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민족국가를 그처럼 근대적 요소에 비춰서 바라보지 않으려는 원초론자라면, 오히려 인도나 아프리카에 식민세력이 찾아가기 전에 존재했던 형태들에 비교해서 한국의 조선이나 통일신라가 특별히 민족국가로서 발전된 형태라고 봐야 할 까닭도 없다고 말해야 일관적일 것이다.
요컨대 "민족국가"나 "민족"이라는 말을 나름대로 사용하기로 하면, 통일신라를 민족국가로 부르고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합해서 하나의 민족으로 불러도 안 될 것은 없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그렇게 부를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당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했었다는 결론이 나올 수는 없다. 나아가 우리가 한반도에서 민족국가와 민족의 역사를 까마득한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잡을 수는 있겠지만, 바로 그러는 순간 그것들이 근대적인 현상으로서 가지는 모든 의미는 사라진다. 단적으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법 앞에 평등이라는 이념을 통해 하나의 민족으로 통합된다는 그림이 단순히 통일신라나 고려를 민족국가라고 우리가 불러주기만 하면 그 위로 겹쳐질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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