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가 "작가 퇴출"이라는 기괴한 방식으로 방송을 만들겠다고 한다. 그 자리를 PD가 메우라고 한다. 그래서 말은 "PD 집필제"다. PD가 작가들에게 구상원고를 맡기지 말고 자기가 직접 하라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방송 내용을 짜고 그 내용을 방송으로 옮기는 제작 책임자가 원고 작성을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그럴 만한 일이 있고 그렇지 못한 일이 있다. 그랬기에 방송을 위한 구성작가 시스템이 그간 지속되어 왔던 것이다.
여러 사람이 각자 나누어 통합적으로 해야 할 일을 한 사람이 하게 되면, 그 결과가 어찌 될 것인지 자명해진다. 방송 내용의 질적 저하는 물론이고 방송 제작자들의 노동 강도와 피로감은 막중해져간다. 급속도로 변해가고 있는 현실을 따라 잡으면서 새로운 내용을 구성하고 출연진을 섭외하고 내용을 정리해나가는 일은 이렇게 하면 자연 정밀해질 수 없고 오차와 실수는 누적되어간다.
당장에 작가들의 해고도 문제이고, 이런 방송의 피해는 방송을 듣는 대중들에게 돌아간다. 지금 KBS가 재방송 틀기 횟수가 많아지고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지 이런 사정을 들여다보면 짐작이 충분히 가는 일이다. 한 마디로 방송 제작 환경을 스스로 악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구성작가는 목소리를 만드는 사람이나 목소리가 없고 그림을 그리나 그림 속에 없다. 방송을 보고 듣는 일반 대중들에게 구성작가는 들리지 않는 소리요, 보이지 않는 영상이다. 대중들에게 이들은 거의 언제나 "부재중(不在中)"이다. 대중의 뇌리에는 진행자와 출연자만 존재한다.
한편 PD는 구성작가와 한 몸으로 움직이나 PD가 엄연한 정규직에다 지휘자의 위치에 있는 반면, 작가는 비정규직에 PD의 요구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처지다. 결국 구성작가는 이런 모든 방송의 틀 속에서 가장 약한 지점에서 자신을 버티고 있다. 어찌 보면 방송은 이들 작가들의 허리를 밟고 서 있는 형국이기도 하다.
이렇게만 말하면 작가들의 형편을 비관적으로만 말하고 있는 느낌이 들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일의 보람과 대우의 공정성이 전제될 때에는 역할의 차이로 정리가 될 수 있다. 각자가 하는 일이 다르니 대중들에게 보여야 할 사람이 있고 뒤에 숨어 있어야 할 사람이 따로 있다. 그런데 문제는 작가들의 아이디어와 헌신을 그동안에도 손쉽게 취해 방송자산으로 활용해오더니 이제는 아예 퇴출이라는 방식으로 이들이 설 무대를 해체해버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그간의 기여에 대해서도 묵살해버리는 조처일 뿐만 아니라 PD를 비롯한 제작진들에 대해서도 부당한 노동을 강요하는 일이기도 하다. 제작에 수개월이 걸리는 장기다큐의 경우 PD의 집필능력이 요구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작가의 전문적 훈련에 따른 기여가 필요하다. 하물며 매일 나가는 방송에서 각자의 역할을 분화시켜 서로 점검하고 내용을 체계화해서 짜 나가야 하는 경우에 구성에 따른 원고 작성을 한 사람에게 집중시켜 구성에서 섭외와 현장 제작까지 모두 맡겨버리고 만다면, 그건 아무리 탁월한 사람이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뿐만 아니라 방송 상황이라는 것이 언제 어느 순간에 다루어야 할 내용이 갑자기 바뀌어야 하는 경우도 무수한데 이걸 PD 혼자 감당하라는 것이 얼마나 무리인가는 방송 현장에 있어본 사람이라면 그 당장에 알 수 있는 일이다. 방송제작을 진행하면서 신경을 곤두세워 일해야 할 사람을 다른 일까지 덤 태기 씌우듯 일하게 하면, 언제 어디서 어떤 방송사고가 발생할 지 가늠할 수 없게 된다. 작가가 수시로 보완작업을 해도 방송 사고가 나는 경우가 있는데 작가를 아예 현장에서 진짜로 부재중으로 만들고 어떻게 수준 있는 방송을 할 수 있다고 믿는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PD 집필제가 시간이 걸려도 성공을 해서 다기능 PD가 등장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극소수의 경우에 해당한다. 그런 PD가 있게 되면 그와 함께 일하게 되는 작가의 수준도 높아지고 그런 팀의 구성은 방송의 장래를 밝게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 해도 "PD 집필제"에만 온통 의존한 일은 아니다.
PD 집필제는 작가와의 팀 구성을 보다 수준 높게 만들어가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일이지 작가 배제라는 것을 기반으로 방송제작을 하려는 것은 그렇게 능력 있는 PD도 조만간 능력 고갈의 지점까지 끌고 가는 악수다. 그러는 사이에 방송의 질은 떨어지고 그 피해를 입는 대중들은 그런 방송을 점차 외면해가게 될 것이다.
애초에는 작가가 그 첫 희생자고, 그 다음은 PD이고 현실에서는 대중인 것 같지만 결국 가장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은 대중들에게 외면당하는 방송 그 자체다. 지금 그렇지 않아도 정치상황에 끌려 다니면서 방송의 신뢰도를 스스로 떨어뜨려 대중들의 비난의 표적이 되고 있는 KBS가 이 일까지 추가하게 된다면, 이건 작가 수준의 문제로 머물지 않고 KBS 자체의 앞날이 위태로워지는 사건의 시작이다.
작가 없는 방송은 방송 아닌 방송으로 가겠다는 의미가 된다. 대중들이 모르겠지 하고 방송을 제작하는 대중들에 대한 무례와 모독이다. 방송 제작 현장의 땀과 눈물을 모르는 채 작가퇴출이라는 어이없는 선택을 하는 것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그 결정을 내린 사람들의 책임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인지,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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