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강희남(89) 목사가 지난 4월 작성한 글이다. 그는 예고한 대로 지난 7일 네 줄 분량의 유서를 남기고 자택에서 자결했다.
고인의 장례식은 통일·시민사회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10일 아침 8시 시신이 안치된 전북대 장례식장을 출발해 서울 명동 향린교회에서 영결식을 치른다. 화장을 한 뒤 전주시 효자동 기독교 납골당에 안치될 예정이다.
▲ 전북대병원에 차려진 분향소. 조문객이 고 강희남 목사 영정에 분향을 하고 있다. ⓒ프레시안 |
"이명박 정부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고 있다"
8일 전북대 병원은 고 강희남 목사의 빈소를 찾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민주당 천정배, 정동영 의원 등 정치인부터 한국진보연대 한상렬 고문, 이강실 대표, 기독교 관계자 등 생전에 고인과 연관을 맺은 이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30년 넘게 고인과 관계를 유지해온 이강실 대표는 그의 죽음을 두고 "한평생 통일과 민주주의만 생각해오던 분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며 "이는 자신의 목숨을 던져 민중의 항쟁을 촉구하려는 고인의 의지"라고 설명했다.
고인은 자결 직전까지 줄곧 통일운동 탄압과 남북 관계의 후퇴를 보면서 시종 한숨을 내쉬었다. 고인의 맏아들 강익현 씨는 "최근 남북관계 악화, 민주주의 훼손을 보면서 이명박 정부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려놓고 있다고 줄곧 한탄을 하셨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그의 자결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죽음을 입에 올렸다. 촛불이 꺼지고 곳곳에서 탄압이 들어오던 작년 10월, 그는 정권의 소통 불능과 남북 관계에 희망이 없음을 한탄하며 처음 죽음을 입 밖으로 꺼냈다.
"고인이 마지막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 목숨, 하지만 그의 신념은 살아 있어"
고 강희남 목사는 특히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후퇴하는 남북 관계가 견디기 힘들었다. 이것은 그가 지난 4월 작성한 유서에도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이 글에서 "신념으로 오랫동안 싸워본다고 했지만 보수주의 매국노들 세상에서 이란격석이 아니던가"라며 "이 치욕스러운 역사를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고 답답함을 호소했다.
▲ 장례삭장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 천정배 의원, 정동영 의원, 민주노총 임성규 위원장 등 수많은 인사들이 보낸 화환으로 가득했다. ⓒ프레시안 |
이강실 대표는 "현실에서 가셨구나 하니 마음이 아프지만 충격은 아니었다"며 고인의 죽음을 예상했음을 시사했다. 유가족도 그의 죽음 앞에 담담했다. 강익현 씨는 "아버지는 작년 10월과 올해 5월 두 차례나 죽음을 생각하셨다"며 현 시국에서 고인의 죽음은 피할 수 없었던 것임을 밝혔다.
▲ 고인을 떠올리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조문객. 이들 앞에는 생전 고 강희남 목사가 쓴 유서가 붙어 있다. ⓒ프레시안 |
전주에서 대학교를 다닐 때 여러 차례 강희남 목사를 강연자를 초빙했던 서호성(37) 씨는 고인의 죽음을 두고 "이러한 현실이 안타깝다"며 "하지만 세상이 하도 뒤숭숭하다보니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세상이 되어버렸다"고 푸념했다.
비록 예고된 죽음이었지만 안타까운 것은 어쩔수 없는 현실이다. 전주에서 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오기석(42) 씨는 "고인이 돌아가신 것을 세상은 잘 알아주지 않는 것 같다"며 "사람들은 평소 그분의 목소리를 듣지 않더니 이젠 그의 죽음도 몰라주는 듯하다"고 애통해했다.
민주노동당 당원인 이명진(가명·32) 씨는 "고인이 마지막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 목숨"이라며 "결국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싸울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내몰려 있다"고 답답함을 호소했다.
전북 지역 시민단체 관계자는 고인의 죽음을 두고 슬퍼해야 할 것이 아니라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 기성세대가 해야 할 일을 원로들이 하고 있다"며 "결국은 우리가 고인을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말했다.
"평소 고인은 학생들이 우리의 미래라며 학생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 오늘(7일) 전주 마라톤 대회에 참석했다가 한반도기를 목에 묶고 마라톤을 하고 있는 고등학생들을 만났다. 비록 고인은 돌아가셨지만 그분이 생각하던 신념은 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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