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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카인들…"내가 이들을 지키는 자입니까?"

[철학자의 서재] <홉스>

내가 이들을 지키는 자입니까?

비가 내리는 5월 어느 날, 용산 참사 현장에서 예배가 있었다. 그 예배에서 어느 목사님이 성서를 인용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성서에 보면 처음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어김으로 낙원인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그때부터 인간 사회 속에는 죄악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오기 시작합니다. (…)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가장 처음 생긴 일이 무엇입니까? 살인입니다. 그것도 원수들 사이에서 살인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형제 사이에 살인이 일어납니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 카인과 아벨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 시기심이 일어난 카인이 아벨에게 우리 함께 들로 나가 하루를 즐기자고 꾀어내어 돌로 쳐 죽입니다. 그러고는 그 시체를 땅 속에 묻어 버렸습니다. 증인도 없고 증거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벨의 억울한 피가 묻힌 땅이 하늘에 호소를 합니다.

이 피맺힌 한의 소리를 들은 하느님이 카인에게 묻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러자 카인은 시치미를 딱 떼고 '제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목사님은 떨리는 목소리로 "현 정권이 카인과 마찬가지로 용찬 참사에 대해 '내가 이들을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반문하면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지금의 대한민국의 현실을 400여 년 전에 살았던 홉스가 본다면 뭐라고 말할까? 그의 대답은 아마 대한민국은 더 이상 국민을 지키는 국가 공동체가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홉스가 보는 "국가의 임무는 자연 상태를 평정하고 평화로운 공존을 보장하며 행동을 규제하는 보편적 법제의 테두리에서 구성원 누구나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하는 공동체를 확고히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 상태로의 회기

▲ <홉스>(볼프강 케스팅 지음, 전지선 옮김, 인간사랑 펴냄). ⓒ프레시안
홉스는 자연 상태를 설명하기 위하여 인간 존재론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다. 왜냐하면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이 유지되려면 우선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생존, 즉 자아유지이기 때문이다. 이 전제 조건은 "물질과 권력이 한정되어 있는 조건 하에서 물질 중심적 소유욕구 및 권력에 대한 욕구"를 형성한다. 그리고 그 욕구는 상호 간에 갈등을 일으킨다. 갈등은 심화되면 상대방을 파멸시키고 무력화시키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 상태에서는 도덕적으로 나쁜 공격 혹은 좋은 공격은 없다. "스스로의 관심사를 충족시키는 데 유용하다는 의미에서 합리적인 것은 폭력을 행사할 준비가 되어 있는 태도이다." 물질과 권력의 한정성 때문에 인간들은 적대적 감정 속에서 갈등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타인을 공격하는 것 뿐만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을 공격하려는 의도를 포착했을 때는 소극적 방어가 아닌 적극적 공격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이익의 최대화 원칙을 준수하고 최대의 이익이 기대되는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인간은 이처럼 자기보존을 위하여 합리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이성을 지니고 있다. 자연 상태에서의 이성은 자기보존이라는 최대의 목적을 위하여 온갖 힘을 다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자연에 순응하는 이성이 작동하는 그 곳은 어떤 도덕적 반성이라든지, 인간이 만든 질서로서의 법은 없다. 다만 서로에 대한 공격으로 자신을 보존하려는 '이성'만이 작동할 뿐이다.

오늘날 한국이라는 국가는 제 살 터를 지키겠다는 철거민을, 비장애인과 똑같이 교육받고 이동할 권리를 보장하라는 장애인을, 그리고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보장하라는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그들의 가장 낮은 요구는 '국가'를 위협하는 극악무도한 것이기에 '국가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하여 통제하고 제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 설립의 제 1목적을 자연 상태로부터 벗어난 삶의 '안정성' 추구에 두는 홉스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국가는 더 이상 국가로서 인정받기 힘들 것 같다. 자연 상태에서 국가로의 이행은 '계약'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이 계약은 "공동의 평화와 보호를 위해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수단과 권한을 이용하고 행사"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따라서 앞서 열거한 국민들의 삶이 오히려 계약 당사자인 국가 권력으로부터 안정성을 위협받는 위치에 있다면 이 계약은 이미 그 내용을 위반하는 것이다.

물론 이미 국가로 형성된 이후에 국가가 발휘하는 힘이라는 것이 공시적으로 평화 유지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계약 이행 단계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인간의 가장 낮은 단계인 자아유지라는 범주까지 침해하는 것은 국가 공동체의 구성원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국민에 대한 절대적 권력의 투쟁 상태'에 두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이는 또다른 형태의 자연 상태로 회기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기심의 발현을 '합리적 이성'으로 간주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국가 구성원 자신의 자유와 안녕을 위해 형성한 국가 권력은 낯선 힘으로 다시 돌아와 자신에게 맞선다. 이때 국가는 자신을 포괄하는 존재가 아닌 스스로의 인격성을 형성하는 국가 안의 또하나의 국가의 모습을 가진다.

무원칙적인 법제의 적용

홉스는 자연 상태를 권리의 상태 및 자연법 상태라고 간주하는 사상을 배격한다. 그는 안티-자연법적인 입장을 내세운다. 영원히 타당하고 불변하는 자연법 및 이성법의 규정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케스팅은 홉스를 최초의 실정법주의자로 평가한다. "국가 외에는 어떤 입법기관도 있을 수 없으며, 오직 국가가 정한 법만이 그 효력범위에서 무엇이 정당하고 정당하지 않은가를 결정한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홉스가 요구하는 국가법의 효력 발생 조건이다. 그 조건은 정치권력의 정당성을 찾는 부분에서 확인 할 수 있다.

홉스에 있어 정치 권력의 정당성은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의 자유로운 동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을 때에만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럴 때에만 권력의 합법화와 구속력이 보장될 수 있다. 하지만 홉스에 있어 그러한 힘은 "자연 상태를 평정하고 평화로운 공존을 보장"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어야만 한다는 점에서 국가법의 무원칙성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만약 특정 정치 권력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스스로의 이름을 '국가'라 명하고 그 절대성을 내세운다면, 그 절대성이 공존하는 공동체로서가 아니라 자신들만의 '평화로운 보존'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홉스가 말하는 국가법은 '회기한 자연 상태'에서는 신뢰하지 않는 상대를 공격하는 날카로운 무기로 변한다. 그런데 이 무기는 또하나의 정당성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원래적 의미의 국가는 자연 상태를 벗어나 계약된 상태이기에 스스로 자연 상태로 되돌아가는 모순을 피하고, 국가 이성 안에서 운영된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 정당성을 위해 가장 우선되는 전제조건은 '법에 대한 물신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법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며 그 내용이 아무리 부당할지라도 꼭 준수해야만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국가 스스로도 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원칙으로 내세움으로써 물신성을 더욱 강화한다. 이제 국가법은 모든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근거가 된다.

오늘날의 법률적 용어로 이것을 '법의 지배'(Rule of Law)라 부른다. 따라서 법은 우리 모두의 정신이기에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자기-파괴이고 공동체-파괴 행위가 된다. 그 다음으로 입법권력은 자신들이 원하는 모든 형태들을 구속할 수 있는 법률을 제정하거나 개정하려고 한다. 몇몇 구체적 사회적 형태를 모델로 그네들은 관념적으로 규정적인 추상적 법률을 만든다. 마치 신의 위치에서 인간사회를 완벽히 굽어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말이다.

홉스 또한 국가법을 계약 내용의 담지체와 그것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간주함으로써 절대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홉스가 개인의 자유를 제약하는 계약이 '책임과 정치적으로 복종할 의무를 가진 인간의 본성적 자유'로부터 나온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적 자유'를 굳이 계약 상태의 국가 안에서 실현할 이유가 사라지거나 또 그 자유가 국가에 방해를 받는다고 판단되어질 경우는 '지배계약'은 유지되기 힘들어 보인다. 즉, 홉스가 말한 국가의 존재이유는 국가 구성원이 국가 안에서 자신의 행복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거나 여타의 외적 힘으로부터 침해를 당한다고 판단되었을 경우에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인정받지 못하는 국가가 강조하는 '법'은 구성원에 의해 물신성을 탈피한다. 그때 국가 구성원들은 국가법에 대한 불신의 뜻을 세우며, 실천으로서의 저항을 형성하기도 한다. 이제 신의 위치에서 가졌던 자신감은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하여 국가권력은 입법 권력을 통해, 심지어는 공권력을 동원하여 금이 가고 있는 독을 원칙 없이 무차별적으로 메우려 한다. 이는 하나의 인격성으로서의 국가권력이 자기보존과 안정성 유지를 위하여 온 힘을 다 하는 것이다.

반성적 정치 철학

사회를 계약관계로 해석하고 정치 및 사회기구의 구속력을 공동체 구성원의 보편적 동의로 환원시켜 정치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이 홉스의 의도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홉스의 정치철학의 핵심을 삶의 안정성을 목표로 한 국가공동체의 조건을 제안하고자 했다는 점에 놓고 보면 현대 정치의 반성 지점은 목적을 사상하고 수단의 절대성만을 강조하는 데 있다.

즉, 오늘날의 국가가 공동체로서의 국가가 아닌 국가의 탈을 쓴 자연 상태에서의 권력이라는 점과, 오로지 자신들의 이기적 생존욕구만을 목표로 하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안정성' 혹은 '평화'를 최상의 국가 임무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국가 운영에 있어 초점을 강력한 질서체계의 맹목적인 확립이 아닌 '삶'에 옮겨 놓을 때 가능하다.

이는 홉스를 넘어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성을 통해 그 본질이 결정된다. 홉스는 자기보존이라는 개별성 안에서만 인간의 본질을 찾는다는 점에서 이 부분을 간과하고 있다. 오히려 홉스가 말하는 자기보존은 삶을 구성하는 총체적 관계망 안에서 이질적인 형태로 들어난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주목해야 할 지점은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관계망'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을 떠받들고 있는 토대들에 주목하여 한다.

이는 법의 절대성 혹은 국가권력을 삶의 행복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강제하려 힘에 맞서려 할 때 유효하게 적용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힘들은 분명 앞서 말한 토대를 양분으로 자라난 것이기 때문이다. 반성하는 정치철학은 기존의 담론들을 해체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철학 외부에 자리 잡고 있는 그러면서 그 철학을 구성하고 있는 현실적인 삶의 토대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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