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부터 해마다 개최됐던 인권영화제가 올해 개막 이틀을 남겨두고 느닷없이 상영 장소가 없어지는 상황에 처했다.
인권단체 '인권운동사랑방'이 주최하는 제13회 인권영화제는 오는 5일부터 7일까지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청계광장 관리를 맡고 있는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은 3일 인권운동사랑방에 공문으로 장소 이용 불허를 통보해 왔다.
인권영화제 측은 "공단에서 '청계광장이 시민단체들의 집회 장소로 쓰여 부득이하게 시설 보호 필요성이 있어서 당분간 광장 사용이 어렵다'고 통보했다"며 "인권영화제를 위해 지난 2월에 광장 사용 신청을 했고, 150만 원 가량의 사용료도 지불한 상태에서 이틀 전에 느닷없이 장소를 사용할 수 없다는 통보에 황당할 뿐"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시설관리공단 관계자는 지난 3일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이번주에 청계광장에서 계획됐던 행사가 다 취소됐다"며 "어차피 해봤자 광장 주변에 경찰 차벽이 서 있어서 행사하는데 지장을 초래한다"고 해명했다. 이 관계자는 "일단 행사보다도 시국이 더 문제인 상황이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사람이 많이 모이면 그런 상황이지 않나"라며 장소 이용 허가 취소가 행사 내용과 무관하다고 말했다.
청계광장은 지난달 28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서울광장과 함께 경찰 버스로 봉쇄된 상태였다. 이 봉쇄는 4일 새벽 서울광장과 동시에 해제됐다. 그러나 공단 관계자는 4일 "현재까지 결정이 달라진 건 없고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 같다"며 "문화행사를 보고 시민 즐길 수 있어야 하는데 다르게 갈 우려도 있고, 상황도 날마다 변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反이명박 영화제' 보도 하루 뒤 경찰 연락…이어 '취소' 통보
이처럼 경찰버스가 없어졌는데도 여전히 공단의 인권영화제 개최 불허 방침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이 같은 방침이 단순히 행사의 편의를 위한 조처가 아니라는 의혹도 일고 있다. 통보 며칠 전인 지난 1일 보수 성향의 인터넷신문인 <독립신문>은 "도심거리서 '反이명박' 영화제 열린다"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싣고 "이른바 촛불 진영이 현충일 기간중 서울 도심거리에서 '13회 인권영화제'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금번 영화제는 反이명박 집회의 성격을 띨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며 "상영작들 중에도 촛불 집회·용산 참사 등 이명박 정부를 직접적으로 겨냥한 내용을 다룬 작품들이 있다"고 보도했다.
보도 하루 뒤인 지난 2일, 경찰은 인권영화제 사무실로 연락을 했다. 주최 측은 "지난 2일 서울경찰청 정보과에서 전화가 걸려왔다"며 "불허해도 강행할 것이냐고 묻는 전화였고, 이후 하루만에 공단에서 불허 통보를 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만약 공단에서 불허를 결정했다고 해도, 주최 측이 아닌 경찰에 먼저 알리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불허 통보 과정에서 경찰과의 합의가 이뤄진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해 인권영화제 역시 비영리 목적의 영화도 심의를 받아야 하는 영비법(영화및비디오물에관한법률)을 거부하면서 상영관을 찾지 못해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렸다. 인권운동사랑방 명숙 활동가는 "영화관에 이어 이제 광장에서마저도 쫓겨나게 됐다"며 "영화조차도 누군가의 입맛에 맞아야 하는, 표현의 자유가 철저하게 끊어진 사회가 됐다"고 말했다.
인권운동사랑방과 인권영화제 측은 4일 인권영화제 청계광장 개최 불허를 규탄하는 내용으로 청계광장에서 기자회견을 개최할 예정이다. 또 오는 5일 저녁 예정대로 청계광장에서 개막식을 열겠다고도 밝혔다.
한편, 영화제 측으로 연락을 했다고 알려진 서울경찰청 정보과 관계자는 자리를 비워 확인이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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