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속의 부족국가 은(殷)나라 왕실 세계를 보면 형제 간 계승이 태반이다. 이에 비해 그 뒤의 주(周)나라는 부자 간의 계승이 엄격히 지켜졌다. 즉위 1년 미만에 왕이 죽은 경우 세 차례를 빼면 형제계승이 거의 없었다. 부자 계승 원칙은 그 이래 중국 왕조 체제의 뼈대가 되었다. 아무리 큰 능력과 세력을 가진 인물이라도 적장자(嫡長子)가 아니면 보위(寶位)를 쳐다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갈등의 소지를 원천봉쇄한 것이다. 이 원칙은 조선에도 전해져 태종, 세조처럼 실력으로 왕위를 차지한 임금들에게 큰 정치적 부담을 주었다. 주나라에서 부자 계승이 확립된 것은 누구보다 주공(周公)의 공로였다. 은나라를 정복한 무왕(武王)은 죽을 때 동생 주공에게 어린 아들 성왕(成王)의 섭정을 맡겼다. 얼마 후 다른 동생들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은나라 잔당과 결탁해 반기를 들면서 주공이 조카 성왕의 자리를 넘본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이 반란을 평정함으로써 주나라 체제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부자 계승의 원칙이 기정사실이 된 후세 사람들은 주공이 성왕 모신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다. 그러나 주공 당시에는 힘 있는 아저씨가 어린 조카의 왕위를 빼앗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하의 자리를 지킨 것이 공자가 주공을 성인(聖人)으로 받든 까닭이다. 주공의 처신은 도덕적으로뿐 아니라 시스템공학의 관점에서도 의미 있는 것이다. 형제 계승의 시스템에서는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이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추장의 의미에 임금 자리가 머물러 있었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국가의 힘이 임금 개인의 능력 범위에 제한을 받는다. 이 한계를 뛰어넘는 천자(天子)체제를 세운 주공을 중국 역사의 개창자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대통령이 행정 집행의 기능에 그치지 않고 국가의 모든 일에 초월적 권력을 행사해 온 대한민국 전통은 추장이 거느리는 부족국가 수준이다. '박정희 신드롬'을 보거나, 대통령 또는 후보의 가족 문제가 허구한 날 정치권을 뒤덮는 것을 보거나 우리 국민이 대통령에 거는 기대는 줄어들지 않는 것 같다. 쌓이고 쌓인 실정과 비행으로 대통령의 권위가 만신창이가 된 오늘날이기에 더욱더 답답하다. (1997년 8월) |
▲ 노무현 전 대통령은 '실패한' 대통령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정상화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프레시안 |
국가 원수로서 최초의 '대통령(president)'은 1776년 미국 독립과 함께 취임한 조지 워싱턴이었다. 18세기 초 공화국으로 독립한 중남미 국가들이 흔히 대통령제를 채택했고, 유럽에서는 1848년 프랑스의 제2공화국이 처음으로 대통령제를 실시했다. 공화정이 확산됨에 따라, 그리고 옛 식민지들의 독립에 따라 대통령을 두는 나라는 계속 늘어나 지금은 150개국에 이른다.
대통령제가 공화정을 시작하는 나라에서 널리 선택받는 이유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익숙해 있던 왕의 존재를 대통령이 대신해 주기 때문이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하지만, 국민은 누군가가 과거의 왕처럼 포괄적 책임을 져주어야 마음을 놓을 수 있다. 대통령은 공화제 국가의 국가원수 치고는 전제군주와 너무 비슷한 존재다.
선진국 중에는 대통령 중심제가 별로 없다. 유럽 국가에는 대통령이 있더라도 대개 국가 원수로서 상징적인 존재일 뿐이며, 정부 수반을 겸하는 프랑스의 대통령도 제한된 범위의 권력만을 가지고 있다.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나라는 대개 정치적 후진국들이다. 미국만 해도 부시 하나 잘못 뽑아놓고 나라 꼴이 얼마나 망가졌나 보면 정치제도 면에서는 선진국이 못 된다. 토크빌 시절 이후 세상의 변화를 따라오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미국은 3권 분립과 견제·균형의 원리가 정권 운용에 어느 정도 통하는 편이다. 그밖의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는 대개 대통령이 절대에 가까운 권력을 쥔다. 우리나라 경우도 그렇지만, 헌법상으로 3권 분립을 규정해 놓아도 사회의 민주 역량이 부실한 상황에서는 행정권의 현실적 힘이 다른 2권을 압도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미국의 입김 속에 세워진 나라이기 때문에 미국을 따라 대통령 중심제를 취했다. 그 후 60여 년간 대통령의 존재가 이 나라에 가져온 득실을 한 번 따져보자.
우선 대통령의 자리가 독재자에게 이용당한 사례들을 생각해야겠다. 대통령 한 사람에게 집중돼 있으면 헌법상의 주권재민 원리가 사문화되기 쉽다는 사실을 대한민국 역사가 확인해 준다.
분단 건국을 주도한 이승만은 통일국가 제창자들 대부분이 보이코트한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후 그가 국민 직선제로 개헌을 행한 것은 국회의 지지를 유지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쥐고 있는 행정력으로 쉽게 주무를 수 있는 길을 찾은 것이다. 박정희는 군사정권이 실질적으로 지속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대통령 자리에 오른 뒤 힘과 돈으로 그 자리를 지켰다. 유신 후 '체육관 선거'로 바꾼 데는 비용 절감의 의미만이 있을 뿐이다.
대통령이 어느 정도 요건이 갖춰진 선거를 통해 뽑히게 된 것은 1987년 이후의 일이다. 대통령제의 문제점은 여기서부터 더 극명해진다. 그 전까지는 뽑는 과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서 뽑힌 사람이 엉망이었다고 볼 여지도 있지만, 선거가 큰 하자 없이 치러졌는데도 대통령의 존재가 국가와 사회에 도움이 안 된다면 이건 다른 차원의 문제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15년 동안 대통령을 둘러싼 권력 구조는 독재시대의 유산을 이어받고 있었다. 비자금과 공권력을 이용해 헌법상의 권한을 넘어서는 힘을 대통령이 지킨 것이다. 개인 비리를 위해서든, 선의의 정책 추진을 위해서든 초헌법적 권력을 대통령이 행사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 어두운 전통을 마감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소위 권력기관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스스로 삼가고 비자금으로 지지 세력을 조종하지도 않았다. 대통령으로서 그의 역할은 두 겹이었던 셈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업무 수행, 그리고 대통령직 정상화를 위한 보이지 않는 노력.
일상적 업무 수행에서 그는 성공한 대통령으로 평가하기 힘들다. 심심찮게 '노빠' 소리를 들을 만큼 그를 높이 평가하는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인간 노무현'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지만 '대통령 노무현'에 대해서는 쉽게 성공을 우길 수 없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남북관계부터 그렇다. 전향적 자세를 임기 내내 견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임기 말에 이르러서야 정상회담을 치를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성과를 충분히 정착시킬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의 퇴행 정책에 쐐기가 약하게 되었다. 정상회담이 늦어진 데는 투명성을 위해 뒷거래를 마다한 이유가 클 것이다.
탄핵도 그렇다. 정당한 탄핵 사유가 없었다는 사실은 '관습 헌법'이란 기발한 창작을 해낸 헌법재판소조차 인정한 사실이다. 탄핵은 당시 야당의 부당한 행패로 인식되어 직후의 총선에서 그 응징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국정에 공백이 생긴 데는 노 대통령의 책임도 있다. 대통령이 돈과 권력으로 선거에 은밀히 개입하던 관행을 배척한 결과다.
대연정 제안에도 같은 문제가 작용했다. 열린우리당이 국회 과반수를 확보한 상황에서도 그는 '속도전'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대통령의 초헌법적 권력을 깎아내면서 국회의 헌법상 기능을 제대로 살려내려고 꾸준히 노력했으며, 대연정 제안도 그 뜻을 담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권력 조정을 원하지 않는 한나라당의 거절을 당했을 뿐 아니라 여당의 반발까지 불러와 레임덕 현상을 가속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대통령 노무현'은 실패자였다. 퇴임 후 가족, 친지, 측근 등 아끼는 사람들과 함께 형편없는 곤경에 빠져든 대통령을 어떻게 성공한 대통령이라고 말할 수 있나? 퇴임 1년도 안돼 남북관계, 복지·분배 등 주요 정책이 모두 거꾸로 뒤집히기에 이른 대통령을 어떻게 성공한 대통령이라고 말할 수 있나?
그러나 보이지 않는 측면, 대통령직을 정상화한다는 측면에서는 큰 성과를 이룩한 5년이었다.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성과"라고 평한 이도 있거니와, 나는 "그런 식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무사히 퇴임할 수 있었다는 것이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5년간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대통령직을 둘러싼 권위주의 타파를 향한 것이었다고 나는 본다. 대한민국 정치사의 가장 중요한 인프라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이고 그만큼 큰 보람을 느낀 일이 대통령직 정상화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른 정책은 정권이 바뀐 뒤 뒤집히더라도 현실 조건에 의해 합리적 한계가 있을 것이고, 권위주의 타파는 비가역적 문화 전환이라고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퇴임 후 1년간 그는 권위주의의 부활을 목격했다. 되살아난 권위주의가 경제정책과 대북정책을 독단으로 몰고 가고 민주 질서를 파괴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평화적이고 해학적인 '촛불 문화'는 그의 체취를 풍겼다. 그러나 군화발과 물대포 앞에서 너무 무력했다. 그리고 촛불을 미워하는 자들이 그를 노리고 달려들 때, 진보 진영에서도 그의 곁에 선 사람은 많지 않았다.
'대통령 노무현'의 어려움은 '제왕적 대통령'이기를 거부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는 대통령직을 5년간 종사할 하나의 직업으로 택했다. 계약 기간 끝나고는 고향에 돌아가 유유자적하며 농촌 발전이라는 또 하나의 인프라 사업에 힘을 쏟으려 했다. 그런데 제왕적 대통령 노릇 요구가 봉하 마을까지 따라왔다. '통치 기록' 반환 요구, 비리 수사를 빙자한 정치적 탄압, 모두 그를 제왕적 대통령으로 간주한 공세였다.
한국 사회는 정말로 아직까지 제왕적 대통령을 필요로 하는가? 대통령 바뀌고 1년 남짓 사이에 바뀌어진 상황을 보면 그런 것도 같다.
그러나 이것이 정상적 상황이 아님을 사회가 깨달을 때가 되었다. '제왕적'이란 말의 근거가 된 근대 이전의 '제왕'도 한국 대통령처럼 제왕적이지는 않았다.
앞에 붙인 글에서 보듯 3000년 전 사람들도 절대권력이 지닌 문제점을 알아보고 있었다. 임금의 자격을 능력보다 혈통에 둠으로써 최고 권력의 의미를 제한했던 것이다. 근대적 변화를 겪은 뒤의 서양인들은 '동양적 전제정치(oriental despotism)'를 손쉽게 조롱했지만, 그 전제정치란 것이 수천 년간 질서의 뼈대 노릇을 할 만큼 조화와 균형을 갖춘 것이었다. 한국의 대통령제는 그보다 훨씬 미개한 상태로 돌아가 있다.
이명박의 대통령직 수행에 불만과 분노를 가진 사람들이 그의 하야를 요구한다. 나는 하야를 요구할 생각이 없다. '제왕적' 권력을 포기하고 헌법대로 직책을 수행할 것을 요구한다. 하야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 거다. 정 힘들면 대통령직 없애버리든지. 노 대통령처럼 정성을 쏟고도 정상화시킬 수 없는 자리라면 차라리 없애는 게 나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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