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핵심관계자가 그랬다. "대통령 사과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정세균 민주당 대표의 대통령 사과 요구에 대해 이렇게 잘랐다.
이명박 대통령도 그랬다. 오늘 아침 라디오 연설에서 민주당이 요구한 사과의 말, 그리고 자유선진당이 요구한 유감의 말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 유족에게 짤막하게 위로의 말만 전한 뒤 북한 핵문제와 한-아세안 정상회의에 연설 내용의 대부분을 할애했다.
어렵지 않다. 이명박 대통령이 뻣뻣하게 나오는 이유를 살피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동아일보'의 황호택 논설실장이 그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가장 노무현스러운 죽음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며 "사즉생으로 절벽 아래로 한 몸 던지면 자신이 일으켜 세워 보존해 가고자 했던 가치와 이념을 살려낼 수 있다고 판단했을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승부수'로 이해한 것이다.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가 그랬다. "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과 국민장 시국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국가와 법치의 원칙을 여러 차례 포기했다"며 "노무현 측에서 제기한 주장들, 예컨대 수사가 정치보복이었다는 주장에 대하여도 대응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정당한 '법치'로 바라본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을 에워싼 보수세력의 시각이 이렇다. '노무현 수사'는 지극히 정당한 법치다. '노무현 서거'는 지극히 정치적인 승부수다. 그래서 허용할 수가 없다. 이명박 대통령의 사과는 법치를 허무는 일이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승부수에 말리는 일이다.
벗어날 수 없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런 보수세력의 시각에서 탈출할 수가 없다. 그러면 정권기반이 붕괴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을 위해 덕수궁 앞을 내주고, 영결식을 위해 서울광장을 열어준 일만 갖고도 맹비난하는 보수세력이다. 이명박 대통령을 '배신자, 겁쟁이, 장사꾼'이라고 비난하면서 '하야'를 입에 올리는 보수세력이다. 보수세력의 기류가 이런데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노무현 수사'의 정당성을 스스로 부정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 ⓒ청와대 |
한 마디 부연해야겠다. 강경 보수파의 목소리를 보수세력 전체의 시각으로 일반화하는 건 아닌지 마저 살펴야겠다.
결론부터 말하자.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다. 이른바 온건 보수파로 분류할 수 있는 한나라당 내 소장파의 동태를 보면 그렇다.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시민 분향소에 나와 조문하지도 못했고 정부의 책임을 묻지도 못했다. 기껏 한다는 게 박희태 대표의 바지자락을 붙들고 늘어지는 일이다. 박희태 대표가 물러나야 국정 쇄신의 물꼬가 트인다면서 용퇴를 거론하는 게 전부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 안 한다.
거듭 확인할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사과는 언감생심이다. 기대할 바가 못 된다. 기대할 바가 되지 못할 뿐 아니라 기대할 필요도 없다.
지난해 촛불시위 때를 보면 안다. 이명박 대통령이 두 번에 걸쳐 대국민 사과를 했지만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촛불이 꺼진 후에 이른바 'MB본색'이 노골화됐다. 진정성이 스며있지 않은 사과는 그냥 통과의례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다른 점을 보자. 보수세력의 시각에서 도출할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이다.
실현될지 모른다. 민주당이 요구한 '노무현 수사'에 대한 국정조사를 여권이 받아들일지 모른다.
보수세력의 시각에 따르면 국정조사를 안 받을 이유가 없다. 비리가 있어서 수사했고, 혐의가 있어서 소환조사했다고 하지 않는가. 꿀릴 게 전혀 없다. 어쩌면 국정조사는 '노무현 수사'의 정당성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될지 모른다.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실장이 한탄했던 현상, 즉 '피의자' 노무현이 졸지에 '순교자'가 된 세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전환점이 될지 모른다.
때마침 '조선일보'가 보도했다. "검찰 수사과정에 대한 야당의 국정조사 요구를 수용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했다.
환영할 일이다. 여야가 국정조사에 합의한다면 하나의 매듭을 풀 수 있다. 치졸한 정치보복과 정당한 법치라는. 결코 융화될 수 없는 두 주장을 저울에 올릴 수 있다. 검찰의 수사방식과 수사내용을 검증할 수 있다.
생산적이기만 하다면 그렇다. 지금까지 봐왔던 통과의례식 국정조사, 시간끌기식 국정조사의 병폐를 극복할 수만 있다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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