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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죽지 않는…

[철학자의 서재] <삶에 집착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논어>

정치란 땅을 골고루 나누어주는 데서 시작하는 것

"백성을 사랑하는 정치는 반드시 땅을 골고루 나누어주는 데서 시작한다. 빈부가 고르지 않고 백성들을 가르치고 양성하는 일정한 법도가 없으면 비록 여러 가지 다스리는 방법을 말한다 하더라도 모두 억지일 뿐이다. 세상에서 이 제도를 시행하기 어렵다고 하는 자들은 늘 부자들의 토지를 갑자기 빼앗을 수 없다는 말을 핑계로 댄다. 하지만 이 법이 시행되면 기뻐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참으로 제도를 잘 정비하여 몇 년 동안 시행하면 한 사람도 처벌하지 않고 옛 제도를 회복할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임금이 시행하지 않는 것일 뿐."

명백하게 토지 균등 분배 정책의 실현을 촉구하는 이 대목은 어떤 책에 나오는 글일까? 중국 고전에 밝은이라면 아마도 유교의 이단아로 불리는 이지가 스스로 '불태워버려야 할 책'이라고 제목을 붙였던 <분서>를 떠올리거나, 걸핏하면 공자에게 딴죽 걸고 맹자를 비아냥거렸던 왕충의 <논형>쯤을 검색 대상으로 생각할지 모르겠다. 물론 이 나라의 국방부나 공안기관이라면 그게 무슨 책이든 이 대목만 보고도 대뜸 불온서적으로 지목할 것이 틀림없고.

그러나 이 구절은 놀랍게도 중세유학의 체계를 세웠던 철학자이자 주자학의 교조인 주희가 사서오경 중의 하나인 <맹자>를 풀이한 <맹자집주>에 나오는 내용이다. <맹자집주>는 전통사회에서 글을 읽는 이라면 누구나 입에 줄줄 욀 정도로 읽었던 책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맹자집주>를 포함한 <사서집주>는 과거 시험을 보려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였기 때문이다.

위의 인용구는 본래 장재의 제자였던 여여숙이 자신의 스승이 실제로 맹자의 정전제를 시행하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웠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고 기록한 행장의 일부이다. 결국 맹자가 말한 정전제는 지주의 편에 서 있었던 주희의 입장에서 볼 때조차도 명백하게 반지주적인 토지 균분제였음을 이 대목은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아마 이 내용을 그대로 옮겨서 이 나라 국회에 가서 주장하면 당장 좌파,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힐 것이다. 그렇다면 맹자가 좌파이고, 주희가 좌파이고, 여여숙과 그의 스승 장재가 모두 좌파인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성장이 아닌 분배를 이야기하기만 해도 좌파로 지목하는 이 나라의 현실에서는.

맹자야 일찍이 '백성들이 가장 존귀하고 국가의 상징인 사직은 그 다음이고 임금은 가장 가벼운 존재'라 했고, 걸핏하면 혁명을 이야기하던 불온한 사상가였으니 그렇다 치고, 공자는 어떤가?

군자는 나눌 줄 아는 사람

위대한 교육자로 알려진 공자가 가장 중시했던 과목은 덕행이다. 그는 덕성의 함양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수양하면서 이상적인 인간상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적 인간을 '군자'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논어>의 기록에 따르면 생산물을 공정히 분배함으로써 사회 성원들이 서로 편안한 관계를 맺도록 하는 사람이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이며 이를 군자로 규정하고 있다.

이를테면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군자는 이익을 함께 나누지만 소인은 이익을 독차지한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군자는 다른 사람과 친밀하게 지내지만 이익을 위해 편을 가르지 않으며 소인은 이익을 위해 뭉치지만 다른 사람과 친밀하게 지내지는 않는다(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고 한 것이 모두 그런 예이다.

이에 따라 군자가 추구하는 가치를 추려보면 의(義), 화(和), 주(周) 등이고 소인이 추구하는 가치는 동(同), 이(利), 비(比)이다. 의(義), 화(和), 주(周)는 모두 같은 뜻이다. 물론 그 반대의 가치를 뜻하는 동(同), 이(利), 비(比)도 같은 뜻이다.

군자가 추구하는 가치 중에서 첫 번째로 꼽는 가치는 의(義)이다. 한자에서 의(義)자는 양(羊)자와 아(我)자가 합쳐진 글자이다. 양은 식량을 뜻하는 양고기이고 아(我)는 뾰족한 물건으로 고기를 균등하게 썰어내는 모습을 그린 글자이다. 따라서 의(義)자는 양고기를 균등하게 나누어 먹는다는 뜻을 나타낸다. 반면 소인이 추구하는 이익을 뜻하는 한자 이(利)는 벼를 뜻하는 화(禾)자와 칼을 뜻하는 도(刂)자가 합쳐진 글자로, 다 자란 벼이삭을 칼로 잘라내는 모습을 그린 글자이며 기본적으로 탈취(奪取)한다는 뜻이 있다. 이에 따르면 군자는 분배를 중시하고 소인은 남의 것을 빼앗더라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라 할 수 있다.

군자가 추구하는 또 다른 가치인 화(和)는 다 자란 벼를 뜻하는 화(禾)자와 입을 뜻하는 구(口)자가 합쳐진 글자인데 옛글자에는 화(禾)자와 공(公)자가 합쳐진 글자로 되어 있다. 공(公)자는 본디 웃는 입모양을 그린 글자이다. 따라서 화(和)는 수확한 벼를 나눠먹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반면 소인이 추구하는 동(同)은 같은 무리를 뜻하는 한자로 자신과 견해가 같은 사람끼리 이익을 독차지하는 배타적 이기심을 뜻한다.

주(周) 또한 군자가 추구하는 가치인데 이 경우는 통이 훨씬 크다. 주(周)자는 토지를 나타내는 토(土)자와 공(公)자를 합친 글자로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인 토지를 공유하는 모습을 도식화한 글자이기 때문이다. 반면 소인이 추구하는 비(比)자는 죽은 사람을 나란히 뉘어 놓은 모양으로, 중요한 사람이 죽으면 다른 사람을 함께 생매장하는 순장을 뜻한다. 그래서 비(比)는 끔찍한 사랑이다.

공자는 또 "착한 사람(善人)이 나라를 백 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면 잔인한 사회적 분위기를 극복하고 사형을 없앨 수 있다."고 했는데 착한 사람이라고 할 때의 선(善)자는 양(羊)자와 공(公)자가 합쳐진 글자이다. 역시 양고기를 나누어 먹는다는 뜻으로 위에서 말한 의(義)자와 같은 뜻이다. 선(善)자는 때로 아름답다는 뜻인 미(美)자와 통용하는데 미(美)자는 양(羊)자와 대(大)자가 합쳐진 글자이다. 곧 양이 큰 것을 아름다움이라고 한 셈인데 양이 크면 많은 사람이 나눠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사람들이 미(美)자에 흔히 부여하는 의미하고는 참으로 하늘과 땅 차이다.

군자는 부자의 부를 늘려주지 않는다

이상의 문장에 대해 다른 견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공자는 결정적으로 "군자는 급한 사람을 도와주지 부유한 사람을 이어주지는 않는다(君子周急不繼富)"고 하여 부자의 부를 늘려주는 행위를 적대시하는가 하면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생산량이 적은 것을 걱정하지 말고 생산물이 고르게 분배되지 않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有國有家者 不患寡而患不均)"고 하여 사회적 문제는 생산물의 부족이 아니라 생산물의 불공정한 분배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부족을 문제 삼지 않고 불균등을 문제 삼는 공자는 분명 분배론자다.

이 나라의 성장론자들은 늘 뭔가가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물이 부족하다고 사기를 치면서 댐을 만들어야 할 구실로 삼고, 멀쩡한 강이 죽었다고 거짓말 하면서 국민들이 반대하는 대운하 공사를 강행하려 한다. 심지어 운하를 만들어 배를 띄우면 물이 맑아진다고 주장하니 나무를 베어내면 공기가 맑아진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공자가 보기에 군자가 되기는 물론 글렀을 뿐만 아니라 소인이 되기조차 힘들다.

공자는 가난한 사람,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 등 사회적 약자도 함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예를 들어 "일 잘하는 사람을 등용하여 일 잘 못하는 사람을 가르친다",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여 부정직한 사람을 가르치면 부정직한 사람을 정직하게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이 나라에서 걸핏하면 무한경쟁을 들먹이는 교육자들은 능력이 떨어지는 학생은 아예 뽑질 않고 학교의 정책에 반대하는 학생들은 학교에서 쫓아낸다. 공자가 보기엔 교육자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위의 몇몇 문장은 자기네들이 이해하는 공자의 사상과 맞지 않으므로 후대에 가필된 것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만약 그렇다면 같은 내용을 표현하고 있는 다른 문장도 함께 부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부정하다보면 <논어>는 그런 사람들이 좋아하는 단 한 줄만 남지 않을까.

완벽한 공자는 없다. '나의 공자', '너의 공자'가 있을 뿐이다. 아니 또 있다. '당신들의 공자', '나의 공자', '너의 공자'는 인정할 수 있지만 다양성을 허용하지 않은 채 패거리에 머무는 '당신들의 공자'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거기에는 '공자'는 없고 '당신들'만 있기 때문이다.

공자를 넘어서 <논어>를 읽고 싶을 때

▲ <삶에 집착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논어>(황희경 옮김, 시공사 펴냄). ⓒ프레시안
책꽂이를 살펴보니 얼추 30여 종의 <논어> 번역서가 꽂혀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자주 손이 가는 책이 황희경이 번역한 <삶에 집착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논어>이다. '헌책 중의 헌책'인 <논어>에서 새로운 생각거리를 찾을 때 황희경의 <논어>를 집는다. 대부분의 <논어>가 공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역자들로 인해 읽는 이를 부담스럽게 하는 것과는 달리 황희경의 <논어>는 공자를 넘어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는 점에서 독창적인 저작물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논어>의 첫 번째 편인 학이편 제4장에 나오는 증자의 세 가지 성찰을 학이편 제1장에 나오는 공자의 말을 순서만 바꾸어서 반복하고 있다고 해설한 내용이나, 팔일편 제24장에 나오는 의봉인과 공자의 만남을 몽타주 기법으로 해설한 내용 등은 읽을 때마다 탁견이라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논어>를 앞으로 뒤로, 바로 거꾸로, 두루두루 읽고 생각해 본 사람이 아니면 이런 장면을 밝혀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 혼자서 이런 즐거움을 독차지하는 것은 물론 공자의 정신이 아닐 터. 여기에 그 즐거움의 일단을 '공자왈', '황희경왈'로 각색하여 적어본다.

공자께서는 "상당한 사람 곁에서는 음식을 배불리 먹지 않으셨다."
황희경왈 "별걸 다 기록해 놓았다. 편집되고 연출된 모습이 아니라 항상 그러한 진실한 모습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긴 배불리 먹는 사람도 있다."

공자께서는 "조문하러 가서 곡을 하신 날에는 노래를 부르지 않으셨다."
황희경왈 "공자가 평소에 노래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으며 또한 진실한 마음으로 노래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공자의 제자 증자왈 "군자는 학문과 문장으로 벗을 모으고, 벗을 통해서 인덕의 함양을 돕는다."
황희경왈 "학문과 문장을 연마하지 않는 사람은 친구를 모을 수 없는가? 학문을 함으로써 오히려 고독하지 않은가? 문(文)을 학문이나 문장으로 협소화시켜 볼 필요는 없다."

공자왈 "선인이 백성을 칠 년 동안 가르치면 또한 전쟁을 치르게 할 만하다."
황희경왈 "별안간에 웬 전쟁? 더구나 선인이 백성에게 웬 군사 훈련을? 그것도 칠 년씩이나? 알 수 없다."

공자왈 "나라에 도가 있을 때도 녹을 먹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도 녹을 먹는 것이 치욕스러운 일이다."
황희경왈 "조선 시대에도 잘 살고, 일제시대에도 잘 살고, 공화국이 몇 번 바뀌어도 잘 사는 '명가문'이나 이른바 철새 정치인들에 대한 공자의 비판이다."

공자왈 "젊었을 때는 혈기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므로 색욕을 경계해야 하며, 장년이 되면 혈기가 한창 강하므로 싸움을 경계해야 하며, 늙어서는 혈기가 쇠약하므로 탐욕을 경계해야 한다."
황희경왈 "우리사회에는 늦게 핀 꽃 같고, 오래된 술 같으며, 무한히 아름다운 노을 빛 같은 원로가 너무 적다. 아니, 계신데 내가 모르는 것이겠지."


그의 <논어>를 읽고 있으면 마음이 즐겁다. 절제된 해학으로 읽는 이를 웃기는가 하면 때론 통쾌하다 싶게 대상을 풍자한다. 그는 분명 오랫동안 <논어>를 곱씹어 보고 나름의 통찰을 가지고 <논어>를 번역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는 이처럼 감칠맛 나는 해설을 붙일 수 없다.

어진 사람은 오래 산다

<논어>에는 '인자수(仁者壽)'라는 말이 나온다. '어진 사람은 오래 산다'는 뜻이다. 처음에 나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수천 억을 해 먹으면 오래 산다'고 바꿔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날 <노자>를 읽다가 "죽어도 잊혀 지지 않는 사람이 오래 사는 것이다(死而不忘者壽)"라고 한 구절과 마주쳤다. 아! 그렇구나. '수(壽)'란 실제로 죽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죽어도 잊혀 지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구나! 그러면 그렇지, 공자가 어진 사람이 육체적으로 오래 산다고 터무니없는 말을 했을 리가 있나. 길고 짧은 차이가 조금 있다 해도, 사람 목숨은 거기서 거기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수백 년 수천 년을 산다, 우리의 기억에서, 역사 속에서.

이 글을 막 마무리할 무렵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이 나라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찾아가 만날 수 있었던 유일한 전직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 나라에 그런 대통령이 있었던가. 나는 그가 <논어>에 나오는 '어진 사람'처럼 죽어도 죽지 않는, 오히려 죽어서 다시 살아나는 대통령으로 우리 역사에 남으리라 믿는다. 오늘 국민장이다. 슬픈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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