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도덕의 탈을 쓴 권력
2007년 선거 때 "무능보다 부패가 낫다"는 생각이 나돌았고,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그런 상황 자체를 실망스럽다고 평했다. 나름대로 부패에 맞서 싸운 진보개혁세력의 대표 중 한 사람으로서, 자신을 "무능하다"고 매도해버리는 풍조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화로 부패를 정당화하는 비약을 개탄한 것이다. 그런데 2009년 박연차 관련 추문에 연루되어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는 부패와 맞서 싸웠다는 말도 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사회의 진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도덕적 개선을 도외시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든 사회변혁세력이라면 기득권 세력의 부패와 타락을 공박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도덕이라는 주제를 직접적으로 정치에 적용하게 되면 오히려 도덕과 권력을 뒤죽박죽으로 섞어서 사회의 개선을 지연시킬 위험이 대단히 높다. 기득권 세력의 부도덕성에 대해서는 "무능보다 낫다"는 식으로 넘어가면서, 진보인사의 오점에 대해서는 "세상에 믿을 사람 없다"는 식으로 과장하는 이중기준이 쉽게 통용되기 때문이다.
김근태는 2000년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선거에서 사용한 자금 중 2억4500만 원이 사실상 불법 선거자금이었다고 양심고백을 했다가, 그중 권노갑에게 받은 후원금 2000만 원에 대해서만 기소되어 1심에서 벌금 500만 원에 추징금 2000만 원을 선고받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범의가 인정된다"고 보면서도 다른 사건들과의 형평을 고려해서 선고를 유예했다. 잘못이 있다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한다면 1심에서와 같은 판결이 마땅하다. 그러나 항소심에서는 "같은 액수를 받은 정동영은 아무 처벌을 받지 않"았음을 형평성의 근거로 들었다. 나는 이 사건에서 항소심 재판부처럼 다른 사건들과 형평성을 고려하는 관점이 우리사회를 주도하는 정치의식에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랬다면 단순히 희미한 몇 가지 의혹을 검찰이 제기하면서 중계 방송한 것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하는 이 말이 억울하다면, 검찰은 노 전 대통령 일가에 대한 수사를 의연하게 마무리해서 기소할 사람은 기소하고 고인이더라도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지 밝히면 된다. 지금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범죄사실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를 단지 죽음으로 항변했다는 이유로 없다고 우길 수준은 아니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의 결백을 믿는 사람일수록 그런 수준은 넘어선 지가 오래다.
이 문제는 세속화(secularization)라고 하는 주제와 관련된다. 서양의 역사에서 세속화란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가리킨다. 국가권력이 교회와 분리되어 세속화되었다는 뜻이다. 한국사회는 특정한 종파가 국가권력을 차지한 것 때문에 문제가 된 적이 없다고 흔히 간주되기 때문에 세속화의 문제가 진보세력들에게도 중요한 관심사로 떠오른 적이 없다. 또는 기독교의 창조론과 같은 특정 신학을 학교에서 가르치지만 않으면 문제는 없다는 듯이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세속화의 문제는 양심의 자유, 가치 다원주의, 표현의 자유, 개인의 인권, 등과 직결되는 중대한 함의를 지니며, 나아가 도덕의 영역에 정치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발본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서양 사회에서 세속화란 사법적 범죄(crime)와 도덕적 죄악(sin)을 구분하고, 도덕적 죄악이란 사법적 소추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뜻이다. 도덕적 죄악을 정치권력으로 규제할 수 없다고 보는 데에는 주로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논리적 이유로서, 도덕이란 가치의 영역에 속하는 사항으로, 기본적으로 문화와 관습과 기질과 인생관에 따른 다양성이 본질적 속성에 해당한다. 신의 명령이 무엇인지도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다를 뿐 아니라, 신이 있는지 여부마저도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르다. 둘째 역사적 이유로서, 실제로 도덕이나 양심이나 종교에 관해 한 쪽의 의지를 다른 쪽에게 강요하다보면 가장 야만적인 무력투쟁이 발생한다. 서양의 경우 종교개혁 이전부터 19세기까지 무수한 종교전쟁을 치르면서, 설사 다른 종파들이 진실로 이단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을 죽이기 위해 자행된 십자군의 야만이 무엇보다 더 큰 죄악이라는 각성이 일어났다. 셋째 기술적 이유로서, 도덕적 죄악이란 행위의 결과뿐만 아니라 동기나 이유 또는 정성부족 등, 내면의 상태와 관련되는 경우가 많다. 도덕의 관점에서는 실제로 사람을 죽인 행위뿐만 아니라, 살인할 마음을 먹는 것만도 죄악이 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이런 내면의 차원에 공권력이 개입할 수 있게 되면, 공권력 자체의 정합성이 철저하게 무너지고 만다. 여기서는 이 세 번째 요소를 집중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의도와 동기를 문제 삼는 풍조는 우리사회 도처에서 발견된다. 바로 앞 장에서 논의했듯, 황석영에 대한 자칭 진보진영의 공황에 가까운 반응도 그의 행위로부터 바로 그의 "불순한 의도"를 유추해서 매도하는 좋은 예다. 김대중이 "노벨상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남북정상회담을 했다고 하면, 정상회담의 의의가 훼손된다고 여기는 사유구조도 마찬가지다. 노무현이 "법이 허용하는 한도에서 열린우리당을 도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을 가지고 탄핵까지 몰아간 정서도 마찬가지다. 미네르바의 글을 가지고 "공익을 해할 목적"이었다고 엮어서 인터넷 세상에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검찰이나, 애당초 "공익을 해할 목적"을 처벌할 수 있다고 본 전기통신기본법의 입법자들이 개인들의 내면세계를 통제해야 한다는 대한민국의 풍토병에 충성스럽게 감염되어 있는 상태인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모든 조항이 그와 같고, 형법의 명예훼손 조항 또한 마찬가지다. 이런 모든 법조문들은 바로 내면의 목적과 동기와 이유와 의도와 가치와 사상과 양심과 성향을 문제 삼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밖에 될 수가 없다. 이것은 복잡한 논증이 전혀 필요 없는 아주 간단한 얘기다. 상대의 "의도"를 시비하기로 한다면, 눈을 한번 치켜뜨거나 아니면 내리 깐 것만 가지고도 도전 또는 불복이라고 뒤집어씌우기가 여반장이다. 실제로 수양대군은 황보인과 김종서를 죽이고 거사성공을 자축하는 파티를 열었는데, 그 자리에서 덩달아 웃지 않은 허후(許詡)는 눈엣가시로 찍혔다가 결국 죽임을 당했다.
한나라당의 의원들 가운데 기껏 "쇄신"을 파격적으로 주장한다는 사람들이 "강제적 당론"을 금지해달라고 청원하는 가련한 모습에서(☞ "'국회의원 독립선언', 가능할까?") 나는 자꾸만 수양대군의 저런 행태가 연상된다.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이 안 따른다면 어떻게 "강제적 당론" 따위가 있을 수 있는가! 그렇지만 한 번의 표결에서 취한 자세로부터 "역심"을 읽어내는 풍토라면 모든 "당론"은 곧 절대명령과 같게 되는 것이다. 표결에서 독자의견은 고사하고, 술 한 잔이나 밥 한 그릇조차도 동패들과 같이 어울리지 않으면 찍히기가 십상이다.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자유롭게 양복 벗고" 얘기하자며 저고리를 벗는데, 자유롭게 안 따를 정도로 간 큰 장관이 대한민국 역사에서 몇이나 있었을까? 실제로 있었는지도 의문이거니와, 있었더라도 아마 오래 자리를 지키지는 못 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교실에 강제로 감금당하는 인질훈련을 "자율학습"이라고 부르는 세뇌를 당연시하는 민족이기 때문에, 장관이나 대법관 또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눈치를 보는 것이 습성화되어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나름대로 판단할 능력이 아예 없고, 배경의 권력에 기대 주입된 의견을 우기는 것이 배움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내면을 통제한다는 것은 곧 분별력을 싹도 트지 못하게 짓밟아버리는 짓과 같다. 얼핏 보면 위험하거나 해로운 의도만을 걸러내면 될 것처럼 보이지만, 덩달아 웃지 않는 데서 "반역할" 의도를 읽어내는 식의 견강부회에는 전혀 아무런 분별력이 작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말과 행동의 뒤에 숨은 의도와 동기가 위험하거나 해롭다는 이유로 처벌하기까지 가지 않고, 단순히 말과 행동의 결과가 위험하거나 해로울 수 있다고 여겨서 처벌하더라도 사회의 모든 분별력이 말라죽는다는 논증은 이미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에서 더 이상 명확할 수 없도록 뚜렷하게 명시해 놓았다 (앞 제2부 제5장 제3절 참조). 그러므로 내심의 의도가 아니라 명시적인 발언의 결과, 그 중에서도 내용이 아니라 발언의 맥락과 방법까지를 볼 때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을 초래하는 것만을 규제하도록 처벌권력을 엄격하게 제한해야, 개인들의 마음에 자발적인 분별력이 자랄 수 있다는 얘기다.
문명사회에서 정치적 권위의 핵심은 사법적 규제에 있다. 정부가 부과하는 공민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거나, 정부의 시책을 물리력으로 저지하는 행위라고 해도, 규제와 처벌은 어디까지나 법률의 재가를 받아서 이루어져야 한다. 범죄자라고 해서 경찰관들이 지나가는 김에 군밤을 먹이거나 따귀를 때려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발상,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다면 피해를 복수하는 취지에서 사형이 마땅하다는 발상, 대통령의 설교 한 마디로 부유층의 호화결혼을 금지할 수 있다는 발상 등은 모두 내면세계를 통제하겠다는 심보에서 나온다. 권양숙 여사나 그 자녀들이 박연차와 돈거래한 일이 구체적으로 어떤 범죄에 해당하는지는 밝힐 필요도 없이, 돈거래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노무현이 "무능"에 더해 "부패"까지 모든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는 풍토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 ⓒ故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장의 위원회 |
우리 사회에 진보진영에 대해 이중기준이 대단히 크게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본다. 예컨대 몇 년 전 이필상 교수가 고려대학교 총장에 선임되었다가 구설수에 올랐던 혐의는 불찰이랄 수는 있지만 심각한 도덕적 흠결이라고는 볼 수 없다. 반면에 현인택 통일부장관의 경우는 명백한 이중게재, 즉 자기표절이라고 봐야 한다. 사실상 똑같은 논문을 두 군데 싣더라도 자기표절이 아닐 수는 있다. 독자층이 너무나 달라서 전에 실은 글을 읽을 기회가 전혀 없다고 봐야 할 독자들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똑같은 논문을 게재하는 것이 지식의 전파라는 문명사회의 목적을 위해 필요한 일이 된다(☞ "표절"). 하지만 현인택은 청문회에서 마냥 "나는 몰랐다"는 잡아떼기로 일관했다. 적극적이고 당당한 변론이 아니라 잡아떼기라고 하는 위축적인 자기방어밖에 할 말이 없었다는 점이 바로 그 일이 부끄러운 짓이었다는 반증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필상은 총장직을 수행하지 못했고, 현인택은 장관에 취임했다. 보수파 현인택에게는 명백한 자기표절도 흠이랄 것이 못 되지만, 진보파 이필상에게는 별 일 아닌 것도 누가 마이크 잡은 김에 흠결이라고 광고만 하면 치명적인 부도덕으로 둔갑한다.
예수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자, 아무도 간음한 여인을 더 이상 때리지 못했다. 현인택의 잘못은 예수의 가르침에 기대서 넘어간 셈이다. 하지만 이필상에게는 예수가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다.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자가 돌아서자마자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를 옥졸에게 넘기는 짓이 한국사회의 일상적인 규범이 되어 있는 것이다. 간음한 여인을 때리지 말라고 설교한 예수도, 만 달란트를 용서받자마자 백 데나리온을 그악스럽게 뜯어내는 악독한 종은 벌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마태복음 18장 34-35절).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지금 보수파에게는 예수의 논리로 현인택을 용서하는 반면에, 진보파에게는 악독한 종이 했던 짓을 하고 있으면서 잘못인 줄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보수신문들이 악질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면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나는 보수신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사회에서 진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일수록 도덕과 정치를 뒤죽박죽으로 섞어버리는 무분별한 자기최면에 빠져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미개하고 불신이 팽배한 시대의 애처로운 처세술인 "참외밭에서 신발 끈 고치지 말라",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따위의 소리를 도덕의 격언인 줄 착각하는 미혹이 있는 것이다. 참외밭에서 신발 끈 고친 사람을 도둑으로 몰아 고발한다면 그 놈이 악당이다. 의도가 아니라 행위가 악랄한 것이다. 그런 악당은 내버려두면서, 신발 끈 고쳐 맸을 뿐인 사람을 "처신을 잘못했다"는 둥, "물의를 일으켰으니 자업자득"이라는 둥, "오십보 백보"라는 둥, "군자로서 할 일이 아니"라는 따위로 매도한다면 사회가 어떤 꼴이 될까? 검찰이 수사만 개시하면 바로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로 받아들여 버린다면, 검찰을 뒷구멍으로 조종할 수 있는 진짜 악당 말고 누가 온전히 인격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조선일보가 자기 회사와 방상훈 사장의 실명을 국회에서 거론했다는 이유로, 헌법이 보장하는 국회의원의 면책특권까지 무시하겠다고 덤빌 수 있는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도덕적 죄악과 사법적 범죄를 마구잡이로 혼동한 결과 남는 것은 이현령비현령이라고 하는 최악의 깡패논법뿐이다.
정치는 군자가 뭔지를 앞에서는 말로 흥얼거리면서 뒤에서는 별짓을 다하는 한량들의 여흥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을 위한 생존의 규칙이다. 모두들 마구 살아남기로만 하면 험악해지기 때문에, 각자의 욕구를 인정하면서 경쟁만은 평화롭게 말로 하자는 것이 문명의 요체다. 이기심을 버리고 이타심을 추구하는 것은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하고 싶은 사람이 하는 것이지, 법으로 정해놓고 모든 사람에게 강요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도덕을 법으로 강요하는 사회란 예외 없이 악당이 위선의 재주까지를 익혀 군림하면서, 제 눈에 거슬리는 사람은 성인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괴롭히는 곳이다. 유럽 중세의 교회재판에서 조선시대의 부관참시까지, 악독한 종들은 자기가 받은 용서를 상대방에 대한 가혹한 트집잡기로 갚는다. 사회의 진보를 바란다고 하면서 도덕을 정치에 바로 적용하게 되면, 스스로 그런 악독한 종이 되든지, 아니면 적어도 악독한 종이 하는 짓을 도덕인 줄 알고 구경하는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서양사회는 지독한 종교전쟁을 겪으면서 이런 이치를 깨달은 결과, 오히려 세속화가 사회신뢰를 낳는다는 발상의 지평을 열 수 있었다. 관인(寬忍) 또는 똘레랑스란 바로 세속화의 바탕에 깔려있는 이와 같은 깨달음과 새로운 해석이 맺혀서 생성된 결정체인 것이다. 똘레랑스의 핵심은 우리 모두의 이기심을 관인하면서, 다만 이기심이 실제로 다른 사람을 해칠 때 그러지 못하도록 행태를 규제하는 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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