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이렇게 시작되는 찬송가가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가사입니다. 여기서 시온은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야훼 하나님의 거처로 여겨지는 성스러운 산으로 알려진 곳입니다. 따라서 이 찬송은 그 성산의 영광으로 열리는 새 아침의 찬란한 축복을 간구하는 노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온뿐만이 아니라, 교회에서 불리는 찬송 가운데에는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가사에 등장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면 문제가 없겠지만, 이러한 단어가 오늘날의 현존 국가 이스라엘과 연결되는 이미지가 떠오르게 되면 불편해지기 시작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자칫 그것은 현존의 국가 이스라엘에 대한 찬가처럼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국민가요 같기도 한 것입니다.
기독교 문화운동 하는 분들 가운데에는 찬송가에 이러한 대목들을 고치는 작업을 하기도 합니다.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찬송이라고 해서, 이른바 시온주의라고 하는 이스라엘 국가주의의 야만적인 현실을 고스란히 정당화시키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는 각성을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기원으로 따져보자면, 사실 이 시온이라는 말,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정복과 탄압 등과는 전혀 다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거대한 주변 제국들의 폭력과 횡포, 점령과 이들에 의한 축출의 고된 경험이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시온의 영광"이라는 것도 나라를 잃고 쫓기고 헤매던 자들이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새로운 그 날에 대한 절절한 희망을 상징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고대 제국들이 약소민족과 유랑하는 자들을 짓밟고 있을 때 이러한 말들이 주는 용기와 의지, 그리고 신념은 보편적 열정을 지닐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사 속의 '파리 콤뮨', 러시아 혁명 때의 '페테스부르그 광장', 우리의 민주화운동 역사에서 '광주'가 차지하는 의미는 바로 그 '시온의 영광'이라는 단어가 갖는 울림처럼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이란 역사의 현실과 함께 달라집니다. 모스크바의 음모적 권력의 현장인 크레믈린이 그러했고 파리의 살육행위를 집행했던 야만적인 형틀 기요틴이 그러했습니다. 시온에서 따온 시온주의나 세상이 멸시하고 저버린 백성이지만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존감을 가진 말, 이스라엘도 그런 운명이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합니다.
시온주의와 결합한 이스라엘은 오늘날 약소민족 팔레스타인을 정복하고 핍박하는 압제자가 되었으며 아랍세계의 원수가 되어 있습니다. 시온의 영광이 아니라 시온의 공포, 또는 시온의 저주가 되어버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란이 시온주의에 대한 격렬한 반감을 표출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지도상에 없어져야 한다는 극언까지 했습니다. 도를 넘었다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고난을 겪으면서 인류의 진정한 해방을 갈망했던 그 시온과 이스라엘은 그 자신이 도리어 해방의 신 야훼를 배반한 역사의 증거가 되어버리고 만 듯 합니다.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시온의 공포가 지배하는 밤"을 청산해야 하는 시대가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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