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태 화물연대 광주지회장이 죽었습니다. 그 뒤 동료노동자들은 폭력범이 됐습니다. 죽창으로 경찰을 마구 찔러댄 무자비한 사람들이 됐습니다. 그 뒤 묻혔습니다. 박종태 지회장이 죽음으로 말하려고 했던 화물노동자들의 처우는 묻혔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습니다. 그 뒤 그는 못난이가 됐습니다. 측근비리를 막지 못한 사람이 됐고 비극의 책임을 스스로 짊어져야 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그 뒤 조문객은 '잠재적인 시위꾼'이 됐습니다. 언제 촛불을 들지 모르는 요주의 대상이 돼 버렸습니다.
ⓒ프레시안 |
같습니다. 죽은 자들은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어떤 이들은 '경제적 생존'을 위해, 또 어떤 이는 '사회적 생존'을 위해 발버둥쳤습니다. 존재의 조건과 존재의 이유를 부여잡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남은 자들은 추모하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어떤 이들의 '해원'을 읍소하고, 또 어떤 이의 '번민'을 헤아리려고 합니다. 남은 자들은 그게 남겨진 자들의 최소한의 도리라고 호소합니다. 하지만 허락하지 않습니다.
생전이나 사후나 똑 같습니다. 법은 매정하고 공권력은 철통같습니다. 가슴은 팍팍하고 눈물은 말랐습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습니다. 서슬 퍼런 찬 기운이 돕니다.
내일이 된다고 해서 찬 기운이 녹을 것 같지 않습니다.
김동길 명예교수가 했다는 말이 반증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야단법석"을 떠는 세태를 비판하며 "이 나라에는 법은 없고, 있는 것은 감정과 동정뿐인가"라고 한탄했다는 그의 말이 시사합니다.
이 나라에는 법만 있습니다. 그것도 눈물이 메말라 버린 '진시황의 법'만 있습니다.
감정과 동정이란 표현은 인용하지 않겠습니다. 그 표현에 '부적절'이란 선입견이 깔려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대신 배려와 이해란 말을 쓰겠습니다.
현 정권엔, 그리고 보수 집단엔 배려하는 마음과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경쟁자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대화하려 하지 않고 존중하려 하지 않습니다.
배려와 이해가 법과 상치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현 정권과 보수 집단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배려와 이해는 법의 대체 개념이 아니라 법의 보완 개념인데도 현 정권과 보수 집단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배려와 이해는 법의 정당성과 법 집행의 효율성을 높이는 개념인데도 현 정권과 보수 집단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설득하려 하지 않고 굴종하기를 강요합니다. 법을 최후의 수단으로 쓰는 게 아니라 최우선 수단으로 활용합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따뜻한 보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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