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면, 1542년 발행된 <간이벽온방>을 보자. 이 옛 책에는 전염병 예방을 위한 식이요법이 들어 있다. 설날에 파, 마늘, 부추, 염교, 생강 등 다섯 가지 매운 음식이나 붉은 팥을 먹는 것 등을 적고 있다. 붉고 매운 것이 체온을 끌어 올려 바이러스의 침입을 잘 막아준다고 본 것이다. 모두 오늘날의 세시풍속이다.
한의학의 탄생도 전염병과 깊은 관계가 있다. 흔히 한의학의 원조라면 중국의 명의 화타, 편작을 떠올린다. 그러나 한의학의 히포크라테스는 <상한론>을 지은 장중경이다. '처방'이라는 말을 처음 만든 사람이 바로 이 장중경이다. 그런데 바로 이 장중경이 지은 <상한론>의 서문은 전염병으로 죽어간 자신의 피붙이에 대한 애끓는 애정으로 시작한다.
"나는 종족이 많아서 전에는 200명이 넘었다. 그러나 상한병에 걸려 죽은 사람이 3분의 2가 넘었다. 이 처방으로 상한병을 완치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것이다."
장중경이 살았던 시대는 공교롭게도 나관중의 <삼국지>에 나오는 적벽대전 때다. 실제로 <삼국지>를 보면 역병을 묘사한 대목이 나온다. 후대에 소설로 창작된 내용이지만, 당시 한말 혼란기였던 적지 않은 역병이 창궐했고,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조조는 그의 아들 조식은 적벽에서 패한 후 이렇게 말한다.
"공이 적벽에 이르러 유비와 싸워 유리하지 못했다. 여기에 더욱 큰 병이 있었다. 관리와 병사들 가운데 죽은 사람이 많아서 이에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조조) 조조의 아들 조식은 더 구체적이다. "집집마다 엎어진 시체들의 아픔이 있었으며 어떤 경우는 전 가족이 죽었다. (…) 부유한 사람이 죽은 경우는 적었고 가난한 이들이 대체로 죽었다." (조식)
▲ <삼국지>의 적벽대전을 영화로 만들어 인기를 끈 영화 <적벽>(2008). 영화 속에서도 전염병이 양측 군대를 괴롭히는 장면이 나오듯이 실제로 이 당시 전염병이 유행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프레시안 |
"처음에는 오한, 발열, 기침, 눈의 충혈이 있다. (…) 마침내 위장 장애를 일으켜 설사, 구토가 시작되고 피부에 작은 농포와 궤양이 생긴다. 심하면 8일째를 넘기지 못하고 살아남아도 생식기가 파괴되고 실명과 기억 상실에 걸린다."
이렇게 똑같은 전염병이었지만 한의학의 대응은 달랐다. 한의학의 기본 정신은 자연과의 조화이다. 박테리아, 바이러스에 대한 지식이 일천했던 과거에 한의학은 역병을 퇴치할 때도 이런 기본 정신에서 해법을 찾았다. 바로 몸에 들어온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것을 죽이기보다는 밀어내는 관용의 치료법이다.
서양 의학에 기반을 둔 역학 지식을 가지고 볼 때 우스워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 이런 관용의 치료법은 이른바 자연스럽게 박테리아, 바이러스를 이겨내는 면역의 원리를 당대의 의학 지식에 입각해서 구현한 것이다. 오늘날 면역의 원리를 토대로 백신을 만든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글머리에 우리 조상이 역병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살펴보았다. 그러나 우리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까? 항바이러스제 타미플루가 있다지만 급박한 상황에서는 전 국민의 5%한테도 채 돌아가지 못한다. (더구나 타미플루의 내성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백신은 사후약방문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은? "손 씻기" "집에서 나가지 않기" 등.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면 여전히 면역을 최우선에 둔 한의학의 해법은 여전히 유효하다. 사실 서양 중세 때 흑사병이 유행할 때도 전체 인구의 3분의 1은 생존했다. 흑사병의 실체를 놓고 여전히 논쟁이 많은 걸로 알고 있지만, 확실한 것은 가장 엄혹했을 때도 면역에 따라서 증상과 희생자가 달랐다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신종 인플루엔자와 같은 전염병은 인간이 자연과의 평형 상태를 깬 탓일지 모른다. 유난히 인간의 면역 능력을 얕잡아보는 돌연변이가 나타났다고 해서 바이러스 탓만 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사실 지구의 혈액과 살갗을 마구 파괴하는 인류야말로 지구의 대다수 생물에게는 바이러스 같은 존재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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