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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험주의 사고방식의 특징과 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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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험주의 사고방식의 특징과 결함

[박동천의 집중탐구]<37> 선험과 경험

제3부 선험주의: 선견지명 프레임
제2장 선험주의 사고방식의 특징과 결함
제1절 선험과 경험


『표준국어대사전』은 선험주의(先驗主義)를 "선험적인 것의 존재를 주장하여, 그것을 철학의 원리로 삼는 사상.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이나, 에머슨의 초월주의 따위가 속한다"고 풀어놓았다. 초월주의(超越主義)를 찾아보면 "현실 세계의 유한성을 부정하고 인간의 감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초월적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사상. 19세기에 미국의 에머슨을 중심으로 일어난 이상주의적 관념론에 의한 사상 개혁 운동으로, 현실 세계의 무한성을 찬미하여 다분히 이상주의적이며 신비적인 범신론의 경향을 띠었다"고 풀어놓았다. 영어로는 이 두 단어가 모두 transcendentalism이라고 불린다. 『옥스퍼드 영어사전』(OED Online)을 보면 칸트와 관계되는 뜻이 1a, 에머슨과 관계되는 뜻이 1b로 나오고, "고답적(高踏的)인 성품, 생각, 언어; 철학이나 언어에서 허황하고 모호하며 몽상적인 성격이나 언어를 가리키기도 한다"는 풀이를 2번으로 덧붙여 놓았다.

따라서 선험주의가 무엇인지, 어디에 도움이 되며 어디에 방해가 되는지를 체계적으로 해설하려면 "선험적인 존재", "관념론", "실재", "감각", "초월", "현실 세계의 무한성", "이상주의", "신비적인 범신론", "허황", "고답", "칸트", "에머슨", 등에 관한 체계적인 해설을 건너뛸 수 없게 된다. 그러다보면 책 한 권으로도 공간이 부족할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 연재의 독자들에게 대단한 관심사도 아닐 터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아예 체계적인 해설은 시도하지 않는다. 대신, 이것이 경험, 선험, 초월, 세계, 현실, 실재, 따위의 개념들과 관계가 되며, 칸트의 경우처럼 철학적인 논의의 주제일 뿐 아니라 에머슨의 경우처럼 어떤 사회적 운동과도 관계가 있었으며, 나아가 때로는 허황하고 모호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는 정도를 기본적인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리고 『표준국어대사전』의 뜻풀이가 철저하게 놓치고 있는 차원, 즉 "선험적인 것의 존재"라든지 "현실세계의 무한성" 따위의 존재론적 문구들이 사실은 그 "선험적인 것" 또는 "무한한 현실세계"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인식론적 질문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점에 초점을 맞춰서, 경험과 선험의 구분에 관해 약간이나마 조명을 해보고자 한다.

겉보기와 실상이 반드시 같지는 않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음은 이미 겉보기와 실상이라는 단어가 있다는 사실로써 증명이 된다. 이미 2500년 전에 플라톤은 겉으로 보이는 세계에 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의견(doxa)의 영역과 실상에 관한 지식(epistēmē)의 영역을 구분할 필요를 강조했다. 하지만 불필요하게 이 구분을 강조해서, 감각할 수 있는 현상계와 오직 지성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가지계(可知界)라는 세상이 따로 있는 것처럼 말을 해버린 바람에, 그후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엄청난 혼동을 자아내고 말았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 스승이 실체와 개념을 혼동했다고 일면으로 비판하면서도, 스스로 마치 무슨 순수하고 완벽한 초월적인(transcendent) 세계가 따로 있다는 듯한 여지를 남겨서 혼동을 악화시켰다.

칸트가 초월적이라는 형용사 대신 선험적(transcendental)이란 말을 쓴 것은 세계의 실재성에 관한 한, 우리가 감각하는 이 세계 말고 다른 세계는 설사 있다손 치더라도 우리에게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결과였다. 피안의 세계, 피안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미지일 수밖에 없는 초월적인 세계는 논의해봤자 진전이랄 게 아예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일차적인 목적이었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 그가 사용한 물자체(物自體)란 문구가 다시 많은 사람들에게 혼동을 자아내고 말았다. 시간 속에서 가변적인 현상들이 어떤 식으로든 서로 연관되거나 또는 심지어 동일성을 가진다고 한다면, 현상의 배후에 어떤 초시간적인 본체 비슷한 것이 있어야 할 것처럼, 그런 본체가 시간 속에서 표상된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들을 우리가 감각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본체는 실물일 수가 없고 단지 관념이라는 것이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이다.

하지만 칸트처럼 본체를 실물이 아니라 관념이라고 보더라도, 계몽적 지식에 대한 과장된 기대가 생기는 경향을 방지하지는 못한다.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현상 배후에 어떤 불변적이고 초시간적인 법칙이 있고, 그 법칙을 알면 시간 속에서 현상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예측할 수 있다는 입장은 칸트의 관념론과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칸트는 단순한 경험에 근거해서는 지식을 얻을 수 없다고 보면서, 선천적인 개념과 거기에 대응하는 직관이 선험적으로 결합될 필요를 강조했다. 더군다나 칸트는 도덕이 인류에게 이른바 "정언명령(定言命令, categorical imperative)"이라는 것을 부과한다고 하면서, 나아가 "네가 현재 행동하는 방식이 보편적으로 준수되는 세상을 네가 의지하는 경우에만 그렇게 행동하라", "인간을 목적으로 다루어라", "모든 합리적인 존재의 이상적인 의지는 보편적인 법칙을 제정하려는 의지"라는 등을 정언명령의 실례라고 제안하기까지 했다.

요컨대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은 자연계에 관한 지식에서나 도덕에 관한 지식에서나 계몽과 무지의 구분이 적용될 수 있다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선험(先驗)이란 경험에 앞선다는 뜻이다. 이는 transcendental의 번역어로서 나무랄 데 없다. 경험해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일, 경험할 수는 없지만 알 수 있는 일들을 가리키기 위해 칸트가 그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험해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일"이 어떤 일인지를 좀 찬찬히 따져보자.

일상어로 말할 때,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일들은 실로 적지 않다. 나는 지금 이 글을 뉴질랜드 해밀턴 시에 머무르며 쓰고 있는데, 지금 오후 네 시일 뿐인데 하늘에는 먹구름으로 덮여 비가 오면서 어둡지만, 저 구름 위에 태양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보지 않아도 안다(A). 나는 360자리 숫자 360개를 곱하는 계산은 한번도 해보지 않았고, 누가 그런 계산을 실제로 해봤다는 얘기조차 들어본 적이 없지만, 그런 곱셈 계산도 기어이 하려면 할 수 있고, 정답은 하나만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보지 않고 안다(B). 나는 심지어 앞에서(제3부 제7장 제3절) 밝혔듯이, 한미 FTA를 한국 국회에서 서둘러 비준하면 할수록 미국 의회가 한국의 행정부를 골려먹을 수 있는 여지가 넓어진다는 사실도 보지 않고 안다(C). 그리고 이와 같이 "보지 않고 알 수 있는 경우"들이 있다는 관찰에만 근거해서, 지식이라는 것이 경험만으로는 얻어질 수 없고 어떤 특별한 선험적인 권능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끌어내는 생각이 상당한 간과와 착각의 소산이라는 사실도 나는 눈으로 보지 않고 안다(D).

하지만 경험주의 과학을 조금이라도 익힌 사람이라면, 방금 내가 "보지 않고도 안다"고 말한 사례들 가운데, A와 B는 내 앎을 인정하겠지만, C는 단지 확률이 높을 뿐이지 그러리라고 미리 알 수는 없는 일이고, D는 그야말로 내 개인적인 주장에 불과한 것을 내가 "안다"고 착각한 결과라고 교정해 줄 필요를 느낄 것이다. 나는 위에 든 사례에서 일상어로 "안다"는 표현을 사용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보는 동시에, "안다"는 단어를 훨씬 엄격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경험주의 어법도 언제든 승인할 용의가 있다. 단, A와 B는 "앎"의 사례이고, C와 D는 확률적 추측 또는 주장의 사례라고 구분해야 한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 음미할 중요한 점이 있다.

칸트가 선험적이라는 형용사를 가지고 지칭하려고 했던 속성은 이른바 선천적 종합명제의 가능성이었다. 선천적(a priori)이란 사태의 추이를 지켜봐야 할 필요가 없이 세계의 본질적 법칙 또는 논리적 법칙으로부터 도출되는 필연적인 결론을 가리킨다. 이는 후천적(a posteriori)과 대조된다. 종합명제(synthetic proposition)란 세계의 실상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는 명제, 다시 말해서 단어의 정의에서 논리적인 추론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정보를 추가적으로 알려주는 명제를 가리킨다. 종합명제는 분석명제(analytic proposition)와 대조된다. 분석명제란 "총각은 결혼하지 않았다" 또는 "삼각형은 세 선분으로 이뤄진다"처럼, 단어의 뜻 또는 주어의 본질적인 속성을 분석해서 진술하는 명제를 가리킨다.

분석명제에서 술어는 주어의 속성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연역되는 결론이다. 분석명제는 따라서 주어의 속성을 제대로 파악했다면 언제나 필연적으로 참이고, 그렇지 못했다면 거짓이 된다. 이때 예컨대 "총각"의 속성을 알기 위해 세상의 모든 총각들을 다 만나서 관찰해봐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분석명제는 선천적인 특징을 가진다. 반면에 종합명제는 "태양이 지구의 모든 물체에게 열의 원천이다"처럼 태양이라는 주어의 속성을 분석하기만 했을 때 나오는 내용보다 뭔가 추가적인 내용을 가지는 것처럼 보이는 명제를 말한다. 그런데 "미국의 초대 대통령은 조지 워싱턴이다", "경제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발전하면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경향이 있다" 따위는 언급되는 사람 또는 사례들을 관찰해야 옳은지 그른지를 확인할 수 있는 종합명제다. 즉, 후천적 종합명제다. 그런데 "태양이 열의 원천이다"는 후천적이라고만은 보기가 어려운 것 같다. 왜냐하면 돌멩이에 해가 비치는 것은 감각할 수 있는 현상이지만, "열의 원천"이란 감각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양이 열의 원천"이라는 명제는 햇빛을 받은 돌멩이들이 따뜻해진다는 감각경험들로부터 구성되기 때문에 종합명제지만, 원인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우리의 선천적인 권능에 힘입어 필연적이고 보편타당한 참 명제로 되기 때문에 선천적 종합명제라고 칸트는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선천적 종합명제를 구성할 수 있는 방법을 선험적 변증법이라고 불렀다.
▲ ⓒ프레시안

"태양이 열의 원천"이라는 문장은 잠시 미뤄두고, 다시 위의 사례 A를 보자. 칸트 식으로 말하면, "먹구름 위에 태양이 있다"는 문장도 선천적 종합명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저 먹구름 위에 태양이 있다는 사실은 굳이 확인해 볼 필요가 없이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선천적이며, 그렇지만 이 명제는 주어와 술어 사이의 논리적 관계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외부세계에 관해 어떤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에 종합적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반면에 사례 B는 곱셈에서 승수의 크기나 수가 증가한다고 해서 정답이 오로지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달라질 리는 없기 때문에, 단순한 분석명제라고 볼 수 있다. 이와 달리 C와 D는 명제라기보다는 가설 또는 주장이다. C는 종합명제의 틀을 본뜬 가설이고, D는 분석과 종합을 섞어서 만든 주장이 될 것이다.

그런데 명제의 종류를 이런 식으로 분류하는 교과서적 논리학에서는 "물을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발생하는 실생활의 다양한 맥락들을 편평하게 다리미질해서 "필연적으로 옳다"는 논리학적 의미로 끼워 맞추는 오류를 저지르면서도 전혀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먹구름 위에 태양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해야 할 상황은 적어도 우리의 일상적인 관념 안에서는 거의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앞에서(제3부 제4장) 예시한 루이스 캐럴의 우화에 나오는 거북이처럼, 기어이 지금 저 구름 위에 태양이 있음을 확인해야 "먹구름 위에 태양이 있다"는 명제가 참임을 받아들이겠다고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비행기나 로켓트를 동원해서 보여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올라가서 구름 위의 태양을 볼 때는 인정했다가, 구름 아래로 내려오는 순간 다시 확인되지 않는 한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할 테니까!

다시 말해, "먹구름 위에 태양이 있다"는 우리가 실생활에서 상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확인할 필요가 없이 당연한 명제인 것까지는 맞는다. 이런 경우 당연하기 때문에 확인할 필요가 없다고 보통 말하지만, 사실은 확인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라고 말해도 전혀 틀리지가 않는 것이다. 확인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라고 보면 상당히 다른 그림이 나타난다. 확인할 필요가 생긴다면 그때부터 당연하지 않은 것이 된다는 함축이 따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런 종류의 명제들의 형태적 성격을 파악하는 데에 선천/후천, 분석/종합 따위 구분 말고 다른 차원들을 고려하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에까지 시선의 폭이 넓어질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와 뉴턴이 그려준 태양의 이미지가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에 여전히 대부분의 독자에게는 "먹구름 위에 태양이 있다"는 명제의 진위를 확인할 필요가 도대체 어떻게 생길 수가 있을지 매우 의아할 것이다. 그런 것을 확인해봐야 믿겠다고 우기는 사람은 비정상이 아니겠느냐고 생각될 것이다. 그렇다면 "86+7=93"과 같은 명제의 경우는 어떤가? 실제로 이런 수준의 초급산수를 초등학교에서 얼마나 자주 확인하고 검산하는가?! 회계사 사무실이나 슈퍼마켓 계산대에서 저런 명제를 얼마나 자주 확인하고 검산하는지를 생각해보면, 적어도 확인할 필요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주제들에 관해서 논의할 때, 철학자 또는 일반적으로 모든 학자들이 저지르기 쉬운 착오가 하나 있다. 어떤 명제의 확실성 여부가 판단되는 지평도 자체로 다양하고, 그 진위를 확인해봐야 할 필요가 발생하는 지평도 대단히 다양하며, 명제의 확실성 여부와 진위를 확인해봐야 할 필요의 유무 사이에 관계도 무척이나 다양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착오다. "86+7=93"이 얼마나 확실한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그렇지만 불확실하게 느끼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당장 계산기를 두들겨 확인해보자고 나서는 것도 아니고, 확실하다고 느끼는 사람이라고 해서 확인할 필요도 없다고 버티는 것만도 아니다. 젊은 시절에 남달리 정확하던 모친이 나이 들어 간단한 산수도 틀린 경우였다면, 모친이 그런 상태인지를 모르고 논쟁을 시작했다가도, 계산기로 정답을 확인하지 않고 모친의 불확실한 정신을 그대로 두는 편을 택할 사람이 세상에는 훨씬 많을 것이다. 반면에 아홉 살 어린이를 가르치는 교사의 입장이라면, 저 정도 산수의 정답을 확인하는 일이 너무나 번거롭고 귀찮을지라도, 학생에게 알려주기 위해 계산과정의 모든 단계를 일일이 확인해야 할 필요가 너무나 당연하다.

확인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곧 이런지 저런지가 확립되어 있고, 기존에 확립된 사항을 굳이 재검토할 이유가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런 필요나 이유에 대해서는, 문제될 수 있는 쟁점이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분석적이든 종합적이든 상관이 없다. 단, 확립되어 있던 사항으로부터 당연히 파생되는 결론이라면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즉, 태양이 구름 위에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고 평소에 알고 있던 태양계의 모습으로부터 당연히 파생되는 결론이므로, 선천적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360자릿수의 수 360개를 모두 곱하는 계산에서 정답이 반드시 하나 있고 오직 하나만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 역시, 우리가 배워 알고 있던 산수의 원리로부터 논리적으로 파생되는 결론이다. 따라서 그런 논리적 결론을 받아들이는 한, 이런 명제의 진위는 경험적인 검증이 필요 없는 사항, 즉 선험적인 일이 된다.

하지만 그와 같은 논리적 결론이 정말로 맞는지 한번 시험 삼아 확인해보기 위해, 또는 사람들의 행태가 논리적 결론과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한번 재보기 위해 확인을 시도하기로 하면, 그런 차원의 확인은 그야말로 경험적인 문제가 된다. 구름 위에 태양이 정말로 있는지 확인하는 일을 한번 실제로 상상해보라. 만 미터 이상을 올라가는 비행기와 그 비행기가 언제든 날 수 있도록 활주로를 확보하고 있지 못한 보통사람이라면, 사실 구름 위에 태양이 정말로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은 바로 그 시점에서 자기 눈으로 확인한다는 것이 어려운 정도를 지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따라서 "구름 위의 태양"을 확인한다는 최종적인 목표와 상관없이,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형편을 조성하기까지만 해도 한 개인으로서는 대단히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고 성취하는 과정이 된다. 다시 말해, 명제의 진위 확인이라는 주목표가 아무리 무의미하다고 할지라도, 경험적으로 "구름 위의 태양"을 확인하는 작업은 부수적인 효과가 꽤나 많은 일이며, 그만큼 나름대로 가치는 충분한 일이 되는 것이다.

360자릿수의 수 360개를 곱하는 계산 역시 경험적인 차원의 주제로 접근한다면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이 된다. 우선 360자릿수의 수 360개는 실제로 실험하기에 너무 크고 많으므로, 그 전에 파일럿 연구로 36자릿수 10개만 곱하는 계산을 해볼 수 있다. 예컨대 어떤 고등학교에서 산수 잘하는 학생 열명, 산수계산을 특별히 두려워하지는 않는 일반인 열명, 수학교수나 주산의 귀재 등 전국에서 선별한 산수천재 열명, 그리고 산수는 잘 못하지만 계산기 두드리는 데는 익숙한 슈퍼마켓 점원 열명 등을 표본으로 36자릿수 수 10개를 곱하는 실험을 해볼 수 있다. 각 그룹별로 답이 일치하는 정도가 얼마인지, 그룹 사이에는 답들이 비슷한 정도가 얼마인지를 비교해볼 수 있다. 계산기라고 해봤자 유효숫자를 수백자리 표시하지는 않기 때문에, 이런 정도의 계산만 해도 인류의 역사에서 미리 확립되어 있는 정답은 일찍이 없다! 이런 실험을 통해 "모든 곱셈에는 정답이 오직 하나 존재해야 한다"는 우리의 선념(先念, precept)이 실제 상황에서 당황스러운 결과와 대조되는 경험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 결과, 36자릿수의 수 10개가 그럴진대, 하물며 360자릿수의 수 360개라면 어떨지를 선험적으로 상상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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