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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이 틔운 새싹의 노래…"얼굴 찌푸리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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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이 틔운 새싹의 노래…"얼굴 찌푸리지 말아요!"

[촛불 1년 릴레이 인터뷰·끝] 노원 촛불 주민

5월 2일,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을 반대하며 시작했던 촛불 집회가 1년을 맞았다. 100일 넘게 매일같이 계속됐던 촛불 집회는 한국은 물론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었던 사건이었다.

1년이 지난 지금, 물리력을 동원한 경찰 진압은 계속되고, '촛불'이 반대했던 미국산 쇠고기 수입뿐만 아니라 영리법인 병원 추진, 공기업 민영화, 대운하(4대강 살리기 사업) 등은 착착 진행되고 있다.

서울 광화문, 시청 광장에서 타오르던 촛불은 점차 줄어들었지만 꺼진 것은 아니었다. 기륭전자, YTN, 문화방송(MBC), 용산 참사, 각 지역 등에서 사람들은 촛불을 들었다. 그러나 2008년 광화문과 같은 촛불은 좀처럼 되살아나지 않았다.

최대 인원 100만 명을 기록한 참가자 숫자만큼, 2008년 촛불에 대한 해석은 여전히 분분하다. 촛불은 무슨 의미였나? 촛불만이 대안인가? 혹 그때의 촛불은 역풍을 몰고 온 '한여름 밤의 꿈'이었나?

촛불은 한국 사회에 희망 혹은 절망, 아니면 그 무엇이었을까? 유일무이한 경험이기에 다른 어떤 사회에서도 구할 수 없는 답을 찾기 위한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프레시안>이 당시 촛불 집회의 주인공들을 다시 만나 물었다.

▲ 지난해 서울 광화문과 시청 광장에서 100일 동안 계속됐던 수만~수십 만의 촛불 집회는 이제 볼 수 없다. 그러나 촛불에서 파생된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은 지역 곳곳에서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프레시안

"우리는 100만이 모이면 들어주겠지 하는 소박한 마음으로 광화문에서 그날 밤 웃으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을 그날 다 보았다.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지난 달 28일 저녁, 서울시 노원구의 한 지역단체 사무실에 하나 둘 사람이 모여들었다. 퇴근하고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달려온 이가 있는가 하면 편한 복장으로 문을 열고 들어오기도 했다. 그렇게 열다섯 명 남짓 모인 방은 금세 이야기꽃이 피었다.

이날은 '쇠고기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원 주민들'이 지역 촛불 300일을 맞아 그간의 활동을 평가하고 활동 방향을 모색하는 토론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촛불 집회가 이어지던 지난해 7월 노원역에서 시작된 촛불 문화제는 현재까지도 매주 목요일마다 이어지고 있다. 아무리 적어도 30명 가량이 모이고, 많으면 100명이 훌쩍 넘을 때도 있다. 이들의 끈기는 다른 지역 촛불의 부러움을 살 정도다.

토론회는 저녁 시간과 겹쳤지만 누군가 가져온 김밥과 호도과자가 있어 순식간에 넉넉한 모임이 됐다. 서로서로의 안부를 묻는 모습에서 친숙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토론이 시작되자 분위기는 곧 진지해졌다.

누가 '생활인'을 움직였을까

"지금 노원 촛불은 지역 내에서 일정 정도의 지위와 역량을 갖고 있다. 또 처음에 촛불을 자발적으로 들던 시민들이 새로운 운동의 주체로 성장했다. 이명박 반대 투쟁을 거치면서 1년간 주체적인 활동가로 자리잡아갔고, 장기 투쟁 속에서 스스로 정치적 자각과 실천력의 모범과 전형을 만들고 있다."

발제와 토론 사이사이에는 어려운 '용어'가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그러나 실제 사회 단체 '운동가'는 한 명도 없었다. 모두들 한때 뉴스를 보고 한숨을 쉬거나 발만 굴렀던 '생활인'들이라고 했다.

이들의 생활을 바꾼 건 바로 촛불이었다. 지난해 처음 지역 촛불 모임이 만들어졌을 때에는 구내 민주노동당, 진보신당과 지역 단체들이 함께 촛불 문화제를 준비했다. 그러나 서서히 '각자의 운동'이 바쁜 단체 활동가보다 '생활인'들이 문화제 준비의 중심이 됐다. 이날 토론회가 끝나고 열린 300일 기념 뒷풀이에서도 문화제에 필요한 장비를 마련해야 한다는 논의가 한참 이어졌다.

무엇이 이들을 움직이게 했을까? 기자의 질문에 이구동성으로 같은 답이 쏟아져 나왔다. "정말 모르는 건가. 촛불을 들고 잘못됐다고 외쳤던 것들 중에 바뀐 게 하나도 없지 않나."

쇠고기에서 지역으로…촛불의 '진화'는 계속된다

지역에서 꾸준히 광장을 지켜내고 있는 것.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노원 촛불 주민들은 이것만으로도 큰 성과라고 자부했다. 모임 이름처럼 처음에는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을 반대하며 모였던 주민들은 점차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활동 반경을 확장해갔다.

매월 주제를 바꿔가면서 계속되는 문화제는 어느덧 그 자체로 작은 토론 공동체가 됐다. 온라인 카페 활동은 물론 공연, 영상, 강연, 세미나 등 다양한 활동이 병행됐다.

모임과 토론의 힘은 실제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지난 3월 노원구 월계동 염광중의 황철훈 교사가 파면됐을 당시였다. 지역 내에 있는 학교에서, 학교에 쓴소리를 해왔다는 이유로, 보다 직접적으로는 일제고사 선택권을 안내해줬다는 이유로 파면당한 황철훈 교사를 위해 촛불 주민들은 전교조 교사들과 함께 또 촛불을 들고 서명지를 돌렸다.

이들의 활동은 다시 지역 내 사회단체들을 움직였다. 토론에 참석한 이우봉 씨는 "황철훈 선생님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리는데 지역 내 70개 단체가 모여서 공동으로 대응한다고 했다"며 "이전까지 지역에서 문제가 일어나도 이렇게 단체들이 모이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300일동안 꾸준히 촛불을 들고 참가를 권유해온 우리가 없었다면 지역 내의 연대도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노원 지역 촛불 모임이 활성화하는 것과 달리 지난해 서울 광화문과 시청 광장에서 촛불이 주춤해지던 8월 이후 곳곳에서 활발하게 전개하던 서울 지역 내 다른 지역 촛불 모임들은 요즘 활동이 많이 줄어들었다고 했다. '진솔하' 씨를 비롯해 문화제 운영에 참석하는 이들은 "광장을 중심으로 한 라이프사이클을 만들어 지켜나가는 것도 우리의 일"이라며 "지역 촛불의 모델을 만들겠다"며 포부를 밝혔다.

▲ 촛불에 참여했던 시민들은 '참여'와 '토론'의 중요성을 알았다고 했다. 비록 촛불 집회는 열리지 않아도, 나누었던 이야기와 경험은 다시 생활 속으로 들어갔다. ⓒ프레시안

"'나 하나쯤이야'가 '나 하나라도'로 바뀌었다"

지역 문화를 바꾸고 있는 생활인들. 그들 자신의 생활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동그라미하나' 씨는 "쇠고기를 안 먹고, <경향신문>과 <한겨레>를 보게 됐다"며 "미국산 쇠고기 판매로 논란을 불렀던 대형마트들도 이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서울시교육감 선거에서도 주변의 친하지도 않았던 사람들까지 문자 연락을 돌려 투표 참여를 호소했다"며 "내가 생각해도 참 유별난 행동을 하게 되지만 또 어쩔 수 없더라"며 웃었다.

'준일맘' 씨는 "예전에는 내가 안 나가도 남들이 알아서 하겠지 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제 나 하나라도 가서 더 보태야겠다는 식으로 마음이 바뀌었다"며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최소한의 힘으로라도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한편, 긴 토론이 끝난 뒷풀이 자리에서는 촛불 300일을 축하하는 작은 케이크가 마련됐다. 그 흔한 축하 노래 대신 다른 노래를 부르자는 제안에 문화제에서 다져진 실력이 발휘되는 듯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열창이 시작됐다. 노래는 부르는 사람들을 꼭 닮아 있었다.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 모두가 힘들잖아요. 기쁨의 그 날 위해 함께할 친구들이 있잖아요. 혼자라고 느껴질 때면 주위를 둘러보세요. 이렇게 많은 이들 모두가 나의 친구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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