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게이트로 도덕성이 무너지면서 우리는 하나의 '역사적 순간'을 목도하고 있다. 마치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과 전두환 대통령의 구속처럼 한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소환은 노무현 모델 또는 노무현식 정치의 종말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정치권의 비주류이자 아웃사이더에서 출발한 정치인 노무현은 한국 정치사에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2007년 대선에 볼 수 있었듯이 노무현 정치는 결국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 검찰에 출두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 ⓒ뉴시스 |
노무현 모델의 등장과 쇠퇴
2003년 노무현 후보가 당선될 당시 많은 사람들은 큰 기대에 휩싸였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대선 직후 노무현 당선자가 대북송금 특검법을 수용하고 측근 안희정이 나라종금 비리로 연루되면서 이내 실망감이 커졌다. 당시에 노무현과 386정치인의 등장에 열광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난 그들에게 "지금처럼 계속 간다면 노무현은 진보세력을 망칠 것이고, 안희정은 386세대를 망칠 것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대북송금 특검은 민주당 분당의 서막이 되었고 나라종금 비리는 수많은 게이트의 시작에 불과했다. 첫 단추부터 잘못 시작한 노무현 정부는 계속 방향감각을 상실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왜 노무현 정부가 실패했는가?
노무현 모델은 과거의 정치 모델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다. 노무현 모델의 핵심적 요소는 '반(反)정치의 정치'로 볼 수 있다. 정치적 문제를 집요하게 비정치적 방법으로 해체하는 정치를 추구했다. 그는 여의도 정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정당을 버리고 탈당했다. 대의제 정치의 입법보다 인터넷과 거리의 대중정치에 몰두했다. 국민이 요구하는 사회적 형평성의 강화보다 정권이 요구하는 탈지역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그 후 노무현식 정치는 노사모, 인터넷, 그리고 승부사적 정치공학에 몰입했다. 이 세 가지 요소는 노무현 모델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
먼저, 2002년 노무현 돌풍을 일으킨 노사모는 탈정치의 대중운동을 벌였다. 이는 미국의 오바마를 지지했던 오바매니아(Obamaina)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무브온(MoveOn), ACORN, Netroots Nation 등 수많은 오바마 지지자들은 모두 풀뿌리 조직에 참여하는 동시에 민주당의 당원으로 활동했다. 반면에 노사모는 정치조직임에도 불구하고 탈정당, 탈정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정치가 공적 영역을 확대하는 대신 연예인의 팬클럽처럼 사적 영역에 머무르게 하는 퇴행적 모습을 연출했다. 결국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조사를 받기 위해 떠나던 날 노사모는 노란 풍선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이 모습이 마치 재벌 총수의 비리를 엄호하는 직원들의 모습과 겹쳐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둘째, 노무현 전 대통령을 인터넷이 선출한 최초의 대통령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제는 인터넷을 모르고 정치인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인터넷은 유권자와 정치인을 연결하는 강력한 소통수단이 되었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인터넷이 정당과 의회를 대체하는 정치적 수단으로 과대평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미국의 대통령처럼 의회의 반대파를 인내심을 갖고 설득하기보다 국회와 정당을 무시한 채 인터넷을 통해 곧 바로 지지자들에게 호소했다. 이러한 대통령의 모습은 대의제에 대한 강한 불신으로 비쳤다. 노무현 모델에서는 국회의 민주당과 민노당 뿐만 아니라 민주노총과 시민단체도 모두 거추장스러운 반대파일 뿐이었다.
셋째, 노무현 모델은 이념과 정책을 중심으로 정치를 펼치기보다 탈지역주의를 위한 정치공학을 통한 승부수를 중시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북송금 특검을 통해 김대중 정부의 핵심인사를 제거하고 민주당을 분당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호남과 연결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영남 민주화세력이 호남에 기대고 있다는 자신만의 콤플렉스와도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하지만 호남에 정치적 기반을 가진 민주당과 결별하면 영남의 지지를 확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열린우리당의 순진한 계산과는 달리 노무현 정부의 지지는 전혀 확대되지 않았다.
급기야 2005년 한나라당에게 대연정을 제안하면서 탈지역주의 정치공학의 계산은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이러한 반정치적 정치공학은 연정 파트너가 되길 기대했던 한나라당과 아무런 사전교섭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에게도 일언반구 알리지 않은 '깜짝쇼'로 연출했던 것이다. 사실 깜짝쇼의 원조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조차 '3당합당'을 위해선 치밀한 정치협상(야합?)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위와 같은 노무현식 정치모델은 철저하게 민주주의의 제도적 토대를 약화시켰다. 풀뿌리 정치조직과 인터넷은 민주적 시민문화를 강화할 수 있는 중요한 자원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중적 정치참여는 대의제 민주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가져야 현실적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어느 나라의 사례를 보아도 참여민주주의란 대의민주주의를 약화시키거나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의 기능을 갖는다. 하지만 노무현 모델은 사실상 국회와 정당을 (심지어 여당조차도) 감정적으로 무시하거나 정책결정에서 체계적으로 배제했다.
이러한 노무현 모델의 가장 강력한 동력은 도덕성이었다. 사실 도덕을 정치의 무기로 강조하는 전략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일찍이 유교정치는 '도덕정치'를 통하여 성장했다.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위인지학(爲人之學)을 강조하던 유학은 도덕적 기준을 정치의 핵심적 요소로 보았다. 이 기준에 따라 정통유학과 사문난적을 구분했다. 모든 세력을 선과 악의 대결로 본다. 하지만 노무현의 도덕정치는 현실정치의 벽에 부딪쳤다. 청문회 스타가 권력의 정점을 지나 부패정치인의 나락으로 떨어지자 노무현 모델도 힘없이 무너졌다.
도덕정치와 반대로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올바르나 약한 것보다 강하지만 틀린 것이 낫다"고 말했다. 라인홀트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읽고 깊은 공감을 가진 클린턴은 도덕의 힘과 함께 권력의 힘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클린턴은 르윈스키 스캔들로 보수파의 맹공격을 받았지만 그의 인기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현실정치에서 제시한 온건하고 대중적인 정책이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보수적 공화당원은 제외하더라도 최소한 민주당원과 중도파 유권자에게는 그들을 위해 일하는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심어놓았다.
정책 레짐의 보수화와 지지층의 붕괴
노무현 모델이 만든 가장 큰 비극은 철저하게 현대 정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정책 체제(policy regime)의 강화를 무시했다는 점이다. 노무현 정부는 집권 수년이 지나도록 로드맵을 만들기 위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달리 말하면 집권 직후 당장 무엇을 할 것인지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다는 민주당을 버리고 달려간 곳은 '2만불 시대'이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에서 많이 볼 수 있던 낯익은 구호는 노무현 정부의 새로운 정체성이 되었다. 정말 그들 말대로 외교안보정책은 진보적 기조를 제시하는 반면, 경제정책과 정책은 보수적 기조를 유지하기로 의도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결과는 예측대로 되었다.
노무현 정부의 정책은 요란한 '진보'의 나팔소리와는 달리 별로 진보적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 사실 보수세력이 집요하게 노무현 대통령의 언행과 스타일을 물고 늘어진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정책에서 별로 급진적인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라크 파병, 법과 질서의 강조, 노사분규의 자율해결 원칙, 아파트 원가공개 반대, 민간의료보험의 활성화 등은 진보세력보다 보수세력에 더 가까운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노무현에 열광했던 대학생과 청년층도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노무현 대통령 집권 5년 사이 대학생 등록금은 해마다 약 10%씩 인상했지만, 정부 보증 학자금 대출금리는 계속 올라만 갔다. 전체 고용인구 가운데 고용율은 60%를 밑돌고, 비정규직 비율은 27%에서 36%로 급상승했다. 결과적으로 노무현 정부가 등장한 이후 사회적 불평등은 계속 악화되었다.
노무현 모델이 추구한 탈정치화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는 의회를 통한 입법 활동의 경시 또는 포기였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탄핵 역풍'으로 다수당이 된 열린우리당은 사학법, 언론법, 국가보안법 등 소위 '개혁입법'을 강력하게 추진했지만 정치적 기반은 더욱 협소해졌다. 당시 노무현 정부가 민주당의 분당과 한나라당에게 대연정을 제안하는 대신 민주당, 민노당, 시민사회와 함께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내세운 광범위한 '복지연합'을 추구했다면 전국적 차원에서 정치적 기반이 더욱 강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1930년대 미국의 루스벨트 행정부의 경험은 한국 정치에도 매우 중요한 역사적 교훈을 준다. 루스벨트가 중산층과 노동조합을 기반으로 한 '뉴딜연합'을 형성하면서 민주당은 남부를 기반으로 하는 지역정당이 아니라 광범위한 계층을 기반으로 한 전국정당으로 발전했다. 루스벨트 정부가 노동조합의 권리를 확대하고 복지국가를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남부에서도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노동자의 비율이 급증했다.
뉴딜연합이 남부에서 세력을 확대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남부는 산업화가 늦어 북부에 비해 가난했기 때문에 복지국가를 통해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둘째, 북부 민주당의 진보주의자들은 남부의 지지를 얻기 위한 대가로 흑인을 차별하는 짐 크로법(Jim Crow Law)을 암묵적으로 인정했다. 이 점은 루스벨트가 얼마나 현실주의적 정치인인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1964년 존슨 정부가 흑인의 권리를 확대한 민권법에 서명하자 남부의 백인은 민주당에 등을 돌렸다. 이미 민주당은 흑인 민권운동을 거부할 수 없었지만 남부 백인의 지지를 잃을 것은 불을 보듯이 뻔했다. 존슨 대통령은 민권법은 도덕적으로는 옳은 일이었지만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결국 남부는 점차 공화당에 기울었고 2000년 부시 행정부가 권력을 장악할 때 가장 강력한 기반이 되었다)
미국의 루스벨트 행정부와 비교해서 한국의 노무현 정부가 경험한 오류는 한국 정치가 지역 이슈에서 계층 또는 복지 이슈로 전환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놓쳤다는 점이다. 이는 무척 뼈아픈 일이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일은 한국에서 지역주의 문제는 '호남 문제'가 아니라 왜 영남의 중산층과 노동자들이 민주당, 민노당, 진보신당이 아니라 한나라당을 지지하는지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다.
결국 효과적인 탈지역주의 전략은 노무현 모델의 정치공학처럼 위로부터 한나라당과 연합하는 전략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영남의 중산층과 노동자와 연대하는 계층연합의 전략이 되어야 했다. 만약 당시 노무현 정부가 남부의 백인 노동자를 지지층으로 확대한 미국의 루스벨트 정부의 사례와 같이 복지국가를 강화하는 입법을 추진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정치적 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최근의 검찰 소환도 사실상 정치적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진보적 정치전략과 한국형 뉴딜연합
노무현 모델이 붕괴한다고 해서 우리가 하염없이 슬퍼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과거의 오류에서 새로운 교훈을 얻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안타깝게 생각해야 한다. 지금 민주당이 '뉴민주당 플랜'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국민에게 변화와 쇄신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 없다. 지난 4.29 재보선에서 민주당이 수도권에서 선전했지만, 이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실망과 한나라당 내부의 친이와 친박의 갈등으로 인한 반사이익으로 얻은 결과이지 자력으로 이룬 승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민주당이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2010년 지방선거의 승리는 물론 다음 대선에서 집권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노무현 모델이 사라진 민주당은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모든 새로운 출발은 과거에 대한 냉정한 반성과 평가에서 출발해야 한다. 1992년 4번의 선거에서 패배한 영국 노동당은 자신들의 당헌과 선거강령을 재평가하기 위해서 '사회정의위원회'(Social Justice Commission)를 만들었다. 당대의 진보적 학자가 주도한 사회정의위원회는 노동당의 비전과 전략을 새로 수립할 것을 요구했고 과감한 정당개혁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후 신노동당(New Labour)의 현대화를 통해 전통적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을 대대적으로 수정했다. 이로써 새로운 수권정당이라는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다. 한국의 민주당은 무엇보다도 지난 10년 동안 민주정부의 공과를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왜 2007년 대선에서 패배했는지 처절한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한나라당보다 더 잘 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새로운 비전과 전략을 제시해야 한다.
이제 민주당, 민노당, 진보신당을 포함한 개혁진보세력은 무엇보다도 경제관리에 유능한 세력이라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선거에서 경제 이슈를 뺏겨서는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없다. 부자를 위한 감세와 재벌 편향의 한나라당 정책을 비판하고 중소기업, 중산층, 서민을 위한 정책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부유층을 위한 감세 대신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감세를 요구해야한다. 1930년대 미국 루스벨트 행정부의 뉴딜은 댐을 건설한 토건사업이 아니라 사회복지를 통해 서민층의 소비를 촉진하는 사회정책이 핵심 내용이었다. 이를 위해서 경제정책은 사회정책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한다. 고용을 확대하는 동시에 노동력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교육과 훈련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를 위해 체계적인 조세정책과 교육정책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2008년 미국 대선에서 볼 수 있듯이 오바마 대통령은 경제위기에 직면하여 고통을 겪고 있는 "중산층의 즉각적 복원"을 위한 정부의 적극적 역할과 부자에 대한 증세 법안을 내세워 커다란 지지를 얻었다.
한국 정치의 새로운 정책 대안은 대의제 정치에서 현실적인 방안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시민사회는 다양한 사회문제를 제기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만, 입법자로서 의회의 역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다른 한편 정당은 시민사회의 새로운 요구에 항상 주목하면서 빠르게 반응해야 한다. 새로운 진보세력은 정당과 시민사회의 풀뿌리 정치에서 출발하여 더 광범위한 대중과 결합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정당의 대중적 기반을 확대하는 한편 공직선거 후보선출뿐 아니라 정강정책을 전당대회에서 결정할 수 있는 상향식 의사결정구조를 강화해야 한다. 더 넓은 차원에서 정당이 사회적 합의를 만들기 위한 전략적 방향을 정하고, 이를 토대로 노사정 사이의 합의를 만드는 사회협약을 추진해야 한다. 1990년대 선진산업경제의 다양한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사회적 대화는 임금과 경제 문제뿐 아니라 교육, 의료, 주택, 연금 등 복지정책을 포함해야 한다. 이를 통해 복지국가의 등장이 민주주의의 강화를 위해 필수적이라고 믿는 광범위한 사회세력이 참여하는 '한국형 뉴딜연합'을 시급하게 형성해야 한다.
역사의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하여
새로운 진보의 길은 무력한 이상주의가 아니라 현실정치의 정책 레짐의 강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이는 20세기 초반 독일의 뛰어난 사상가 막스 베버가 말한 '심정윤리'와 '책임윤리'에 관한 유명한 강연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성직자는 행위의 결과에 관계없이 심정윤리를 강조할 수 있지만, 정치인은 철저하게 행위의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결국 정치인은 악마와 손을 잡고서라도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 좋은 결과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베버는 책임윤리야말로 진정한 정치가와 아마추어를 구분하는 결정적 기준이라고 보았다. 선과 악의 이분법의 심정윤리에 사로잡힌 노무현 모델은 정치를 공적영역이 아니라 사적영역으로 후퇴시키고 말았다. 이런 점에서 노무현은 철저한 아마추어였고, 너무나 슬프게도 최소한의 도덕성도 지키지 못한 인물이었다.
이렇게 노무현 모델이 붕괴하는 역사적 시점에 우리는 망연자실한 심정으로 외롭게 서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시선은 역사의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새로운 비전과 전략을 가진 386세대가 등장해 앞으로 큰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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