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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합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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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합리주의

[박동천의 집중탐구]<35>셋째 매듭

제3부 합리주의: 권력숭배 프레임
제8장 셋째 매듭


"합리적(合理的)"이란 "이치에 맞는다"는 뜻으로서, 정치사회가 합리적으로 조직되어 작동한다면 좋을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만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온통 불합리로 가득 차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북한주민들을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한다고 하는데 북한정권은 로켓이나 쏴올리고, 그런 북한을 신해철은 축하하고, 그런 신해철을 보수파는 검찰에 국가보안법 위반이라고 고발한다. 국회에서는 여전히 몸싸움이 성행하고, 민주당은 정동영 복당문제로 시끄러우며, 한나라당은 대통령 눈치만 본다. 학교에서 발바닥을 110대나 맞은 학생이 자살하고, 대한통운 해고노동자 복직투쟁 중이던 화물연대 지회장은 "이런 식의 선택을 해야 한 발짝이라도 전진과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 속상하고 분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목매 숨졌다. 전세계적으로 연결된 먹이사슬은 이제 조류독감, 광우병에 이어 돼지독감까지 만들어내면서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 불합리한 세상을 합리적으로 고치면 얼마나 좋을까!
▲ "이 불합리한 세상을 합리적으로 고치면 얼마나 좋을까!" ⓒ뉴시스

그런데 어떻게 되면 합리적일까? 신해철이 입을 닥치는 것이 합리적일까 아니면 그 정도는 웃고 넘어가는 것이 합리적일까? 북한이 그저 남한과 미국에게 무릎꿇고 구걸하는 것이 합리적일까 아니면 북한의 자존심을 배려하면서 사고는 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합리적일까? 광우병, 조류독감, 돼지독감 따위가 자본주의의 탐욕 때문에 생긴 천형이라고 보면서 육류 수입의 문을 닫아거는 것이 합리적일까 아니면 대량생산과 국제무역으로 값싼 고기를 먹게 된 이점은 유지하면서 예기치 못한 위험요인만을 별도로 관리한다는 방향이 합리적일까? 고용과 자본 사이에 합리적인 관계를 보장할 방법, 사회적 약자의 권리가 은밀한 곳에서도 침해되지 않도록 만들 방법, 한국사회 대다수의 몸과 마음에 짙게 밴 전제적이고 폭력적인 아비투스(habitus, 삶의 습성)을 평화적이고 창조적인 아비투스로 바꿀 합리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들은 두 갈래의 화두로 집약이 된다. 합리성이라는 것이 하나의 표준으로 수렴하는가?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을 그렇게 획일적인 합리성의 기준에 따라 행동하도록 강제하거나 세뇌하는 것은 바람직한가?

나는 지금까지 제3부에서 인간의 지식이 증진함에 따라 무엇을 모르는지에 관해서도 더 많이 알게 되었다는 기조에서 논의를 진행했다. 그리하여 전형적으로 초급산수와 같은 어떤 영역에서는 합리성에 관한 표준이 상당히 획일적으로 확립되어 있기도 하지만, 중요하고 복잡한 문제영역일수록 합리성 자체의 기준이 무엇인지가 부정형의 상태임을 지적했다. 즉, 목적과 가치가 결부되는 맥락에서는 합리성이라는 개념의 형식이 당사자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따라 다분히 좌우된다는 말이다. 이처럼 목적이나 가치가 서로 경합하는 상황에서 합리성이라는 말을 평면적으로만 사용한다면, 나는 내 입장을 합리라고 상대를 불합리라고 부르고, 상대는 자기를 합리라고 나를 불합리라고 부르는 교착상태를 벗어날 수가 없게 된다.

상대방의 합리를 나는 불합리라고 부르고, 내 합리를 상대는 불합리라고 부르는 상태를 합리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합리성"의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정치사에서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이나, 1960, 1961, 1972, 1979, 1987년 등에 일어났듯이, 노골적인 형태의 힘겨루기는 대개 합리성의 표준에 따라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경우야말로 교과서적인 합리성의 기준이 실효적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현실의 흐름이라고 하는 힘에 따라 합리성의 기준이 정해지는 순간들이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합리성만을 고집한다는 것은 곧 상대를 힘으로 눌러버리고 싶은 권력숭배가 되는 것이다.

미국의 남북전쟁이나 우리의 6월항쟁처럼 힘겨루기가 실제로 일어질 때에는 양심이 있는 시민이라면 자신의 양심에 따라서 한쪽 편에 가담해서 싸우는 것이 구경꾼들보다 도덕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그처럼 발가벗은 무력대결까지는 가지 않는 편이 건강한 공동체일 것이다. 하지만 합리성을 평면적으로만 바라보고 추구하면 서로 다른 합리성 사이에 충돌을 피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평면적 합리성이라는 제일층위와는 별도로 평면적 합리성들 사이의 충돌을 처리하기 위한 제이층위의 입체적인 합리성이 필요하게 된다.

제이층위의 입체적 합리성은 다시 말하면 정치적 합리성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경쟁하는 양쪽 입장의 내용을 파고들어 우열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쌍방의 입장에서는 각자가 내용상으로 우월하다는 순환론의 형식을 깨뜨리기 위한 타이 브레이크에만 초점을 맞춘다. 교착상태에서는 공동체가 아무 행동도 취할 수가 없다는 점에 주목해서, 어떻든 교착을 깨뜨려 발걸음을 앞으로 떼어보는 데에 모든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자발성을 중시하는 가치관과 연관된다. 예컨대 새벽 일찍 일어나 냉수마찰과 달리기 또는 산보를 매일하면 모르긴 몰라도 몸과 마음의 건강에 아주 좋을 것이다. 따라서 누가 그렇게 한다면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비합리적이 되는가? 논의를 위해 한 술 더 뜨는 예를 보면, 술이나 담배는 건강에 좋지 않다. 아마 상습적인 음주자나 흡연자들 자신이 술과 담배를 끊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심지어 금주나 금연을 "결심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이런 경우, 습관적인 음주나 흡연이 비합리적이라는 데에는 광범위한 합의가 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금주나 금연을 국가가 강제할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강제하기 어렵다는 차원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강제가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강제가 사회질서로서 바람직할까?

이런 질문들을 독자적인 것으로 다루면서 확정적인 답을 구하고자 한다면 물론 대단한 논란을 먼저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취지와 관련해서 생각해보면 약간이나마 정돈된 시각을 얻을 수 있다. 민주주의란 시민 개개인이 인격적으로 평등하다는 대전제 위에서 추구되는 이념이다. 물론 "민주주의"라는 말만을 풀기로 한다면 레닌의 "민주집중"이나 김일성의 "인민민주주의"도 얼핏 민주주의에 끼워 맞출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앞에서 몇 번 지적했듯이 "인민의 의사"라는 것이 워낙 잡으려고만 하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리는 물이나 바람 같은 것이라서, 권력자가 자신의 의사를 곧 "인민의 의사"라고 포장하면서 반론을 무력으로 억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민"의 이름으로 인민을 억압하는 것이 "민주주의"가 될 수도 있다고 기어이 우길 여지를 논리적으로 봉쇄하기는 어렵다고 양보하더라도, 여전히 그런 체제가 대단히 수상하다는 느낌 또한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나 수카르노의 "교도 민주주의"처럼 민주주의 앞에 이상한 한정사가 붙는 경우는 대개 수상한 냄새를 풍긴다. "인민민주주의" 역시 이미 "민주"라는 문구로써 인민주권이 함축되는데, 굳이 "인민"이라는 수사를 중복한다는 데서 수상한 의도가 탐지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나름대로 정합성을 가지면서 작동하는 민주주의는 단순한 문구가 아니라 실천적인 체제이다. 즉, 말로만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역사를 봐야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통상적으로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유럽과 영미의 사회들은 전형적으로 자유민주주의라 불리는 체제들이다. 자유주의/사회주의의 이분법만을 생각하면 자유민주주의가 사회민주주의와 대척된다고 착각할 수가 있지만,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거의 예외 없이 사회민주주의 계열의 정당들을 허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정치체제로서 자유민주주의와 경제질서를 인도하는 이념으로서 사회주의는 얼마든지 서로 융통될 수 있다.

어쨌든 자유민주주의는 말이 먼저 생긴 것이 아니고, 현실의 체제가 일정한 형체를 갖춘 다음 그것을 가리키는 명칭으로서 말이 나중에 생겼다. 영국의 경우 19세기 후반 참정권이 민중에게 확산된 다음의 체제, 그리고 프랑스의 경우에도 19세기말 영국식 대의제를 받아들인 제3공화국 이후의 체제가 전형적인 자유민주주의에 해당한다. 인민이 주권을 보유하되 주기적인 선거 또는 특별한 경우 인민투표와 같은 직접민주주의를 통해서 주권을 표현하고, 평상시에는 의회와 기타 행정부나 사법부 등등, 정부제도가 위임받은 주권을 대리해서 표상하는 제도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언제나 "다수의 횡포", 다시 말해 "인민"의 이름으로 인민을 억압할 수 있는 위험이 상존하기 때문에, 소수파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으면 독재로 타락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그러므로 반대의 권리, 즉 표현의 자유가 자유민주주의에서는 치명적으로 중요한 시금석으로서 헌정질서의 핵심원리에 포함되고 실천되어야 한다.

표현의 자유란 다시 말하면 반대할 수 있는 권리, 이견을 가질 권리로서, 이것이 권리(right)라는 말은 곧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말이다. 다수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의 경우 그로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고" 따라서 그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또한 "옳다"는 말이다. 다수를 대변하는 정부가 아무리 힘이 세더라도, 그의 "옳은" 의견을 억압하면 잘못이라는 말이다. 각 개인에게는 각자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서 자발적으로 옳다고 생각되는 믿음을 가질 권리가 있고, 그런 점에서 모든 개인이 동등한 인격체라는 대전제가 바탕이 되는 것이다. 즉, "옳음"이라는 것이 하나여야 할 필요가 없다는 발상, "옳음"이 하나일 때도 있겠지만 여럿일 때도 있을 수 있다는 발상이 기초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면적 합리성에만 집착해서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불합리하다거나 미개하다고 보면서, 무턱대고 계도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이웃을 설득하겠다는 태도인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이웃을 내 맘대로 주무르겠다는 심보에 지나지 않는다. 오웰은 이런 취지에서 번햄의 권력숭배를 고발한 것이고, 나는 그러한 오웰의 취지를 보다 일반적으로 적용해서 합리주의가 권력숭배로 흐르기 쉬운 경향을 이 부에서 논의했다. 평면적 산술적 합리성에 집착하면 권력숭배가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권력숭배에 빠지지 않으려면 입체적 정치적 합리성의 지평으로 안목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웃을 나와 동등한 인격체로서 존중하고, 내 취향이나 가치와 다른 모든 차이들을 관인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권력숭배와 합리주의를 뒤죽박죽으로 혼동하는 심성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심성에서 벗어나게 되면, 부수적으로 여러 가지 분별력이 함께 함양될 수 있다. 예컨대 결정의 차원과 관인의 차원이 서로 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차원이라는 분별력도 그중 하나다. 관인만 해서는 물론 정치사회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결정이 필요할 때에는 여러 가지 가치를 동등하게 다룰 수 없고, 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한번의 선택 때문에 사회생활의 모든 국면에서 획일적인 파장이 미쳐야 하는 것은 아니다. 천성산에 터널을 뚫어 경부고속철을 건설하기로 결정한다고 해서, 대한민국 땅의 모든 산에 터널을 뚫게 되는 것도 아니고, 천성산 터널에 반대하는 의견은 모두 억압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새만금 간척을 안 하기로 결정한다고 해서 앞으로 영원히 모든 간척이 금지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정책을 결정하기 내려진 선택은 그 결정에 따라 시행되는 일에 관해서만 해당이 되는 것으로, 그 일 바깥에 위치하는 일들에 관해서는 여전히 관인이 가능하고, 나아가 그 결정에 대한 시비가 계속되더라도 결정의 시행이 반드시 방해를 받는 것도 아니다.

요컨대 정치사회에서 정책결정은 초급산수에서 어떤 문제에 관한 정답을 찾는 과정과는 다르다. 물론 처음에는 정답을 찾기 위해 관련당사자들이 노력을 하지만, 그들이 각자 찾은 답이 서로 다르고, 상호검토와 토론을 충분히 거친 다음에도 그 가운데서 논란의 여지없는 하나의 "정답"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때부터는 과학적 합리성보다는 정치적 합리성이 적용되어 정답보다는 소통의 밀도를 가능한 한 높게 유지하면서 교착을 깨는 데 목표가 주어져야 한다. 물론 교착상태에서 다시 생각하니 굳이 교착을 깨지 않아도 된다는 각성, 즉 결정을 미뤄도 된다는 깨달음이 나올 수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바라보면, 표현의 자유를 공정한 게임의 규칙으로서 바탕에 확실하게 깐 위에서 절차와 제도를 통한 갈등의 해결을 추구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형태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절차를 통한 문제해결을 정치적 합리성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한국인 주류의 정치의식이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하나 더 있다. 나는 그 장애물을 선험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고 보는데, 이제 제4부에서 그 문제를 논의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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