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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한 몸짓으로 공허를 가리다"

[철학자의 서재] <수집 : 기묘하고 아름다운 강박의 세계>

인간에 관한 이야기 혹은 인간에 닿으려는 목소리

인간은 기나긴 지성의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시도해 왔다. 아마도 자신이 마주한 많은 문제들의 답을 그러한 성찰 끝에 구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던 까닭일 것이다. 아무튼 학문과 예술을 넘어 신화와 종교에 이르는 다양한 갈래들을 통해 인간의 다양한 면모들이 하나하나 통찰되고 이는 인간이란 판게아(pangea)*를 짐작하게 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이로써 인간의 참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고 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인간 이해의 폭과 깊이가 가일층된 것은 사실이다.

'사회적 동물'처럼 철학자들의 단적인 인간 규정들은 인간의 특성을 정연하고 명료하게 지적함으로써 관련된 논의들과 함께 인간의 이해에 있어 지배적인 관점을 형성하였다. 하지만 인간의 자기성찰과 관련하여 더 풍부한 이야기들이 신화, 문학, 예술, 과학처럼 철학의 외부에 어쩌면 더 생동감 있는 형태로 존재한다.

가령 레벨이 서로 다른 신 혹은 하이브리드 스타일 몬스터들의 대결과 무한루프 저주 이야기로 가득 찬 그리스 신화는 인간의 불완전성이나 삶의 숙명성을 그 어떤 논리적 설명보다 생생하게 전해준다. 과학적 성과 덕분에 인간 또한 진화의 선상 위에 있는 동물임이 상식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고, 무의식적 본능과 충동, 콤플렉스 등에 지배받는 인간의 단면을 직시하게 되었다. 만일 신성과 악마가 공존하고 분열과 성장이 거듭되며 체념과 편집이 양립하는 인간의 다면성을 조용히 관조하고자 한다면, 카라마조프와 그 자식들에 대한 감탄할 만한 허구도 훌륭한 창이다**.

그러나 어떤 창으로 본 모습이든 또 어떤 규정이든 최선의 경우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을 뿐 완결적이기는 어렵다. 그래서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진지한 목소리는 숱하지만, 잦아들지 않고 오히려 끊임없이 새로운 목소리가 더해지는 것이다.

필립 블롬의 <수집>(이민아 옮김, 동녘 펴냄)은 그런 목소리 가운데 하나로 그 울림이 인상적이다. 풍부하고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가득 차 있는 문화사적 에세이임에도 역사적인 서술과 더불어 수집 행위 이면에 놓인 인간의 모습을 새로운 각도로 관조하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그에 관해 그다지 많은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말이다.

수집에 담긴 역사

▲ <수집 : 기묘하고 아름다운 강박의 세계>(필립 블롬 지음, 이민아 옮김, 동녘 펴냄). ⓒ프레시안
<수집>에서 블롬은 16세기 이후 본격화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수집의 역사를 다양한 인물과 사건들을 통해 소개하는데, 특히 르네상스기를 전후하여 수집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한 점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세속적인 의미에서 보면, 16세기에 이루어진 지식의 확장으로 새로운 현상에 대한 새로운 반응,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유럽의 학자들은 망원경으로는 대우주를, 현미경으로는 미세한 세계를 탐험했다. 인쇄기와 조선술, 항해술 등의 기술적 혁신으로 세계 규모의 교역이 가능해지면서 값싼 물건이 훨씬 더 많이 유럽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금융체계가 정교해지면서 상품 교환이 쉬워졌다. 네덜란드나 베네치아 공화국 같은 무역 제국이 유례 없는 부를 축적한 것도 수집 문화 확산의 또 다른 중대 요인이었다.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시장으로 끌어내거나 쓸모없는 물건을 찾는 데 매달리기 위해서는 시간과 재력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실로 상업이 번창한 곳 어디에서나 수집 활동이 넘쳐났다."

말하자면 유럽의 팽창과 부의 축적이 가장 단적인 수집의 조건이었던 셈이고 더불어 세계관의 변화와 새로운 지식에 대한 열망 등도 수집활동의 확산을 가속화한 중요한 계기였다.

수집 활동이 확산되던 초기에는 불분명한 원칙과 기준 하에 희귀한 물건들을 무차별적으로 사들이는 박물학적인 수집이 일반적이었지만 차츰 분류법 등 합리적인 체계화가 적어도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자리를 잡게 되었다. 제국의 등장과 세계 약탈이 본격화됨으로써 엄청난 양의 수집품들이 유럽으로 집중되는데, 이 물건들이 체계적인 분류법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전시되는 대형박물관과 미술관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이처럼 유럽의 근대사를 수집 행위를 중심으로 되짚는 블롬의 이야기는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점이 많다. 실제로 세계를 향한 확산의 열망은 세계를 집약하는 수렴의 열망과 궤를 함께 하기 때문이다. 유럽의 왕과 귀족, 신흥 부호들 가운데 나타났던 수집의 열광은 세상을 발 아래 두려던 그네들 욕망의 미니어처였고 막대한 수집품들은 세계 자체의 미니어처였다. 세상은 처음에 궁전이나 저택의 회랑에 머물다 뒤에 박물관이라는 자신의 성을 짓고 의젓하게 입주한다.

<수집>을 넘는 수집에 대한 단상

① 눈먼 강박

수집이라는 '기묘하고 아름다운 강박'에는 그 대상과 상관없이 몇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우선 강렬하고도 맹목적인 욕망을 동반한다는 점이다. 이 욕망은 철저히 배타적으로 발휘되는 것이어서 이성적 판단의 개입 여지는 거의 없다. 물론 취득과 흥정, 분류 등을 위해 좀 냉철하게 생각하는 일 정도는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그러한 욕망의 실현 행위에 대한 합리적 이해 역시 별로 남을 게 없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철두철미하게 합리적이고 계획적인 수집이란 일종의 형용모순이다.

블롬의 책에는 오슨 웰스의 걸작 <시민 케인>의 실제 모델이었던 신문 재벌 허스트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는데, 그는 오늘날의 화폐 가치로 1억6000만 달러에 달하는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그 10배의 빚을 지고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그 빚은 고스란히 그의 수집품 구입을 위한 것이었다. 이처럼 수집의 욕망은 많은 비용 정도가 아니라 때론 파멸을 대가로 치를 정도로 맹목적이다. 치밀하게 계산되고 절제하며 최후에는 엄청난 수익으로 돌아오는 경우라면 수집이라기보다 재테크다.

블롬이 예로 들고 있는 키치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껌종이나 냅킨처럼 유용성이 의심스런 물건들이 수집되는 사례를 접한다. 대상에 우연히 의미가 부여되면서 수집이란 행위가 시작되기 때문에, 쓸모없는 것을 왜 모으느냐고 반문하는 것도 적절해 보이지 않으며 우표, 서적 등의 수집에 대해 어떤 쓰임새가 있으려니 여기는 것도 착각일 수 있다. 수집은 사용과 향유라는 실용적 목적과 의외로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 행위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적어도 실용적이거나 합리적인 목적 및 이유는 수집의 가장 중대한 동기가 아니다. 이해할 수 없다면 차라리 그냥 '저러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수집에 관해서는 사실에 더 가깝다.

② 나만의 것

수집의 욕망은 지극히 사적인 소유를 지향하며 개인적이다. 동업은 가능하지만 공동 수집은 말조차 낯설고, 과시라면 모를까 공유를 위한 수집은 없다. 이런 단정에 대해 대의명분을 갖는 수집 행위나 개인 수집품의 사회 환원이 반박의 사례가 될 수는 없다. 가령 간송 선생의 수집 행위는 인간적 기벽보다 비교적 뚜렷한 목적의식 하에 수행된 사회적 실천에 가깝다. 요컨대 처음부터 우리가 말하고 있는 '수집'이 아니었던 셈이다. 또 평생 모은 수집품을 사회에 환원하는 경우는 그러한 기증의 미덕을 충분히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이미 수집 대상에 대한 사적 소유의 욕망이 소진된 뒤에야 가능한 일이다.

수집의 대상은 실로 다양하다. 성냥갑에서 유골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마주하는 모든 것들이 수집의 대상이 되고, 잠재적인 경우까지 포함한다면 이것만으로도 그 다양성은 일반적인 상식과 상상의 수준을 훨씬 벗어나리라 본다. <수집>에도 소개된 카사노바나 기억의 극장 에피소드에서 보듯 단순한 물건들이 아니라 지식, 사랑, 관계 등 무형의 대상으로 넘어가면 수집의 대상은 다양한 게 아니라 조금 과장해서 무한한 것에 가까워진다.

카사노바는 무엇을 수집했는가? 단순히 여자를 수집했다는 것은 답이 되기 어렵다. 앞서 말했듯 수집은 철저히 사적 소유가 가능해야 하는데 카사노바는 진시황이 아니어서 애당초 물건들처럼 여자들을 소유할 수 없었고 수많은 연인들과 한 집에서 동거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버림받지 않기 위해 먼저 버렸다는 참 삼류스런 그의 연애에는 처음부터 소유는커녕 관계의 '지속성'마저 빠져 있다. 그가 '소유'한 것은 일종의 경험 내지 기억에 가까운 것일 뿐이다. '다양하고 이색적이면서도 상처없이 깔끔한 사랑의 기억들'이라면 좀 미화된 것 같고 '생물학적인 남성성과 사회학적인 남성성의 편집적인 발현 경험들'이라면 정신병자 취급하는 것이 될까? 아무튼 그가 구체적 대상, 특히 여성이나 연인을 수집한 것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럴 수도 없었거니와 그러지도 않았으니까. 수집의 대상은 제약되지 않으며, 누군가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소유할 수 있는 모든 물건과 경험, 기억 등은 열렬한 수집의 대상이 된다.

③ 수집 너머의 인간

실용적이거나 합리적인 목적을 지니지도 않고, 공익적 가능성도 희박할 뿐 아니라 의미를 부여한 대상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수집의 정체는 무엇인가? 블롬은 글머리 '감사의 글'에서 어떤 술 취한 현자에게 각별한 감사의 뜻을 전하고 있는데, 그가 수집과 관련하여 특별한 생각의 실마리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는 <수집>의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하이네라는 수집가로 평생 동안 모은 수집품을 어딘가에 기증한 후 술에 취한 채 블롬과 조우하여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놓고 사라진다. 여기서 그는 아주 함축적인 인용을 통해 수집을 정의한다. 그에 따르면 수집이란 '공허를 채우는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수집이 강한 욕망의 계기를 갖기 때문에, 욕망이 모자람을 채우려는 것임을 상기한다면 수집이 공허를 채우는 것이라는 말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수집은 인간의 삶에 늘 따라다니는 모자람과 부족함을 충족하기 위한 욕망 실현의 형태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수집에서 드러나는 욕망이 그토록 맹목적이고 강렬한 까닭은 블롬의 현자 하이네가 말한 '공허'가 끝 모르게 크고 깊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허와 결핍을 채우려는 모든 욕망이 수집으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수집은 인간의 일반적인 결핍을 반영하긴 하되 수집가 개인의 취향, 콤플렉스 등이나 사회상과 연관되면서 특수한 형태를 취한다. <수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자. 합스부르크가의 왕 펠리페는 집요한 유골수집가였는데, 질병의 고통을 덜기 위해 성자의 유골을 얻고자 했고 임종시에도 그의 애장품들 가운데서 평온을 찾고자 했다. 그의 유골 수집은 질병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숙명과 그로 인한 공포가 그에겐 유별난 것으로 다가왔음을 암시한다. (펠리페는 고통과 공포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카밀로의 독특한 건축물 '기억의 극장'은 세상의 온갖 지식을 공간적으로 집약하기 위한 시도였다. 여기서는 카밀로가 16세기의 인물임과 대학교수로 초빙된 적이 있는 학자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앎의 열망이 불타오르던 시대는 어떤 지식인의 기벽 속에 담지되기도 했던 것이다. (카밀로는 결코 전지한 능력을 가질 수 없었다.)

어떤 경우든 수집은 치료제가 아닌 진통제처럼 본래의 목적인 결핍의 완전한 해소에는 결코 이르지 못한다. 결핍과 공허를 실제로 극복하는 과정이 아니라 극복을 염원하는 열렬한 기도에 가깝기 때문이다. 혹은 공허를 망각하고 외면하기 위한 의도적인 몰입이거나. 완결될 수 없고 종국에는 사라질 컬렉션을 향해 돌진하는 수집은 인간 실존의 부표이며, 모든 수집가는 진정 시시포스다.

공허와 결핍 과잉인 나는 바비 인형이나 모아볼까? 너무 흉하려나? 그래도 4차원 군주와 낙하산 혈맹원들의 녹색 아이템 수집 광풍보다는 깜찍하지 않을까? 민폐 극심한 저 득템의 광풍은 붙잡으려 해도 자꾸 '나아가는' 세상이 어지간히 불안하고 초조한 까닭인데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의 최고 아이템인 유신 유골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게 수집의 숙명이니까. 아저씨의 바비 인형 수집이든 4차원 혈맹의 녹색 득템이든 다시 이렇게 말해 주자. 참… 저러고 있다.

* 판게아(pangea) : 대륙 분화 이전의 원시대륙. 1915년 독일의 알프레드 베게너가 대륙이동설을 제창하였을 때 제안한 가상의 원시대륙으로 현재 서로 동떨어져 있는 대륙들의 형태를 조합하여 그 전체적인 윤곽을 추정한다.

**도스트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의 소설 <카라마조프 가(家)의 형제들> 참조.

'철학자의 서재'는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서평 연재입니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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