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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이 끝난 후…재벌그룹 유동성 '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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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쇼핑'이 끝난 후…재벌그룹 유동성 '흔들'

'승자의 저주'…대기업 구조조정 초읽기 진입

재벌그룹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채권은행들은 45개 주요 채무 계열사에 대한 신용위험 평가를 진행하고 있다. 주주들이 오매불망 기다리는 유동성 안정화는 구조조정을 통해서만 답이 나온다.

중심에는 지난 수년 간 인수합병(M&A) 시장을 뜨겁게 달궜던 쇼퍼(shopper)들이 있다. 과도하게 차입을 늘린 후유증으로 유동성 상태가 악화돼 계열정리가 진행 중이다.

기업 인수합병 시장에서는 최후의 승리자가 됐지만 곧바로 '승자의 저주(winner's curse)에 시달리게 된 셈이다. 이미 되팔기는 시작됐다.

▲승리자들은 저주를 이겨낼 수 있을까. 기업 인수합병 역사를 되짚어보면 인수합병 이후 성공 사례는 의외로 많지 않다. ⓒ연합뉴스

금호, 쇼핑은 잘 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금호아시아나그룹이다. 건설업계와 물류·택배업계 최강자인 대우건설, 대한통운을 인수해 단숨에 재계 순위 9위까지 성큼 뛰어올랐으나 차입금에 발목이 잡혔다.

지난해 말 주요 상장계열사 연결감사보고서를 기준으로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유동성 상태를 들여다봤다. 우선 눈에 띄는 게 급증한 부채다. 새로 편입된 계열사와 기존 계열사 간 부채비율 차이가 두드러진다. 공정거래위원회 권고기준은 부채비율 200%다.

총수 일가와 금호산업, 금호타이어-아시아나항공, 대우건설-대한통운으로 이어지는 지배구조의 핵심계열사 금호석유화학의 지난해 부채비율은 478.72%에 달한다(연결재무제표 기준). 금호산업의 부채비율은 1년 사이 605.13%에서 831.10%로 급격히 늘어났고 아시아나항공 역시 289.09%에서 680.94%로 크게 증가했다. 금호타이어 역시 마찬가지다(370.29%→546.33%).

반면 새로 그룹 체제에 편입한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의 부채비율은 각각 184.43%, 30.90%로 매우 양호한 수준을 유지했다.

주된 요인은 유동부채 급증이다. 금호석유화학 유동부채는 1년 만에 2조8483억 원에서 4조7129억 원으로 늘어났고 금호산업(2조8674억→5조2192억), 아시아나항공(1조3213억→2조5614억), 금호타이어(1조6301억→3조537억) 역시 크게 증가했다.

금호산업과 아시아나항공, 금호타이어는 각각 대우건설 지분 18.6%, 2.8%, 5.6%를 보유하고 있다. 아시아나항공은 대한통운 지분 23.9%를 소유했다. 기존 계열사들이 인수합병을 위해 차입금을 늘리면서 재무구조 악화에 시달렸다고 볼 수 있다.

유동비율 바닥…승자의 저주에 울어

이에 따라 유동비율(유동자산/유동부채)은 크게 나빠졌다. 유동비율은 기업의 단기지급능력을 나타내는 대표적 지표로 100%일 경우 기업이 가진 유동자산 전체로 1년 내에 만기가 도래하는 유동부채 전액을 갚을 수 있음을 뜻한다. 통상 재무회계에서는 이 비율을 200% 이상으로 유지하는 것을 모범적으로 판단한다.

금호산업의 유동비율은 2007년 83.61%에서 지난해 60.93%로 급락했다. 아시아나항공 유동비율은 34.14%에 불과했다.

자구책이 나오고 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대한통운 유상감자 등을 통해 약 1조9000억 원 가량의 현금을 계열사 통장에 밀어 넣었다. 이에 더해 각 계열사 회사채 발행량을 더욱 늘렸다.

15일과 16일에는 금호생명 주식 4000만주 유상증자로 약 2000억 원의 자금을 마련할 방침이다. 여의치 않을 경우 3자 배정 유증으로 매각한다. 유증과 함께 그룹 계열사와 총수 일가가 보유한 금호생명 주식 전량(4138만 주) 매각에 성공한다면 그룹은 약 4069억 원(액면가 5000원 기준)의 현금을 추가 확보할 수 있다.

확보 목표자금 4조5000억여 원의 절반 정도만 확보하는 셈이다. 계열사 추가 매각, 혹은 금융권으로부터의 추가 차입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인수합병 시장에서 "금호아시아나그룹이 결국 대우건설을 다시 토해낼 것"이라는 풍문이 나도는 이유다.

▲자료 : 금융감독원 전자공시게시판 연결감사보고서. ⓒ프레시안

"충동구매였나…?"

비단 금호아시아나만 힘든 게 아니다. 인수 후폭풍에 시달리는 것은 두산그룹, 유진그룹 등도 마찬가지다.

두산그룹은 밥켓을 두산인프라코어의 자회사로 편입, 중공업 부문을 그룹 핵심으로 키우겠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하지만 이후 실적 악화가 이어지면서 중공업 부문은 '돈 먹는 하마'로 전락했다. 주류부문에 이어 포장용기 업체 테크팩까지 매각해 9000억 원의 현금을 확보한 이유다.

유진그룹 역시 마찬가지다. GS그룹을 제치고 하이마트를 삼킨 데 이어 유진투자증권(옛 서울증권)마저 거머쥐어 인수합병 시장에 큰 화제를 뿌린 것은 옛날 얘기다. 유진그룹은 유동성 확보를 위해 보유한 유진투자증권 지분 5000만주를 한국종합캐피탈에 매각했다(500억 원).

<시사저널> 보도에 따르면 유진그룹은 직원을 위한 사택용 빌라까지 내다판 상태다. 유진그룹 총수일가와 고려시멘트, 유진투자증권, 하이마트, 기초소재 등 주요 계열사를 잇는 지배회사 유진기업의 유동성 상태는 단 1년 만에 심각한 수준으로 나빠졌다.

한화그룹이 지난해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시도했다 포기한 이유도 그룹 전체에 미칠 유동성 부담 때문이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평가다.

동부그룹은 알짜 계열사 동부메탈을 매물로 내놓고 이미 구조조정에 돌입한 상태다. 유동성 확보전이 대기업 집단에까지 본격화된 것이다.

유동성 악화되는데 일해도 돈은 나가기만

이들 재벌그룹의 손익계산서와 현금흐름표를 보면 돈이 얼마나 궁한지 확인 가능하다. 일단 영업을 해도 돈이 들어오지 않는다. 삼성증권에 따르면 500대 기업의 1분기 영업이익은 작년 같은 기간보다 56% 급감한 것으로 추정된다.

두산그룹의 3대 핵심 계열사인 두산, 두산중공업, 두산인프라코어는 지난해 일제히 적자전환했다(당기순이익 기준). 2007년 4242억 원 흑자를 기록했던 두산은 지난해 2001억 원 순손실을 봤고 두산중공업 역시 3514억 원 적자를 냈다. 밥켓의 모회사인 두산인프라코어 역시 1993억 원 흑자에서 3864억 원 적자로 돌아섰다.

공통적으로 지난해 재고자산이 큰 폭으로 증가한 상태에서 나온 결과다. 회계연도 말 재고자산이 증가하면 매출원가(기초재고+당기매입-기말재고)가 줄어들어 이익은 늘어난다. 3사 모두 재고자산이 두 배 가까이 증가했음에도 적자가 이 정도로 심각해진 까닭은 시장상황이 급격히 나빠진데 더해 영업외비용이 큰 폭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는 금호그룹 계열사에서도 확인된 현상이다.

그룹 지배계열사 두산의 지난해 손익계산서에 따르면 두산의 이자손익(이자수익-비용)과 외화환산손익(외화환산이익-손실)은 각각 4614억 원, 2621억 원 적자다. 이처럼 각 계정 악화가 이어져 지난해 영업외비용은 3조3577억 원에 달한 반면 영업외수익은 1조8718억 원에 그쳤다.

수익 급락은 거의 모든 재벌계열사에서 확인됐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의 경우 6대 상장계열사 중 적자를 보지 않은 곳은 새로 계열 편입된 대우건설과 대한통운 두 곳에 불과했다.

한진그룹의 경우 한진해운 등 일부 계열사 실적은 오히려 나아지기도 했으나 2007년 당기순손익 373억 원 흑자를 냈던 핵심계열사 대한항공이 지난해 무려 1조9174억 원 적자를 기록하면서 그룹 전체가 휘청거렸다.

▲ ⓒ프레시안

차입금 전쟁 더 커지기 전에…"구조조정"

이처럼 영업활동으로 벌어들이는 돈이 줄어들다보니 차입금 부담 증가를 무릅쓴 현금 확보 노력이 많아졌다. 한화그룹의 경우 5대 상장계열사 중 한화손해보험을 제외한 네 곳의 현금 증가 원인은 '재무활동으로 인한 현금흐름'이었다.

지주사인 한화의 지난해 연결현금흐름표에 따르면 한해 지속된 영업활동의 결과 현금은 오히려 1880억 원 빠져나갔다. 그 공백은 재무활동이 메웠다. 2007년만 하더라도 부채 등을 줄여나가면서 4757억 원이 재무활동 결과 줄어들었으나 지난해는 2조7526억 원이 유입됐다. 2007년 9991억 원이던 한화의 기말현금이 지난해 말 1조5321억 원으로 늘어난 이유다. 한화석유화학과 한화증권(3분기 기준) 역시 마찬가지다.

한진그룹의 경우 한진해운과 한진중공업이 이처럼 재무활동을 통해 확보 현금을 늘렸다. 동부그룹에서는 동부화재해상보험과 동부건설이 재무활동을 통해 현금을 다량 확보했다. 단기 차입금이 증가하더라도 유동성을 개선하는 게 더 시급하다는 판단이 그룹차원에서 내려진 셈이다.

유진기업의 지난해 감사보고서 역시 앞서 나열한 그룹들과 비슷한 형태를 보인다. 재무활동으로 인한 현금유입이 2007년에 비해 700억 원가량 늘어났고 당기순손익은 지난해 적자전환했다. 그룹의 새로운 캐시카우가 되라라 예상했던 유진투자증권은 당초 기대와 달리 지난해 3분기(2008년 말) 현재 492억 원의 적자를 냈다.

이처럼 재벌그룹의 부진이 심각해지자 그 동안 재벌 구조조정에 미온적이었던 정부의 입장도 점차 강경해지고 있다.

진동수 금융위원장은 지난 13일 "대기업도 지난 세월 무리했던 부분을 정리하고 가는 게 국민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채권은행들이 적극적으로 대기업 구조조정에 나서도록 대화하겠다"고 말했다. 채권은행의 실사가 지속되는 와중에 무게감을 더 높이는 발언이었다. 재벌계열사 평가를 확실히 하라는 주문인 셈이다. 다만 아직 정부가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달라진 게 없다.

▲올해 지정된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의 그룹 재무구조(전체회사 기준). F/E는 부채비율. 공정거래위원회 제공.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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