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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모자라는 식량, 사라지지 않는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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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모자라는 식량, 사라지지 않는 정치

[박동천의 집중탐구]<25>어설픈 기대와 조급한 자포자기

제3부 합리주의: 권력숭배 프레임
제3장 어설픈 기대와 조급한 자포자기


콩도르세, 생시몽, 마르크스 등은 번햄처럼 권력숭배에 자신을 내던져버리지는 않았다. 그들은 종전에 없었던 합리적 사회로 역사의 근본적인 변혁이 가까워졌다고 믿었다. 그런 세상에서는 관리만 있고 지배는 없으리라는 것이 그들의 희망이었다. 이 장은 이를 따지는 데서부터 시작해보자.

합리적으로 조직된 사회라고 해도, 사실 합리적으로 조직된 사회일수록, 규칙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회일수록 예컨대 수학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 뇌물이나 배경으로 수학교사직을 차지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만큼 자격이라는 규칙이 엄격하게 지켜질 것이다. 나아가 사람들이 대개 충분히 개명되어 자기가 수학교사의 자격이 있을지 없을지를 가늠할 수 있고, 사회질서가 전반적으로 합리적으로 편성되어 있다고 한다면, 수학교사의 자격이 부족한 사람이 수학교사가 되려고 기를 쓸 리는 없을 것이다. 그에게는 수학보다 뛰어난 다른 재능이 아마도 있을 테니 그 방면에서 일자리를 찾으면 되고, 설사 아무 방면에도 뛰어나지 못하더라도 단순노동이나 남의 심부름만 하더라도 합리적으로 설계된 사회에서는 먹고사는 데 지장은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시몽의 시대 말고 21세기인 현재를 생각하면 이런 그림은 더욱 매력적이다. 현재 기아와 빈곤의 문제는 불충분한 식량 생산이 아니라 유통과 분배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세계식량농업기구(FAO) 통계에 따르면, 2004년 세계 곡물생산은 22억7000만 톤, 육류 2억6000만 톤, 야채와 과일 13억8300만 톤, 우유 6억1900만 톤, 계란 6300만 톤, 그리고 생선(2001년 추계)은 1억3000만 톤이었다. 이를 60억 명과 365일로 나누면, 하루에 일인당 곡물 1036g, 육류 118g, 야채와 과일 631g, 우유 282g, 계란 28g (대략 중란 반 개), 생선 59g이 된다. 세계 평균 일인당 하루에 2800 Kcal의 식품을 소비하고 있다.
▲ 세계식량농업기구(FAO)의 통계를 보면 분배의 불균형만 없다면, 충분한 수의 부유층이 사치스럽게 소비하는 분량을 허용하더라도 인류가 이제 기아에 시달릴 필요는 없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런 생산량은 공급초과가 발생하지 않도록 조절한 결과로서, 생산능력은 현재 생산량보다 훨씬 높다. 따라서 분배의 불균형만 없다면, 충분한 수의 부유층이 사치스럽게 소비하는 분량을 허용하더라도 인류가 이제 기아에 시달릴 필요는 없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나아가 식량 이외의 여타 필수품들, 나아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도덕적 품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수준을 전인류에게 공급할 수 있는 물적 기반도 현재 이미 갖춰졌거나 적어도 가까운 장래에 갖춰진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합리적으로 물적 인적 자원을 할당하기만 한다면 생존은 물론이고, 우아한 삶으로 기준을 높이더라도 개인들이 서로 싸워야 할 필요는 없을 것처럼 보인다.

사회생활의 여러 국면에 현재 상태보다 합리화함으로써 효율성과 평화와 행복을 증진할 부분이 대단히 많다는 점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사회의 모든 문제가 합리화를 통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합리화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는 데서 합리화로써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연결하는 것은 사람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비약인데, 그 때문에 생성된 성급한 기대는 마찬가지로 성급한 좌절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이는 능력위주로 사회를 편성해야 한다는 계몽주의의 이상을 유기체의 모델에 접목시킨 결과다. 각 개인이 일정한 몫의 재능을 타고나고, 사람들의 재능을 다 모은 총량은 사회에 필요한 만큼과 같다는 발상으로서, 인체와 같은 생물학적 유기체에서도 그렇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생물학적 개체의 경우 각 부분들이 조화롭게 기능적으로 분화되어 있으면서도 전체의 생명유지와 활동에 기여한다는 사실은 경이로운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일부 기독교도들은 거기서 신의 존재가 증명된다고까지 할 정도이다. 유기체가 조화롭다는 경탄은 자연이 조화롭다는 경탄으로도 쉽게 이어질 수 있다. 사시사철 계절의 조화, 가물었다가 태풍도 불고 지진과 폭우가 교차하지만 전체적으로 균형이 유지되는 조화, 수십억 년간 변함없이 정해진 시간에 떴다가 지는 태양의 정교한 질서, 등등, 자연의 조화를 말하자면 끝이 없다.

이처럼 인간 사회도 각 개인은 기능과 소질에 따라 능력을 발휘하도록 최대한의 기회가 부여되고, 물품이든 문화 컨텐츠든 서비스든 과학이나 철학의 발견이든 개인들의 능력에 따라 생산된 결과는 사회전체가 고루 향유할 수 있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에 반대하는 것이 전혀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진보이념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내가 여기서 따지고자 하는 문제는 그와 같은 사회에서 권력이나 정치가 없어질 것인지, 없어야 하는지이다.

우선 따져봐야 할 질문 하나는 "자연이 조화롭다"는 인식이 외부적 사실에서 비롯되는가 아니면 내면의 태도에서 비롯되느냐는 문제다. 우리가 자연이라고 흔히 부르는 영역에서는 갈등과 투쟁과 재앙과 참변들이 무수히 일상적으로 발생한다. 루소는 야생동물 중에는 기형이나 병신이 없다는 점을 들어 자연이 건강하다고 기염을 토했지만, 야생에서 기형이나 병신이 없는 것이 아니고 살아남지 못해서 눈에 띄지 않을 뿐인 것이다. 홉스는 그래서 자연상태를 "고독하고 궁핍하고 역겹고 잔혹하고 일찍 죽는" 상태라고 봤고, 사실이라는 관점에서 그의 관찰은 전혀 틀리지 않다. 자연을 "조화"로 바라본다는 것은 흔히 쓰는 비유로, 잔에 반쯤 남은 물을 두고 "반이나 남았다"고 말하는 경우와 정확하게 똑같이 사실의 진술이 아니라 태도의 표명인 것이다.

합리적으로 세상을 편성함으로써 관리만 남고 정치는 사라지리라는 기대가 실현되려면 관리자들의 결정에 대해서 이해 당사자들이 승복하리라는 전망이 설득력을 가져야 한다. 일단 관리자들이 합리적으로 결정을 내리면 너무나 말이 안 되는 처사는 없어질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도 경계의 문제, 다시 말해 말이 안 되는 처사와 말이 되는 처사 사이 중간부분에 위치하는 결정들은 남게 될 것이다. 예컨대 어떤 조직에서 승진 자리가 셋 나왔는데 스스로 합리적으로 적격자라고 생각하는 지원자는 열 명이라고 하면, 관리진이 선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명까지는 현실적으로 이의가 없이 선발을 할 수 있더라도 세 번째에서는 두세 명의 경쟁자 사이에서 어떤 성품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선택이 달라지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이와 같은 경우 관리자 측에서 설령 지원자들보다 우월한 합리성에 따라 결정을 내리더라도, 지원자들이 아무런 불만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현재와 같은 사회생활에서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합리적 사회조직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면 정치가 불필요해진다는 이상을 간직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 때문에 인간 심성의 변화를 동시에 주장한다. 현재처럼 사람들이 탐욕적이고 경쟁적인 까닭은 자본주의라고 하는 사회구조 때문이고, 합리적으로 사회구조를 바꾸고 나면 절제와 양보, 협동과 온유가 사람들의 맘속에 스며들어 잔잔한 기본을 이루리라는 얘기다. 이제 바로 이 지점에서 결정적으로 나타나는 단견은 절제와 탐욕의 경계가 양수와 음수의 경계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다.

콩도르세와 생시몽은 물론이고 벤담이나 존 스튜어트 밀과 같은 공리주의자들, 그리고 프루동이나 크로포트킨 같은 무정부주의자들이 모두 계몽에 의해 정치가 과학으로 대체되기를 희망했고, 그 와중에 우리가 일상적으로 긋는 경계선 가운데 완전히 서로 성격이 다른 두 가지 종류가 있음을 간과했다. 이 사실이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드러나는 사람으로는 엥겔스를 뺄 수 없다. 엥겔스는 『반(反) 듀링론』 제1부 제12장 「질과 양의 변증법」에서 돈이 많아지면 자본으로 바뀐다는 마르크스의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물이 얼음으로 바뀌는 예, 그리고 이어서 CnH2nO2 형태의 카르복실 산들이 n의 값이 1, 2, 3, ...처럼 변화함에 따라 포름 산, 아세트 산, 프로판 산 등으로 성질이 변화하는 예를 들었다.

이에 대해 피터 윈치는 양의 변화에 따라 질의 변화가 수반되는 경우 가운데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엥겔스가 전혀 보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했다(『사회과학이라는 발상』, 제3장 제2절). 모래를 얼마나 쌓아야 한 무더기가 되는지, 또는 머리카락이 얼마나 없어져야 대머리가 되는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얼음이 물이 되고 다시 증기로 바뀌는 변화는 자연과학적 탐구에 의해서, 다시 말해 연구대상에 관한 탐구를 통해서 어느 정도까지 세밀한 규칙을 찾아낼 수 있는 주제이다. 반면에 머리가 얼마나 빠져야 대머리가 되느냐는 문제는 머리카락 수를 세어서 파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대머리"라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그들을 이해하는 (또는 오해하는) 차원의 문제이다.

탐욕과 절제의 경계, 우리사회에서 자주 나타나는 용어를 들자면 투기와 투자의 경계란, 얼음과 물의 경계에 비슷한 것이 아니라 대머리의 경계와 비슷한 구분이다. 조지 소로스나 워런 버핏은 투기꾼인가 투자자인가? 한국에서 젊은 맞벌이 부부가 적금을 타고 은행 융자를 보태 마련한 자금으로 기왕이면 노른자위에 해당하는 곳에 30평 아파트를 하나 마련하려고 파주에서 대전까지, 인천에서 횡성까지 동분서주 돌아다닌다면 투자자인가 투기꾼인가? 자본주의의 탐욕이 아무리 줄어들어도, 대학졸업반 학생이 대학원에 갈까 공무원 시험을 볼까 적당한 기업체에 취직을 할까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는 일이 사라질 수는 없을 것이다. 또는 배우자를 고르기 위해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는 저울질이 사라질 수도 없을 것이다.

합리적인 사회라면 정치가 필요 없으리라는 발상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철저하게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관점, 다시 말해서 인간을 관리대상으로 객체화하는 관점에서 나온다. "유아론과 순수 실재론이 겹쳐지는 것을 여기서 볼 수 있다"는 비트겐슈타인(Tractatus, 5.64)의 언표가 정확하게 해당하는 지점이다. 합리적인 사회를 투사하는 계몽주의자들의 설계도에는 설계자가 들어있지 않다. 설계자는 세상 밖에서 세상을 조종하는 조화옹으로 설정되어 있다.

설계자가 세계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서로 경합하거나 협동하면서 때로는 이해하고 때로는 오해하는 위상을 가진다면, 자기가 생각하는 합리성의 표준이 곧 보편적인 표준이 되리라는 유아론에 빠질 수가 없다. 얼음과 물의 경계에 대해서는 적어도 정치적으로 중요한 논쟁이 발생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점에서 합리적인 경계의 표준이 확정될 수 있다. 하지만 탐욕과 절제의 경계, 어떤 지위에 관해 적격자와 부적격자의 경계, 어떤 정책이나 노선에 관해 유익한지 해로운지의 경계는 사람에 따라서 합리적 표준의 의미가 본질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는 주제들이다. 이런 차원, 다시 말해 소위 가치와 목적과 도덕의 차원에서 벌어지는 논란이 합리성의 부족 때문에 발생한다고 믿는 것은 그 자체가 미숙한 지성의 징표일 뿐이다. 자기가 믿는 도덕이 유일하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윤리적 유아론, 즉 교조주의이기 때문이다.

앞 장에서 나는 의지와 결단의 영역에서 작용할 수 있는 합리성은 제일층위의 것이 아니라 제이층위의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윤리적 유아론은 물론 제이층위의 합리성에는 시선이 미치지 못한다는 표지에 해당한다. 양질 변환의 법칙에서 얼음과 물의 경우만을 표준으로 상정하고 대머리의 경우와 같은 유형은 완전히 놓쳐버리는 것과, 합리성을 제일층위의 형태로만 고집하고 제이층위의 유형은 철저하게 도외시해버리는 것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는 또한 유기체의 비유를 어디까지 끌어갈 수 있을지 적실성의 한계를 검토해 볼 생각조차 전혀 하지 않고, 무작정 인간사회에 갖다 붙여버리는 무모함과도 연관이 있다.

아트 사커라는 칭송을 받았던 지단 전성기 때의 프랑스 축구팀, 또는 프로농구를 방불한 패스 능력을 보였던 과거 소련의 아이스하키 팀, 거의 한마음이었다고 할 정도로 체계적으로 움직였던 롬멜의 전차군단, 등이라면 여러 명의 개인으로 이루어진 인간집단이 유기체에 가까운 조직력을 보인 최고수준의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예들을 바람직한 표준으로 상정하고 보면, 하나의 사회 전체라고 그런 정도의 유기적 통합을 이루기가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어렵기는 하겠지만 질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고 단지 정도의 차이라고 보고 싶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이 비유에는 결정적인 결함이 있다. 우선 생물학적 개체의 경우에도 인간 집단의 경우나 마찬가지로 항상 제대로 작동하지만은 않는다는 점까지는 같다. 거기서부터 두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나타난다. 첫째, 유기체를 구성하는 부속품은 물리적인 인과성에 의해 작동을 하든지 않든지가 결정되어 있는 데 비해, 인간집단의 구성원들은 의지와 선택의 주체들이다. 둘째, 유기체는 부속품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자체로 고장 또는 쇠퇴 또는 사망으로 접어들지만, 인간집단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축구하다가 느닷없이 공을 집어 들고 뛰어가 버린 소년 때문에 럭비라는 새로운 경기가 생겼음을 상기해보라. 예술과 과학에서, 기타 모든 사회생활의 영역에서 파격이나 혁신이 실패나 재앙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물론 많지만, 종전에 상상도 하지 못했던 비약적 발전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음을 상기해보라.

유기체의 모델에 따라 인간사회에 필요한 모든 기능들을 개인 구성원들이 중복이나 경합이나 공백 없이 제대로 수행하는 상태를 바람직하다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자기 뜻대로 움직여주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반면에 정치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 경우에 설득하든지 협박하든지 애원하든지 속여먹든지 교화하든지 감동을 주든지 아니면 죽이는 등, 모종의 수완을 발휘해서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는 지향성과 관계되는 사업이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상대의 뜻을 더 잘 알게 됨으로써, 원래 내가 가졌던 의지를 철회할 수도 있고 부분적으로 양보할 수도 있다. 합리적이라면 정치가 필요 없으리라는 기대는 단지 이런 과정이 귀찮다는 치기어린 불평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치기와 불평에는 지금까지 지적한 대로 합리성에 관한 불충분한 성찰, 그리고 인간사회의 본질에 관한 미숙한 이해가 끼어들어가 있다. 당연히 이처럼 치기와 미숙에서 비롯되는 기대는 어설픈 것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필연적으로 실천에서 좌절을 겪지 않을 수 없다. 번햄과 같은 경우는 대표적으로 성급한 기대가 조급한 좌절을 낳은 과정이 반복된 뒤에 노골적인 권력숭배로 귀결된 사례이다. 콩도르세, 생시몽, 벤담, 마르크스, 엥겔스 등의 경우에는 번햄에 비할 수 없이 의지력이 강해서 비상한 인내심을 보였다고는 할 수 있지만, 이들이 허공에다 투사해 놓은 평면적 합리성에 토대를 둔 유기적 사회의 그림에서 피상적인 매력을 느낀 젊은이들은 지금도 어디선가 성급한 기대로 시작했다가 조급한 좌절을 겪은 다음 권력숭배로 매몰되는 악순환의 도중에서 헤매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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